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철학

<대리사회>, 김민섭

비상하는 새 2022. 8. 2.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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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리사회

 

(253)

 

프롤로그 - 대리인간으로 살아왔음을 고백하며

 

이 글은 타인의 운전석이라는 가장 좁은 공간에서 바라본 우리 사회의 모습 그대로다. 사실 굳이 그 안과 바깥을 구분하고 싶지 않다. 마치 서로를 축소하거나 확대해 놓은 것처럼 닮아 있는 공간이다. 타인의 운전석에서 나는 세 가지의 통제를 경험했다. 우선 운전에 필요하지 않은 모든 행위의 통제다. 엑셀과 브레이크를 밟고 깜빡이를 켜는, 그런 간단한 조작 외에는 그 무엇도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 사이드미러나 백미러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아도 그럭저럭 운행할 수 있으면 그대로 두고, 의자의 기울기에도 몸을 적응시켜 나간다. 차의 주인이 자기 몸에 맞춰 조절해 놓은 것들을 건드리고 싶지 않아서다. 에어컨이나 히터를 작동시키거나 음악의 볼륨을 조절하는 일 역시 하지 않는다. 다음으로 의 통제다. 손님에게 말을 건네는 대리기사는 거의 없다. 차의 주인이 화제를 정하고 말을 건네면 반가이 화답하지만, 그가 침묵하면 나도 묵묵히 운전만 한다. 서로 대화를 시작하더라도 제한적으로 , 맞습니다라는 대답만 주로 하게 된다. 그의 의견이 나와 다르더라도 웬만해서는 그저 웃으며 동의한다. 특히 종교나 정치와 관련된 민감한 주제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차 주인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 않아서다. 마지막으로 사유의 통제다. 주체적으로 행위하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은, 사유하지 않게 된다는 의미와도 같다. 처음에는 하고 싶은 말이 맴돌아 답답했지만, 나중에는 그런 대로 편해졌다.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운전만 하면 되었고, 손님이 뭐라고 하든 , 맞습니다하고 영혼없이 대답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니까 스스로 판단하지 않고 타인에게 질문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9)


1부 통제되는 감각들

 

1. 맥도날드 알바에서 다시 대리운전 기사로

 

2. 대리인간, 대리국민이 되다.

 

타인의 운전석, 말하자면 우리 사회 어디에나 있을 을의 공간은 대화의 주체가 되어야 할 존재를 위축시킨다. 그래서 결국 어느 대화에 주체로서 참여할 수 없게 만든다. 이것은 그가 정의로운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간단한 문제와는 다르다. 사실 을의 공간에 자리한 대화의 피주체에게 가장 먼저 통제되는 것은 말과 행동이 아니다. 그 이전에 주체로서 사유할 자유를 잃는다. 일상의 대화에서는 상대방의 목소리를 듣고, 사유하고 판단하는 과정을 거쳐, 말하게 된다. 자신의 의견을 전달하고 그것으로 상대방을 설득하고자 한다. 하지만 주체와 주체가 아닌, 주체와 피주체의 대화는 일방적이다. 여기에는 듣고 말하는 행위만 남고 중간의 과정은 모두 생략된다. (32)

그러나 되찾을 수 없는 자유, 순응하는 몸 : 타인의 운전석에서 내리며, 나의 신체를 되찾는다. 무엇보다 사유하고 발화할 자유를 되찾아 온다. 더 이상 상대방의 눈치를 보며 기계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그러한 일이 반복되면서 나는 조금씩 주체의 자리에서 이탈하는 데 익숙해져 갔다. 상대방이 말하는 대로 수용하고 긍정하는 간편한 대화의 방식, 말하자면 순응이 어느새 자연스럽게 몸에 각인된 것이다. 누군가 나를 주체로서 대우한다고 해도 익숙해진 몸을 되돌리기는 쉽지 않다. 그러면 어디에서는 주체로서 발화할 수 없게 된다. ‘순응하는 몸은 그렇게 만들어진다. 타인의 운전석과 다름없는 을의 공간은 우리 사회 곳곳에 존재한다. 차의 주인과 대리기사와 같은 역설의 관계 역시 우리 주변 어디에나 있다. 직장에서, 학교에서, 가정에서, 그 어디에서, 주체의 욕망은 쉽게도 타인을 잡아먹는다. 예컨대 의사 결정권자는 언제나 자유롭게 회의 안건을 내고 소통하자고 하지만 그 누구도 화답하기는 쉽지 않다. 이미 상상과 수용 가능한 범위가 제한되어 있음을 모두가 안다. 거기에서 벗어나거나 반론을 내기라도 하면 곧 눈총이 쏟아진다. (35)

