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철학

<인스타그램에는 절망이 없다>, 정지우

비상하는 새 2022. 8. 11.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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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스타그램에는 절망이 없다

(324)

 

 


 

1. 환각의 세대: 우리가 원하는 것은

 

나의 시대, 나의 세대, 나의 삶

10대의 어느 날, 나는 사람이란 마땅히 꿈을 좇아야한다는 것을 뒤통수 맞은 듯이 깨달았다. 그 꿈은 흔히 어른들이 말하는 출세와는 달랐다. 꿈꾸는 삶이란,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를 얻고 남부럽지 않은 부와 권력을 획득해 떵떵거리며 사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꿈은 지극히 낭만적인 무엇이어야 했다. 내 안의 재능과 소질을 최대한 발휘하여, 내가 이 세상에서 마음껏 뛰어 놀며 자신을 펼칠 수 있는 어떤 상태에 도달하는 것. 나는 당시 글 쓰는 친구와 함께 그 꿈은 바로 작가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선택 이후 나의 20대를 내내 지배했던 것은 에 대한 강박과 현실에 대한 불안이었다. 꿈을 향해 나아가는 길에는 온갖 위로와 응원의 말들이 즐비했다. 자기만의 신화를 믿어라, 꿈을 좇는 자는 온 우주가 도와준다, 청춘이란 원래 아픈 것이니 참고 견뎌라, 생생히 꿈꾸면 이루어진다... 그런 말들은 꿈만 믿으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낭만적 우주에 관해 속삭였지만, 둘러싼 현실을 보고 있으면 우주가 도와주는 사람은 제한된 극소수에 불과해보였다. ‘금수저엄친아들을 제외한 사람들은 역대 최악의 청년실업률, 단군 이래 최대의 스펙 경쟁, 거듭되는 경제위기 속에서 꿈과 현실을 혼동하는 분열증에 걸려 있었다. 분열증의 특성을 꼽자면 환각을 마주한다는 것이다. 우리 세대는 어느 순간부터 묘한 환각에 시달려왔다. 나는 그 환각의 이름을 상향평준화된 이미지라 불러왔다. 우리 세대는 최악의 양극화에 시달리는 시대의 청년들이지만, 어떤 측면에서는 지극히 평준화된 이미지를 누리고 있다. 이를테면 한편에서는 학자금라든지, 장래 얻게 될 아파트라든지, 이미 공고해져버린 상류층에서의 삶이 보장된 누군가가 있을 것이고, 반대편에는 학자금 대출을 짊어지고, 서울 진입은 인생의 시작부터 난관이고, 결혼과 출산은 아득한 현실로만 느껴지는 누군가가 있겠지만, 두 사람이 누리는 삶에 묘한 평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세대라면, 이 시대 청춘이라면 마땅히 누리는 것들, 이른바 핫한것들을 향유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20)

우리를 가장 깊은 우울로 떨어뜨리는 때는 언제일까. 그것은 내 삶에 어떠한 화려한 이미지도 없는데, 가까운 친구들의 sns나 프로필 사진 등이 온갖 화려한 이미지들로 치장되어 있는 걸 볼 때일 것이다. 그런 사진을 볼 때 급속도로 우울한 마음이 들고, 스스로도 어서 그러한 이미지에 속하길 바라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세대의 감각에서는 그러한 환각적인이미지에 제대 도달해야만 안심이 된다. 그러한 이미지에서 너무 멀어지지 않아야만 박탈감을 방어할 수 있고, 제대로 살고 있다는 감정을 느낄 수 있다. 과거의 사람들이 이 나이쯤되면 이제 장가가야 하는데, 아이 낳아야 하는데하던 것과 동일한 맥락에서, 우리 세대는 나도 저기 가봐야 하는데, 저걸 가져야 하는데같은 욕망을 느낀다. 타인이 속해 있는 화려한 현재의 이미지, 특히 소비 위에 눌러앉은 그 현란한 행복이야말로 우리에게 무엇보다 견딜 수 없는 소외감을 선사한다. 이러한 환각들은 청춘을 통과하는 내내, 그리고 지금까지도 여전히 내 주변을 서성거리고 있다. 문제라면, 그러한 이미지가 정말로 도달 가능하다는 점에 있다. 저가항공의 발달로 해외여행 비용은 과거보다 몇 분의 일로 줄었다. 또한 과거에는 부자들이나 누렸을 법한 경치에서의 커피 한잔, 루프톱 수영장 등에도 크게 부담 없는 선에서 접근이 가능하다. 과거에는 아득히 멀리 있던 것들, 실제로 대단한 출세를 하지 않으면 접근할 수 없었던 것들이 모두 우리의 손 가까이 다가왔다. 그 가까움, 그 도달 가능성, 그 밀접함이야말로 우리를 더욱 그러한 이미지로 끌어들이고 있다. 마치 소용돌이나 개미지옥, 블랙홀처럼 말이다. (22)

