책/철학

<사는 게 고통일 때, 쇼펜하우어> , 박찬국

비상하는 새 2022. 3. 16.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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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게 고통일 때, 쇼펜하우어>

 

(273쪽)

 

 

 


 

1부 사는 게 고통이다

 

17세에 염세주의자가 된 철학자, 쇼펜하우어

 

어떤 일이 우리 뜻대로 풀리지 않을 때 우리는 고통을 느낀다. 그러나 쇼펜하우어는 설령 모든 일이 뜻대로 이루어져도 인생은 고통이라고 본다. 모든 일이 뜻대로 이루어지면 우리는 평온한 행복감을 느끼기보다는 오히려 권태를 느끼게 된다. 우리는 종종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을 것 같은 유명 인사들이 마약이나 도박 혹은 성추행이나 성폭력 등으로 언론에 오르내리는 것을 본다. 사람들이 이렇게 한순간에 추락하는 근본적인 원인 중의 하나는 권태다. 이들은 권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언가 자극적인 것을 찾아 나선 것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충족되지 않는 욕망에 시달린다면, 넘쳐 나는 부 때문에 아무런 걱정도 없을 것 같은 사람들은 권태에 시달린다. (18)

 

쇼펜하우어는 [여성론]이라는 에세이에서 여성을 노골적으로 비하하는데, 이러한 여성 혐오는 상당 부분 어머니와의 불화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여성에 관해 전혀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오페라 배우이자 가수였던 카롤리네 야게만에게 지독한 짝사랑에 빠진 적이 있었으며, 베를린 국립극장의 합창 단원이었던 카롤리네 메돈을 사랑하여 자신의 유산 중 일부를 그녀에게 남겼고, 43세의 나이로 17세 소녀에게 청혼했다가 거절당한 적도 있었다. (29) -> ㅡㅡ

 

인생은 고통과 권태를 오락가락하는 시계추다

 

우주의 근원적인 실재가 끊임없이 결핍감에 시달리는 맹목적인 욕망의 성격을 띠고 있기에, 거기서 비롯되는 모든 개체도 맹목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서로 투쟁할 수밖에 없다. 바로 이것이 왜 세계에 악이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해서 쇼펜하우어가 제시한 답이다. (39)

 

이성은 욕망을 통제하는 주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동원되는 욕망의 노예에 불과할 때가 많다. 예를 들어 우리가 부와 명예에 대한 욕망에 사로잡혀 있을 때 이성은 부와 명예를 얻을 방법을 고안해내는 역할을 한다. (41)

 

행복보다는 고통을 강하게 의식하기 때문에, 우리는 행복해지려고 노력하기보다는 고통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가능한 한 제거하려고 애써야 한다. 행복한 인생이란 고통이 없어 견딜 만한 인생이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알려면, 그 사람이 무슨 일로 행복한지를 묻기보다는 무슨 일로 힘들어하는지를 물어야 한다. 이는 사소한 일로 인해 힘들어하는 사람은, 사실은 다른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힘들어하는 일이 사소할수록 행복한 사람이다. (47)

 

다른 동물들은 성욕이나 식욕과 같이 본능적인 욕망이 충족되면 평화롭게 자신의 삶을 즐긴다. 다른 동물들은 단순히 생존해 있다는 사실에 아무런 불만이 없는 것이다. 이에 반해 인간은 본능적인 욕망이 충족된 상태에서도, 시간이 아무런 자극도 없이 무미건조하게 흘러가면 지겨움과 공허감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공허한 시간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킬링타임용 자극을, 즉 시간을 죽이는 자극을 찾아 나선다. 인간은 권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온갖 잔인하고 부도덕하며 심지어는 자신을 망치는 행동마저도 불사해왔다. (50)

 

권태에 가장 많이 시달리는 자들은 물질적으로는 풍족하지만, 머리는 텅 빈 속물들이다. 이들은 권태에서 벗어나려고 여기저기를 여행하면서 관광지를 찾아 돌아다니지만, 이는 거지가 구걸할 곳을 찾아 헤매는 것과 유사하다. (51)

 

이 세계는 생각할 수 있는 세계 중에서 가장 악한 세계다

 

쇼펜하우어는 이 세계를 현상계라고 부르며 이 현상계의 이면에 우리가 지각하지 못하는 실재 자체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이런 실재 자체를 쇼펜하우어는 칸트의 용어를 빌려 () 자체라고도 부른다. 그는 그것을 하나의 우주적 의지라고 규정한다. 이러한 우주적 의지는 특정한 시간과 공간 상에 나타나는 개체가 아니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있다. 자연계의 질서?