타인을 주체로서 일으키는 이들이 있다 : 올라서는 법과 지키는 법만 배운 개인들에게 주체의 자리에서 타인에게 손을 내밀라는 것은 그간 익숙해진 신체를 되돌리라는 말과도 같다. 그러나 직접 을의 공간으로 내려와 손을 내미는 이들이 여전히 있다. 정말이지 많은 손님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타인의 운전석에 앉은 이들을 주체로서 일으켜세운다. 그것은 따뜻한 말 한마디이거나, 반갑게 맞이하는 인사와 미소이고, 무엇보다도 상대방에 대한 배려. 담배를 피우기 전에, 음악을 틀기 전에, 전화 통화를 하기 전에, “죄송하지만 제가 무엇을 해도 괜찮을까요?”라고 묻는 이들이 있다. 그것은 그들이 나를 그 공간의 한 주체로서 존중한다는 의미다. 그 자체로 나는 함께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37)

 

3. 나에게는 호칭을 결정할 권한이 없었다.

 

4. 호칭이 주는 환각에 익숙해질 때 우리는 대리인간이 된다.

 

호칭은 한 인간의 주체성을 대리하는 수단이 된다. 자신을 그 공간의 주체라고 믿게 만드는 동시에, 그를 둘러싼 여러 구조적 문제들을 덮어버린다. 나 역시 내가 속한 공간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고 나는 그 구성원이라는 환상에 한동안 빠져 있었다. 그 환각에 익숙해질 때, 우리 모두는 대리가 된다. 그 공간에서는 더 이상 온전한 나로 존재할 수 없다. 누군가의 욕망을 대리하며 가짜 주인이 되어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나는 대학뿐 아니라 내가 속했던 여러 공간에서 대개 주체로 서지 못했다. 누구도 호칭 뒤에 숨은 내가 누구인지 알려주지 않았고, 나도 스스로 한 발 물러서서 그와 마주하려 하지 않았다. 결국 의도치 않게 밀려나고서야 나는 누구였는지 나는 거기에서 무엇이었는지를 돌아보았고, 그때는 너무 늦었다. (53)

 

5. 거리의 문법을 배우기 위해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6. 환대할 수 없는 존재들

 

주체에 따라 달라지는 환대의 방식 : 손님이 조수석에 오르는 순간, 택시 기사는 그를 초대한 공간의 주인이 된다. 그래서 거기에서의 모든 주도권을 자연스럽게 자신이 가져오는 것이다. 하지만 대리기사에게 운전석이란 온전한 타인의 공간이다. 손님이면서도 주인의 역할을 잠시 대리하기 위해 침입/침투한 불편한 존재가 된다. 그러한 감각이 자연스럽게 모든 행위를 검열하고 통제하게 만든다. 그러니까, 자신이 어느 공간에서 주체로서 존재한다는 감각, 바로 그것이 저마다의 행동양식을 결정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은 장소에서 만난다. 그리고 초대한 사람이 초대받은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건네는 것으로 환대가 시작된다. (67)

 

7. 이제 다시는 괴물에 잡아먹히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외부에서 타인이 되어 바라본 대학의 울타리는, 그 자체로 하나의 폭력이었다. 여권 없이 어느 국경지대에 선 기분이었다. 교문 안에 들어서기라도 하면 난민, 그러니까 불법체류자가 될 것만 같았다. (76)

스스로 한 발 물러서는 일은 주체만이 할 수 있는 행위다 : 대리사회의 괴물은 개인에게 주체로서 자신을 정비할 수 있는 여유를 허락하지 않는다. 그 누구도 자신이 속한 공간에서 한 걸음도 뒤로 물러설 수 없게 만든다. 자신의 눈으로 공간을 바라볼 수 없게 만든다. 그리고 그것을 패배로 규정한다. 자신을 주체로 믿던 누군가 밀려나고 나면 그를 잉여, 패배자로 규정하고는 곧 다른 대리인간을 세운다. 스스로 한 발 물러서서 타인의 눈으로 자신의 공간을 바라보는 일은 절대로 패배가 아니다. 오히려 괴물에 잡아먹히지 않은 주체들만이 할 수 있는 가장 어려운 행위다. 그러고 나면 다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행동과 말은 통제되더라도 사유하는 주체로서 존재할 수 있다. 그것을 아주 어렵게 배웠다. (77)

 

8. 손님의 품격

 

9. 모든 인간은 주체로서 아파하고 주체로서 절망한다.