환각 이미지는 매일같이 우리의 일상을 침범한다. 내가 앞으로 삶을 상상할 때 그토록 많은 선택 가능한이미지들이 들어차 있다. 이러한 감각은 확실히 기성세대가 인생을, 미래를, 앞으로의 삶을 대하던 것과는 다른 감각이다. 우리를 향해 손짓하는 이미지들은 정확히 우리의 주변에, 어떤 공간들로 산재해 있다. 우리 윗세대에게 인생은 일직선상, 시간의 수직선 위에서 진행되어가던 무엇에 가까웠을 것이다. 대학에 입학하고 나면 졸업하고 취직을 하고, 그 후에 돈을 모아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아파트 평수를 늘리고, 중년의 위기와 갱년기를 지나 효도관광과 퇴직 이후의 삶으로 진입해가는 기나긴 서사적 여정이 인생이었다. 반면 우리는 삶을 여러 선택 가능한 공간들로 바라보며 체험한다. 내년 혹은 내후년, 아니면 그보다 더 먼 미래를 생각할 때 우리의 마음속을 채우는 건 선택 가능한 저 여러 이미지들이다. 아마 나는 친구들과 해외여행을 떠나 있거나, 댄스동아리에서 남녀 어울려 춤을 추고 있거나 등등이다. 무엇이 되었든 그러한 이미지들은 평등하게 나열되어 앞에 서 있다. 각각의 미래가 이미지로 그려져 있는 문들 앞에서, 그중 어느 것에 입장할지는 그저 우리 선택에 달려 있다. 강렬한 행복 이미지들 앞에서 기존의 서사적 인생관에 따른 의무들, 거쳐가지 않으면 안 되는 인생의 지점들, 통과의례 같은 건 그다지 의미도, 매혹도, 매력도 주지 않는다. 이러한 인생관은 어쩌면 우리에게 존재하는 저 무수한 소비의 대상들이 안겨준 방식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소비자로 자랐고, 세상은 우리가 무엇이든 소비할 수 있음을 가르쳐주었다. 중요한 것은 제때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훌륭한 어머니와 아버지가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생의 어느 때건 즉각적으로 저 행복의 이미지를 소비할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결혼이든 육아든 그러한 이미지를 누리는 데 방해가 된다면 차라리 거치지 않는 것이 훨씬 낫다. 가장 중요한 것은 소비의 정점인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지, 그 밖의 전통적인 관습들에 따르는 것이 아니다. (25)

대학원을 다니며 내가 목도한 것은 앞으로 나의 삶이 그러한 환각 이미지에 온전히 속한 삶이라기보다는, 이따금 매트릭스 속 세계에 접속하지만 대부분은 매트릭스 바깥에서 사는 삶이 아닐까 하는 사실이었다. 어느 시점에 이르자 나는 환각 이미지들을 이따금 흡입하는 걸 넘어서 더 온전한 삶을 바라게 되었다. 나를 더 안정적으로 지지해줄 수 있는 삶의 조건을 찾게 되고, 그리로 이동하고 싶어졌다. 특히 거기에는 주거 안정, 노후의 안락, 지속적인 인정과 다정한 사랑 같은 게 있어야 했다. 다시 말해 나 역시 어느 순간부터는 그토록 좇을필요가 없다고 믿었던 기성세대적인 삶, 안락한 행복이 있는 가정, 안정적으로 진행되는 일상을 바라게 된 것이었다. 그렇게 시선을 옮기자 엄청난 분열을 맞이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안정적인 환경에서 살기 위해서는 꿈보다 현실을 좇아야 했다. 꿈 자체의 미이지를 좇기보다는 그 꿈이 현실적으로 어떤 이익을 줄 수 있을지를 치밀히 계산해야 했다. (29)