 

쇼펜하우어는 사람들이 성행위를 숨어서 하고 발각되면 부끄러워하는 것은 자신들이 세상의 고통을 영속시키는 자들이라는 사실을 무의식적으로 알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92)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는 결국 세계의 근원인 우주적 의지마저도 내적인 갈등과 고통에 시달리는 비합리적인 것으로 보는 결과로 귀착된다. 쇼펜하우어의 이러한 사상은 우주의 근원을 자애로운 인격신으로 보는 그리스도교의 사상과 철저하게 대립한다. (103)

 

극렬한 인간 혐오, 인간보다 개가 낫다

 

우리의 생각과 행동이 성격에 의해 규정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은 성격의 굴레에 굴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성격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다. 또한 인간의 성격이나 행동이 인류로서의 종()적인 성격이나 개인적인 성격에 의해서 좌우되기 쉽다는 사실을 잘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더 온유하게 대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자신의 성격적 경향성으로 인해 저지른 과오 때문에 자신을 지나치게 자책하지 않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자신이나 타인의 성격을 체념적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자신이나 타인에 대한 따뜻한 이해와 위로와 함께 그러한 과오를 다시 저지르지 않을 힘을 자신이나 타인에게 부여하는 것이다. (124)

 


 

2부 고통의 늪에서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인간은 욕망의 존재이기에 고통스럽다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행복을 위한 세 가지 조건

 

쇼펜하우어는 오랫동안 무명 상태에 있던 자신을 유명하게 만든 [소품과 부록]에 실린 [삶의 예지]라는 글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는지에 대해 탐구하고 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라서 인생의 행복을 첫째로 사회적 행복, 둘째로 정신적 행복, 셋째로 신체적 행복 등 세 가지로 구분함과 동시에 인간의 운명에 차이를 초래하는 세 가지 근본 요소를 거론한다. (137)

 

a. 참된 자아 가장 넓은 의미의 인격으로서 건강, 체격, 체력, 용모, 성격, 품성 및 이지적 능력 등을 포함.

b. 물질적 자아 모든 물질적 소유물.

c. 사회적 자아 남의 눈에 비치는 자아로서 명예, 지위 등을 포함한다.

 

다시 말해서 참된 자아는 그가 어떤 사람인가’, 물질적 자아는 그가 무엇을 소유하고 있는가’, 사회적 자아는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이는가를 의미하며, 행복은 결국 이 세 가지에 달려 있다. 참된 자아, 즉 건강, 체력, 성격 등은 모두 자연에 의해서 우리에게 주어지지만, 특히 그중에서 성격이야말로 사람들의 행복과 불행을 가장 크게 좌우한다. 같은 상황이라도 사람들이 명랑한 사람이냐 아니냐에 따라서 그 상황은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명랑한 성격이 행복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에 대해서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말한다.

 

내적인 재보 중에서도 행복에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것은 명랑한 마음이다. 다른 재보가 없이도 이 명랑한 마음만 있으면 저절로 즐거워지기 때문이다. 명랑한 사람들에게는 항상 즐거워할 만한 원인이 있다. 그 원인은 그가 명랑하다는 것이다. 명랑한 마음이라는 재보는 어떤 재보로도 바꿀 수 없기에 명랑한 마음에 필적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우리는 흔히 자신을 괴롭히는 어떤 문제만 잘 해결되면 고통은 사라질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환상이다. 고통과 행복의 총량은 우리의 성격에 의해서 이미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가 개나 고양이를 아무리 행복하게 해주려고 해도 그것들이 느낄 수 있는 행복의 최대치는 일정한 한계를 넘어설 수 없는 것과 같다. 행복뿐 아니라 어떤 사람이 겪는 고통의 최대치도 그 사람의 성격에 의해서 정해져 있다. 어떤 사람이 처한 외부 조건이 갑자기 변하더라도 개개인이 느끼는 행복과 고통의 정도는 변함이 없는 것이다. (140)