 

순간의 감정으로 욱, 하는 이들보다 오히려 타인의 수고를 농락하는 이들이 더 밉다. 양쪽에서 전화를 받아 누가누가 먼저 오나 경주를 시키기도 하고, 자신의 요구에 따라 거리를 내달려 온 이들을 취소 문자 하나로 돌려세우기도 한다. 이것은 우리 일상의 갑질이다. 당하는 이들에게는 대리가 아닌 주체의 아픔으로 오래 남는다. 대리라는 직함을 달고 있다고 해서 감정까지 대리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비정규직이라고 해서 그 어떤 비정함에 무뎌질 수 없는 것처럼, 모든 인간은 주체로서 아파하고 주체로서 절망한다. (96)


2부 대리인간이 되는 가족들

 

10. 아내에게 생긴 버릇 1대리, 2대리

 

11. 엄마와 아빠는 섬그늘에 굴따러 간다

 

12. 아내는 자신의 언어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13. 부부는 함께 나란히 앉아 있을 때 가장 어울린다

 

14. 나의 대리가 된 이들을 추억하지 않을 것이다

 

한동안 그렇게 구걸을 했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나는 끊임없이 나를 대신할 대리인간을 찾아다녔다. 부모에게, 아내에게, 어쩌면 나의 아들에게까지 나를 위한 대리의 삶을 살아줄 것을 강요/부탁했다. 이것은 우선 내가 나약하고 못난 인간이기 때문이다. (137)

 

15. 나는 빠주의 대리운전사

 

16. 원주를 떠나며, 나의 아내에게

 

많은 이들이 강태공의 아내를 악처, 허생의 아내를 철없는 인물로 기억한다. 남편을 끝까지 내조하지 않고 도망쳤고, 배고픔과 같은 사소한 욕구를 이기지 못해 남편의 앞길을 막았다고 비난한다. 말하자면 아내의 역할을 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부부는/가족은 한 동이의 물을 함께 지고 버티는 존재다. 하지만 강태공도 허생도 물동이를 지려고 하지 않았다. 조금만 버티면 그것을 내려놓게 해주겠다면서 그 역할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물이 가득 찬 물동이를 홀로 위태롭게 지고 있던 한 여인은, 결국 그것을 놓아버렸다. 물을 쏟은 책임은 우선 자신의 역할을 외면한 이들에게 있다. 그러나 강태공은 스스로를 돌아보는 대신 아내를 원망했다. 그렇게 그들은 아내에게 자신의 대리인간이 되기를 강요했다. (151)

 

17. 내일은 좀더 오래 살아남고 싶다


3부 주체가 될 수 없는 대리노동들

 

18. 우리 시대의 노동은 대리노동이다

 

노동자의 주체성을 강탈하는 동시에 그 빈자리에 주체라는 환상을 덧입히는 것이 일상화된 사회에서는 자신을 주체로 믿는 대리가 된 노동자만이 존재한다. 어쩌면 열정 착취보다도 한 단계 진화한 방식이다. 노력뿐 아니라 행복과 만족까지도 강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을 영혼 착취라고 규정하고 싶다. (173)

 

19. 대리전쟁에 동원되는 노동의 주체들

 

부사 하나도 두렵다 : 그러고 보면 을의 자리에서는 단어 하나에도 많은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이라는 부사 하나로도 나는 오만 가지 상상을 했다. 많이, 적당히, 조금, 이런 모호한 부사들은 듣는 사람을 난처하게 만든다. 우리는 갑의 자리에서 별 생각 없이 툭툭 말을 던지곤 한다. 하지만 상대방의 헛기침이나 하품에도 민감하게 반응해야 하는 이들에게는, 그 자체로 폭력이 된다. 말조심은 을이 아니라 오히려 갑이 더 해야 하는 것이었다. 글을 쓸 때 쉼표 하나에도 의미를 부여하는 것처럼, 말을 할 때도 그렇게 조심을 해야겠다. 의미 없는 단어로, 몸짓으로, 타인을 불편하게 하지 말아야겠다. (185)

 

20. 밀려난 사람들, 서울로 향하지 않는 밤

 

21. 명절에도 역시 숨은 노동자

 

22. 노동의 대가를 지불하는 데 걸리는 시간

 

우리가 합리적이라 믿는 시스템은 결국 노동자를 소외시킨다 : 그런데 지불이 늦어지는 것은 담당자의 게으름이나 실수 때문이 아니다. 그 조직이 특별히 나빠서도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아는 가장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조직일수록, 개인의 노동에 대한 대가를 늦게 지불한다.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출판사, 신문/잡지사, 대학, 방송국, 관공서와 같은 곳이 그렇다. (204)

 

23. 대리사회의 개인은 잠시 즐겁고 오래 외롭다

 