 

밀레니얼과 시소의 세계관

우리는 신념을 소비한다

저출생은 거대한 가치관 변화의 문제다

기존의 결혼을 추구하게 하는 핵심적 감정이 분리감, 소외감, 박탈감 등이었다면, 더 이상 결혼을 하지 않는 일이 그러한 감정을 과거처럼 강력하게 촉발하지 않는다. 결혼하지 않는 이들끼리의 소속감, 그들끼리의 취향, 그들끼리의 라이프스타일은 갈수록 확고해지고 있으며 소외될 가능성도 거의 없어지고 있다. 이는 전반적으로 젊은이들의 가치관이 결혼하고 출산하고 싶다는 지향 자체를 벗어나고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 세대 혹은 우리 세대를 전후한 세대들이 바라는 것은 총체적 의미에서 잘 살며well-being’ 각자의 개별적인 행복을 누리는 것이지, 어떤 집단적 가치관에 따라 공통된 지향에 투신하는 것이 아니다. 국가, 가정, 결혼, 출산, 출세... 그 무엇이 되었든 과거 기성세대의 핵심적 가치관이라 할 만한 것들이 갖는 절대성은 완전히 상실됐다고 볼 만하다. 오히려 그것들은 다른 가치들과 동등하게, 때로는 더 열등하게 취급되고 비교되고 선택되는 대상이지 결코 인생에서 근복적으로 추구해야 할 가치는 아닌 것이다. (46)

 

우리는 왜 연애를 갈망하는가

블루보틀에서

청년 세대는 이미지에 닿길 원한다. 이미지를 소유하길 원하고, 그 이미지 속에 있길 바란다. 최신의 혹은 가장 핫한 이미지를 누구보다 빨리 누리길 원하고, 그 이미지에 닿지 못함에 안달한다. 그래서 블루보틀 현상에도 그 밖의 핫한 이미지, 즉 핫플레이스, 호캉스, 유명 관광지, 명품 소비에 따라붙기 마련인 인증샷 문화가 필연적으로 동반된다. 아마 블루보틀 매장에 들어가서 사진을 찍지 않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제야 안달하는 마음이 사라지고, 안심하고, 만족감을 느끼게 되었을 것이다. 이미지의 확산과 성행은 확실히 이 시대가 소비사회의 한 가운데로 접어들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우리 사회의 오랜 특성인 중앙 및 상향 집중화 현상도 보여준다. 과거에 소용돌이의 중심출세자수성가’, ‘부자 되기같은 것이었다면, 이제 그 소용돌이의 중심은 가장 화려한 최신의 이미지들이 되었다.

 