 

마음의 상태나 마음의 수준에 따라서 우리는 그때마다 다른 세계에 산다. 따라서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는 세계를 바꾸려고 하지 말고 자신의 마음을 바꿔야 한다. 정신이 저열하고 빈곤한 자들의 행복은 감각적인 쾌락이나 평범한 가정생활이나 유치한 사교 등에서 얻는 즐거움을 넘어서지 못한다. 이에 반해 가장 고상하고 미묘하며 오래 지속되는 쾌락은 그것을 즐길 수 있는 정신 능력을 갖춘 소수의 정신적 귀족에게만 허용된다. 이렇게 정신이 풍부한 사람은 아무리 고독한 곳에서도 독서를 하거나 사색하면서 기쁨을 누릴 수 있다. (143)

 

건강과 함께 욕심이나 시샘에서 벗어나 있는 마음, 절도 있고 건전한 의지, 선량한 양심, 분별력 있는 지성을 가진 사람은 행복하다. 이것들은 우리 자신에게 속해 있어서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들은 부나 명예와 같은 외적인 것들보다 훨씬 더 소중하다. 행복하기 위해서 필요한 또 하나는 자신의 성격에 맞는 일과 생활을 하는 것이다. (150)

 

쇼펜하우어도 부처와 마찬가지로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세계를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다스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쇼펜하우어는 이성에 의해서 의지를 지배하는 방법으로 세계의 본질에 대한 철학적 통찰, 심미적 직관, 동정, 금욕주의적 의지 부정을 들고 있다. (151)

 

 

고통을 삼키고 삶과 화해하는 법

 

아름다움은 우리를 욕망에서 벗어나게 한다

 

우리는 사물을 아름다운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이 경우 우리는 사물의 아름다움에 매혹되어 그것들 앞에 이끌려진다. 과학에서 사물의 인과법칙을 드러내는 것은 사물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앞에 놓고 세심하게 관찰하고 실험하는 주체로서의 우리다. 이에 반해 우리가 사물을 아름답게 바라볼 때 그러한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것은 사물 자신이다. 이렇게 사물을 아름답게 보는 것을 쇼펜하우어는 심미적 관조라고 부른다. 이성이 욕망을 위해서 일하던 상태에서 벗어나서 사물과 세계를 호젓하게 관조하면 사물과 세계는 아름답게 나타나고 이와 동시에 우리 마음에는 저절로 평안이 깃든다. 이러한 안식과 평안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쾌락과 행복과는 다르다.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쾌락과 행복은 욕망을 충족시킬 때 생기므로 우리는 욕망의 노예상태이다. 이에 반해 심미적 관조를 통해 얻는 안식과 평안은 욕망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되는 데서 비롯된다. (160)

 

예술은 어떤 사물 하나만 보고서도 단적인 직관에 의해서 그 사물이 속하는 종의 본질을 드러낸다. 과학은 관찰과 실험에 근거한 엄밀한 추론에 따라 진보하지만, 예술은 직관에 의해 목적을 달성한다. 따라서 과학은 어느 정도의 지성만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예술은 어떤 것을 직관적으로 포착하는 천재성을 요구한다. (172)

 

사람들은 일상적인 현실에서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분리된 하나의 개체로 느끼며 자신의 생존과 우월한 지위 확보를 위해서 투쟁한다. 일상적인 현실에서는 개별화의 원리가 지배하는 것이다. 그러나 음악이 흐를 때 우리는 이러한 개별화의 원리를 초극하면서 서로 간의 차이와 차별, 즉 개체성을 망각하고 하나가 된다. (201)

 