타인의 즐거움을 보며 대리로서 즐거워야 한다면, 역설적으로 나는/우리는 지금 그만큼 즐겁지 않다는 것이다. 현실이 만족스럽다면 남들이 먹고 노래 부르는 것에 지금처럼 필요 이상으로 열광할 이유는 없다. 결국 많은 이들이 새벽에 연구실에 앉아서 기약 없는 논문을 써 내려가는 것만큼이나 외롭거나, 아니면 절박한 심정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그들은 가장 익숙한 공간에서 즐거워하고, 우리는 그들을 지켜본다. 그러면서 삶의 고단함과 절박함을 잠시 잊는다. 익숙한 공간이 재현되며 이전보다 더욱 주체가 되어 함께 그 즐거움에 동참하는 듯하다. 하지만 그러한 대리만족은 오래가지 않는다. 곧 누구에게도 대리시킬 수 없는 허탈함이 찾아온다. 특히 자신을 둘러싼 사회구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고, 남들처럼 즐거울 수 없는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고 여기게 된다. 일상을 특별하게 재현한 지금의 먹방은 보는 이를 더욱 외롭게 만든다. (212)

대리사회의 개인은 죄인이 된다 : 힐링이라는 단어의 소멸 이후 분노혐오가 우리 사회를 뒤덮었다. 개인들은 이제 더 이상 아프다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자신을 둘러싼 구조에 문제가 있음을 알았다. 차근차근 임계를 향하던 개인의 감정들이 최근에 이르러 실체를 드러냈을 뿐이다. 하지만 대리사회의 괴물은 여전히 개인들이 그 분노를 온전히 발산할 수 없게 만든다. 대신 대리만족의 기제를 계속 내보내면서, 행복하지 않은 개인에게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여기에 마취되고 나면 개인의 분노는 자신을 둘러싼 구조, 그 괴물에게 향하지 않는다. 대신 주변의 개인이나 스스로를 혐오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더욱 자극적인 마취/환각제를 원하게 되고, 그에 따라 점점 더 강한 쾌락의 기제가 끊임없이 재생산된다. 아주 잠시 즐겁고, 오래 외롭다. (214)

 

24. 새벽 두 시의 합정은 붉은 포도송이가 된다

 

25. 기계들의 밤

 

대리운전 기사들은 기계와 한몸이 되어 기다리고, 걷고, 뛴다. 기계가 신체에 종속되었다기보다는 오히려 그 반대다. 지문이 없어진 그들의 신체는 이미 기계화되었다. 그러나 간편함에 이끌려 사람을 상상하는 법을 잊게 되면, 그 역시 기계가 되어버린다. 타인의 처지에서 사유하거나 공감하지 못하고, “여기에 사람이 있어요라는 누군가의 절망에도 무뎌지게 되는 것이다. (237)

 

26. 요정들의 밤


에필로그 - 경계인에게만 보이는 것

 

우리는 모두가 한 사람의 대리운전 기사다. 자신이 그 차의 주인인 것처럼 도로를 질주한다. 하지만 조수석에는 이미 누군가가 자리를 잡고 앉아 있다. 시동을 걸기 이전부터 거기에는 사람이 있었지만, 그것을 인식하기란 쉽지 않다. 그들의 욕망은 내비게이션을 통해 끊임없이 전달되고 개인의 의지는 통제되고 검열된다. 차를 멈추고 운전석에서 잠시 내려, 그렇게 한 발 물러서서 바라보면 어느 균열의 지점이 보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액셀을 더 강하게 밟는 데만 힘을 쏟는다. 그렇게 대리사회의 욕망을 대리하는 대리인간이 된다. 대리사회의 괴물은 대리인간에게 물러서지 않는 주체가 되기를 강요한다. ‘주인 의식을 가지라고 끊임없이 자문하는 가운데 정작 한 발 물러서서 주체로 재정비할 수 있는 시간을 봉쇄한다. 결국 개인은 주체로서 물러서는 법을 잊는다. 그 누구도 가르쳐준 바 없지만, 결국 우리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야 한다. 밀려나기는 쉽지만 스스로 물러서기는 어렵다. 그것은 공간의 주체만이 할 수 있는 행위이고 절대로 패배가 아니다. 그러고 나면 시스템의 균열이 보다 선명하게 보인다. 그 균열의 확장을 통해, 그동안 자신의 욕망을 대리시켜 온 대리사회의 괴물과 마주할 수 있다. 그 때부터는 사유하는 주체가 된다. 여전히 행동과 언어는 통제될지라도, 정의로움을 판단하고 타인을 주체로서 일으키는 힘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자신에게 강요되는 천박한 욕망을 거부할 용기를 얻는다. (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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