인스타그램에는 절망이 없다

인스타그램에는 몇만에서 몇십만 정도의 팔로워를 거느린 수많은 인플루언서들이 있다. 그런데 그들이 대단한 무엇을 하는 건 아니다. 대단한 콘텐츠를 생산하는 크리에이터들도 아니고, 팔로워들에게 아주 의미 있는 무언가를 선물하는 것도 아니다. 자기 삶을 전시하는 스토리텔링에 뛰어나지도 않다. 그들이 제공하는 건 단지 어떤 이미지에 속해 있다는 느낌뿐이다. 이 사람을 팔로우하면 나도 뒤처지지 않고 소외되지 않고 흐름에서 쫓겨나지 않은 채 최신의 이미지 유행에 속할 수 있다는 위안을 느낀다. 실제로 인스타그램에 올라오는 사진들을 계속 보고 있으면 현실감각을 묘하게 잃어버린다. 내가 속해 있는 현실에 대한 인지부조화가 생기고, 삶 혹은 세계가 오직 저 밝고 화려하며 채색된 이미지들로 치환되는 듯한 경험이 일어난다. 삶이란 잘 정돈되고 단정하게 꾸며진 홈인테리어 속 순간, 잘 차려입고 멋진 공간을 거니는 순간, 아름다운 야경을 배경으로 커피를 마시는 순간, 따끈따끈한 브런치가 나온 햇빛 드는 오전의 순간으로만 구성되는 듯한 착각을 느끼는 것이다. 그런데 인스타그램의 이미지들은 대체로 연출된 단 한순간의 이미지일 뿐이지 현실도, 삶도 아니다. 문제는 우리의 삶이 실제로 그러하며, 그러해야만 한다는 강박이 점점 심화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미지와 실제 삶의 간극이 일상화되면서 어쩌면 절망과 우울, 분노가 더 극적이게 되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삶이 온전해질 수 있는 가능성은 적어도 타인들의 이미지속에 있지는 않다. 모든 시대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삶을 빼앗는데, 이 시대는 확실히 사람들의 삶을 잊게 만드는 방법으로 이미지를 활용하고 있다. 이미지를 보고 이미지를 좇으며 삶을 잊어버릴 것. 삶과 현실이 놓여 있는 실제적인 맥락으로부터 이탈될 것. 그리고 계속하여 어떤 위안의 이미지를 제공하는 것들에 돈과 시간을 바칠 것. 그것이 이 시대의 지상 명령이고 우리가 삶을 박탈당하는 방식이다. 삶과 이미지의 간극을 절실하게 마주하는 것은 삶을 되찾기 위한 전쟁이다. (65)

 

밀레니얼 세대를 위한 옹호

아재들의 전성시대, 청년들의 절망시대

나이가 많은 이들이 여러 가지 권력을 포함하여 지식과 지혜까지도 풍요롭게 가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역사만 보더라도 이는 그리 당연한 일은 아니었다. 처음 386세대가 주목받았을 때 이미 그들은 청년으로서 민주화를 이루었고, 이후에는 대통령을 탄생시키며 시대의 주역이었다. x세대 역시 기성세대가 베풀어주는 문화를 누리기보다는 20~30대에 자신들만의 문화를 창출하며 시대를 이끌어갔다. 지금처럼 모든 힘을 쥔 기성세대가 정치에서든 문화에서든 청년들을 간택하거나 내치면서 휘두르는 구조가 그리 공고했다고 보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윗세대가 이미 정치와 문화를 선점하고 자본과 권력을 토대로 이를 공고히 하면서, 그 아래 세대가 가지게 된 것은 절망과 굴종이다. 이미 아프니까 청춘이다로 유명해진 세대, 그에 아프면 환자지라고 대답하는 세대, 다시 N포 세대로 여전히 불리고 있는 세대와 거기에 포기도 선택이다고 항변하는 욜로 세대는 모두 같은 세대다. 이 세대는 윗세대가 결정하는 사회에 살면서 윗세대가 만든 문화를 소비해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 그저 정치적으로는 절망과 포기를 이따금 토로할 수밖에 없고, 문화적으로는 유튜브와 같은 1인 미디어에서 자신들의 영역을 만들어가고 있는 정도다.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가야 할 청년들은 그러기도 전에 생활고, 학자금 대출, 결혼과 출산 포기, 각자도생에 내몰리고 있다.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함 속에서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기성세대의 비위를 맞추고 그들의 기준에 들어 겨우 제도와 자본에 소속되는 것밖에 없다. 청년들이 만들어갈 세상이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73)

 

우리는 노력을 조롱하는가

그 와중에 나오는 소확행이라든지 노멀크러시normal crush(출세나 화려한 삶에 집착하지 않고 평범한 삶을 추구하는 현상), 노오력에 대한 회의 같은 말들은 일종의 투정에 가깝다. 오히려 그들은 너무 노력하며 살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매일 독박육아하는 주부가 육아의 어려움과 그에 대한 회의를 말하지, 매일 출퇴근하느라 아이를 돌볼 시간이 없는 회사원은 육아에 대해 회의하지 않는다. 청년층의 노력에 대한 냉소와 회의는 오히려 청년들이 항상 너무 노력에 내몰려 있기 때문에 나온다. 그렇기에 묘한 결론이 나오게 된다. 노력에 대한 회의와 냉소의 말들이 세상을 뒤덮고 있지만, 정작 그렇게 말하는 이들이 가장 노력하는 이들이라는 결론이다. (76)