동정심, 우리는 모두 하나라는 직관적 인식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선의와 사랑을 베푸는 것은 사실은 다른 사람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느끼면서 완화하거나 제거하려고 하는 동정심에서 비롯된다. 쇼펜하우어는 기본적으로 이기적 존재인 인간이 동정심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신비롭고 놀라운 일이라고 말한다. 고통을 겪는 사람들에게 동정을 느끼는 순간 우리는 현상계를 규정하는 개별화의 원리에 따라 지배되는 상태에서 벗어나게 된다. 동정에서는 나와 남의 경계선이 허물어져 남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느끼는 것이다. (214)

 

쇼펜하우어는 인간이 선한 존재가 될 수 있고 타인을 동정할 수 있다는 증거를 인간이 울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에서 찾는다. 우리는 현재 느끼는 고통보다는 과거의 고통을 돌이켜보면서 울 때가 많다. 따라서 고통이 울음의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며, 울음은 고통을 겪고 있거나 겪었던 자신에 대한 동정 때문에 생긴다. 우리는 고통받는 자신을 떠올리고는 자신의 상태를 참으로 동정할 만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는 것이다. 운다는 것은 자신에 대한 동정이다. 그런데 고통받는 자신을 생각하면서 울 수 있는 인간은 다른 인간이 고통받는 것을 보면서도 울 수 있다. (215)

 

심성의 참된 선함은 도덕 이론과 같은 추상적인 지식을 통해서 생겨날 수 없다. 윤리의 영역에서는 예술의 영역에서와 마찬가지로 추상적인 개념적 사고가 본질적인 역할을 하지 못한다. 미학에 정통하다고 해서 훌륭한 예술가가 되지는 못한다. 이는 예술가가 되는 데 필요한 것은 미학 이론이 아니라 천재적인 직관과 상상력이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도덕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추상적인 도덕 이론이 아니라 추론으로 도달할 수 없는 직접적이고 직관적인 인식이다. 사람들에게 잠재된 동정심을 일깨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도덕적인 훈계를 하거나 추상적인 도덕 이론을 설파하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선한 사람들의 전기라든가 일화를 들려주는 것이다. (222)

 

욕망으로부터의 영원한 해방

 

신체는 물 자체로서의 의지 자체의 표현이기 때문에, 신체가 살아 있는 한 살려는 의지도 항상 가능성으로서 남아 있으면서 의지를 부정하려는 노력을 압도하려고 한다. 따라서 살려는 의지를 부정한 절대 선의 경지는 끊임없이 투쟁해서 항상 새롭게 획득되지 않으면 안 된다. 성자들의 삶에서 볼 수 있는 평정이나 열락은 살려는 의지와의 끊임없는 투쟁에서 생긴 꽃이다. (230)


쇼펜하우어는 고통과 권태에서 오락가락하는 삶이 가치를 갖는다면 그것은 삶이 원할 만한 것이 아님을 인간에게 가르쳐주는 데 있다고 말한다. 인간이 삶에서 겪는 고통은 인간이 삶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게 하는 동인으로서만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쇼펜하우어의 가르침도 불교의 가르침과 상통한다. 불교에서는 우리가 깨닫기 위해서는 인간으로 태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천상의 세계는 고통이 없어서 깨달음을 향하는 동력을 제공할 수 없다. 이에 반해 동물은 이성이 없어서 세상이 고통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인간으로 태어났을 때만 우리는 고통을 경험하면서 삶이 고통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삶의 윤회 과정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할 수 있다. (236)

 

생이 악몽이면 죽음은 축복이다

 

살려는 의지로서의 개체는 자신에게 주어진 생을 무조건적으로 영속시키고 싶어 하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우리가 개체로서의 자신은 환상이며 물 자체로서의 자신은 영원하다는 사실을 통찰할 때 극복될 수 있다. (246)

 


 

나가는 글 ; 내 안의 유령들 떨쳐내기

 

우리는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를 불교의 염세주의와 마찬가지로 조건적 염세주의라고 부를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조건 아래서만 삶은 고통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삶 자체가 고통이 아니라 삶에 대해서 우리가 어떤 태도를 보이느냐에 따라서 삶은 고통이 될 수도, 축복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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