 

청년의 통찰로 말해져야 한다

청년들은 독서를 하지 않는가

세상이 좋아질 것 같은가

어쩌면 앞선 세대들은 미래가 나아지는세상이라는 걸 경험해왔을지도 모른다. 독재가 끝나고 민주화가 왔고, 누구나 좋은 직장을 얻거나 자기 집 한 채쯤은 어렵지 않게 소유할 수 있는 시절이 왔고, 해외여행도 자유롭게 다닐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청년세대는 이 세상이 좋아졌다고 믿을 만한 어떠한 경험도 하지 못했다. 오히려 주변의 모든 지표들은 세상이 지옥이 되어가고 있음을 느끼게 해줄 뿐이다. (85)

 

대학 도서관을 둘러싼 상처들

불안에는 비용이 든다

기성세대의 정의와 청년세대의 공정

청년들은 더 이상 기적을 바라지 않는다. 소소한 삶으로 가는 일조차 태생적으로 대부분 정해져 있고, 삶의 어느 시점에 이미 결정당했다는 걸 알고 있다. 그나마 그런 소박한 삶에 이르기 위한 마지막 길이 공정성이라고 믿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세상의 평등 대신 공정성을 택했고, 그것이 그들이 딛고 설 수 있는 마지막 대지라는 것을 알고 있다.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라도 물어뜰으려 한다. 그것이 마지막 수단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103)

 

공정성, 그 작은 세계의 룰?

공부는 신분을 바꾼다

절망과 욕망 사이: 교육과 공정성

청년 문제의 착시

청년 문제는 그 이름만 바꿀 뿐 고스란히 노동 문제, 저출생 문제, 주거 문제, 여성 문제 등으로 이동한다. 청년 문제가 해소된 것처럼 보이는 자리에는 소수의 승리자와 다수의 생존자가 남는다. 어쩌면 문제의 시작은 여기서부터다. 취업을 했지만 대다수의 직장이 출산휴가나 육아휴직 등을 제대로 보장하지 않고, 여성들은 경력단절이라는 더 거대한 벽앞에 서게 된다. 이러한 삶 전체에 대한 관점 없이 오직 청년이라는 한정된 시간 안에 갇힌 이야기만으로는 온전한 해결책 수립이 어렵다. 이런 문제에 대한 해결은 대개 개인에게 맡겨져 있다. 알아서 포기할 건 포기하고 절충할 건 절충해서 소소하고 확실한 행복을 찾을 것. 하지만 우리 모두가 한 배를 타고 있다는 인식을 끊임없디 재확인하는 일이 필요하다. 한편으로 분리되어 보이는 문제들 또한 넓은 차원에서는 이어져 있고 뿌리 깊게 연관되어 있으며 결국 우리 모두의 문제로 이어진다는 인식에 계속해서 도달해야 한다. (114)

 

실패로부터 성장한다는 막연한 믿음에 대하여

나 또한 이런저런 상처들로 얼룩져 있을 테고, 나의 여러 이상한 부분은 그런 상처들이 만들어낸 내 존재의 일부가 되어 있을 것이다. 감추려고 해도 감출 수 없는 부분들, 이상하게 예민한 측면들, 쓸데없이 나를 방어하거나 높이려는 순간들이 있을 테고, 그런 부분들은 누군가에게 내가 가진 문제들을 짐작하게 할 것이다. 사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없고, 그래서 나 자신의 실수를 대할 때나 타인의 이상징후를 대할 때 관대해져야겠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만약 실패가 사람을 성숙시킨다면 그것은 바로 이런 측면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실패 그 자체는 우리를 병들게 하고, 이상하게 만들며, 모가 나거나 흉터가 패이게 하고, 스스로도 어찌할 수 없는 성격의 측면들을 만들어 놓는다. 그것 자체를 성숙이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만 그런 측면들이 나를 둘러싼 모든 사람들에게 보일지라도, 그래서 때론 그 때문에 누군가를 멸시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라도, 나 또한 다르지 않음을 알고 모든 사람에게 상처가 있다는 걸 이해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의 성장이라는 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역시, 나는 사람이란 많이 다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자기를 보호하고 소중히 하며, 상처 입을 수 있는 일들을 너무 쉽게 만들지 않고, 실패들이 나를 성장시켜줄 거라 막연히 믿지 않으며, 삶을 조심히 대하는 것이 좋다고 믿는다. 그렇게 누군가를 지켜줄 수 있다면 지켜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117)

 

포기라는 트렌드

타인들의 세상, 청년들의 세계, 버닝

청춘을 뒤로하고 꿈을 택하는 일에 관하여

 


 

2. 젠더에 대하여:

여성에 관해 덜 말해질 때란 결코 오지 않았다

 

어머니의 삶으로부터

가부장이 불가능해진 시대의 한국, 청년, 남성

이것은 인간에 관한 문제다: 미투운동에 관하여 1

갈라파고스 섬에서의 투쟁: 미투운동에 관하여 2

디지털 성범죄: 싸워야 할 것은 일상에 스며 있다

가벼운범죄로

식욕은 채우는것인데, 왜 성욕은 푸는것일까

그것은 성적 대상화가 아니다

강남역 이후의 세계와 폭력의 그물망

버릴 수도 없으면서 사랑할 수도 없는

더 큰 사회적 역할의 수행이 가능한 남성 배우자 수는 한정되어 있다. 꼭 상류층이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가정에서 경제적 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 하한선이라는 게 존재한다. 최소한 주거나 자녀 양육 등을 비롯한 생활 문제가 해결될 가능성이라도 있는 경제적 존재의 하한선은 어디일까? 모르긴 몰라도 중견기업 근무자 혹은 결혼 비용으로 억 단위를 지참할 수 있는 수준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여성에 대한 남성의 증오가 형성되는 지점은 이곳 하한선이다. 본래 우리 사회의 분노와 증오는 주로 가진 자인 상류 계층을 향하거나 경제체제(자본주의) 자체를 향해 있었다. 그러나 최근 경쟁에서 패배한 하한선 미만의 남성들은 상위의 같은 남성을 증오하기보다는 자신을 선택하지 않은 여성을 증오하는 쪽을 택한다. 그 이유는 더 이상 경쟁 자체에 대한 부정이 시대정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젊은 세대는 자본주의나 경쟁을 인정하는 시대의 인간이다. 그렇다면 경쟁에서 이긴 자를 증오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더 초라하게 만드는 일이자 자신을 부정하는 일이 될 뿐이다. (185)

 

나는 사립 남자고등학교를 나왔다

가장 형식적인 것들이 가장 실체적인 것들로, 콜레트

형법 269조와 낙태죄의 논리

엄마가 되었다는 이유로

아이 없는 세계와 나의 권리

비행기 타는 부모가 환영받는 방법

바로 곁에 있는 사람, 82년생 김지영

바람이 있다면, 기억되는 아버지가 되는 것이다

 


 

3. 개인과 공동체: 우리는 서로 뒤섞이는 바다

 

무엇이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가: 선의상실

핫한 관광지나 뜨는 동네에서 나는 도대체 무엇을본 걸까? 한 마리 불나방이 되어 날아간 곳들에서 내가 본 것이 삶은 아니었다. 서로의 선의에 기대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기억도 아니었다. 도리어 그 모든 곳은 삶을 몰아내고, 박멸하고, 표백해 만든 어떤 깨끗한공간이었다. 사람을 기분좋게 하는 깨끗한 이미지들로 이루어진 세계, 한나절의 커피값을 지불하면 얻을 수 있는 반짝반짝함이 있는 세계였다. 사람들이 머무는 곳이 아닌, 잠시 왔다 떠나는 그 무수한 소비의 거리들이 하찮게 느껴졌다. 돈을 지불하고 서비스를 받으면서 우리는 삶을 사는 대신 삶을 소비한다. 도시는 온통 그런 공간들로 채워지고 있다. (243)

 

분노사회에서 살아간다는 것

모든 사회에는 일종의 착시현상이 있다. 늘 사회적으로 부각되는 거대한 문제들이 우리 삶을 뒤덮고 있다는 착시다. 이러한 착시는 언론과 여론의 연합으로 발생하며 우리 삶을 지워버린다. 우리는 그 거대하고 뜨거운 사건에 속해 있다는 느낌을 받지만, 사실 그러한 사회적 사건과 내 삶은 다른 층위에 놓여 있다. 우리는 자주 그 두 층위의 간극을 계산하는 데 실패한다. 분노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사회에 일어난 일부 계층이나 특정 사람의 부당한 행위를 보고 분노하면서 내 삶의 개선에 참여한다고 믿는다. 삶에서 여러 문제로 인해 쌓여온 분노는 사회적 이슈를 향해 집중됨으로써 해소되지만, 그로 인해 항상 실제 삶이나 사회가 개선되는 것은 아니다. 만성화된 분노는 오직 삶과 사회를 개선함으로써만 해소될 수 있다. (255)

 

숭고한 두 여성을 본다

나의 권리는 절대 진리인가

부동산이 우리를 미치게 만들고 있다

타인을 낙인찍는 쾌락에 관하여

정치적 올바름과 가치에의 혐오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비판이 있을 수 있다. 그것이 너무 이상적이라거나 현실에 맞지 않다거나 실질적인 방법에 문제가 있고, 나아가 자기모순적이라는 식의 비판은 할 수 있다. 그런데 정치적 올바름이 지시하는 가치 자체를 조롱하고 비하하는 것은 다른 문제가 된다. 누군가 추구하는 것이 다소 이상적이고 당장의 현실과 불협화음을 일으킨다면 그에 관해 함께 고민하고, 절충안을 찾아보고, 다른 대안을 생각해보는 건 좋은 일이다. 그런데 그 이상이 이상적이라는 이유로 조롱하고 비난하는 건 그 가치 자체에 대한 혐오가 된다. 그는 가치를 거부하는 것이다. 가치가 혐오스럽고, 가치에 스트레스를 받으며, 가치에 피로감과 환멸을 느끼는 것이다. 인권, 평등, 약자에 대한 감수성, 실질적인 공정성, 모두가 보다 인간다운 삶을 누리는 세상, 모두가 존중받으며 사는 사회, 사실 정치적 올바름이 추구하는 가치란 이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그러한 가치 자체를 도덕 교과서에나 나올 것이라며 경멸하고, 가치 자체가 말해지는 것에 히스테리컬하게 반응하며, 눈앞에서 가치를 집어치우라고 조롱하는 것은 온전한 비판이나 풍자의 범위를 벗어난다. 그런 태도에는 가치의 우월성에 대한 거부가 담겨 있다. 내가 느끼는 방식, 내가 살아온 방식, 내가 말해온 것보다 우월한 가치란 없다. 우월한 건 오직 나에게 편안한 것, 내가 느껴온 것, 내가 살아온 것뿐이다. 그것이 어찌 보면 이 시대의 상대주의 같은 것인데, 사실상 그런 태도가 각종 혐오와 차별을 용인하며 세상을 오직 힘의 관계로 환원하고 권력관계만 남겨놓게 된다. (280)

 

이해할 수 있다는 것과 용납할 수 없다는 것

편견은 끝을 모르고 영혼을 파고든다, 그린북

폭력은 돌고 돌아 어느 가정의 아이에게

옳음과 친절함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원더

달리 말해 환대는 타인을 향한 내 안의 올바름의 기준이 무너진 폐허에서 피어오른다. 진정으로 친절하기 위해서 우리는 항상 무너져 있어야 하고, 열려 있어야 한다. 내 안에 쌓아 올린 편견의 성벽을 따라 타인을 만나는 게 아니라 매순간 살아 있는 채로, 매번 새로운 영혼으로, 갓 알에서 태어난 어린 새의 마음으로 타인을 대해야 한다. 친절 안에서 가치의 기준은 매번 새롭게 탄생한다. 내가 환대한 자, 내가 사랑하는 자, 나와 시선과 육성을 있는 그대로 마주한 자가 새로운 기준이 된다. 그래서 친절은 역동성의 다른 이름이고 새로움의 징표이며 어려운 일이다. (296)

 

인문학 열풍이 남긴 것

대학원생들에게 지도교수의 권력이란 절대적이다

정의에의 열망은 부정의의 증거다

가족의 울타리, 사회의 집

그렇게 절실한 서로의 쓸모, , 다니엘 블레이크

애도의 법정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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