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철학

<받아들임>, 타라 브랙

비상하는 새 2022. 11. 7.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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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아들임>

 

1. “나는 세상에 존재할 가치가 없다

 

불안을 오히려 강화하는 우리의 습관적 전략들 : 우리는 무가치함이라는 원초적 고통을 피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한다. 자신의 결함이 자신이나 남에게 노출될 때마다, 우리는 추방당한 아담과 이브처럼 벌거벗은 몸뚱이를 가리려고 초조하게 반응한다. 우리 각자는 결점을 감추고 우리에게 있다고 믿는 잘못을 벌충하기 위한 특별한 전략들의 조합을 개발하는 데 많은 시간을 들이고 있다.

 

끊임없이 자기개선 프로젝트에 착수한다. 우리는 완벽한 몸과 용모에 대한 대중매체의 기준을 만족시키려고 흰머리를 염색하고, 주름을 제거하고, 끊임없이 다이어트를 시도한다. 직장에서는 더 좋은 직위를 얻기 위해 자신을 밀어붙인다. 훈련하고, 다양한 교육과정을 이수하고, 명상을 하고, 목록을 작성하고, 자원봉사를 하고, 워크숍에 참가한다. 분명 이 모든 활동을 유익을 얻기 위해 할 수 있지만, 많은 경우에 뭔가 만족스럽지 않다.”라는 걱적스런 암류에 휩쓸려 움직인다. 우리가 누구이며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맘 편히 즐기기보다는 우리 자신을 이상적인 모습과 비교하며 그 차이를 줄이려고 애쓴다.

 

실패를 무릅쓰기보다는 뒤로 물러나서 안전을 도모한다. 안전을 도모하는 태도는 인생의 거의 모든 국면에 포함되어 있는 위험한 상황을 회피하도록 한다. 그럴 경우 일에서 리더십이나 책임감을 가질 수 없을 것이고, 상처받을 것이 두려워 남과 깊이 친해지지 못할 것이며, 창의성을 표현하거나 진심을 드러내거나 놀거나 애정을 쏟는 데도 주저할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의 경험으로부터 물러선다. 우리는 삶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스토리를 지어내 끊임없이 자신에게 전하는 식으로 두려움과 수치심의 생생한 느낌에서 벗어나려 한다. 우리는 막연한 불안 상태로 살고 있기 때문에 머릿속에는 시도 때도 없이 재난 시나리오가 흘러 다닌다. 지금이 아니라 미래에 초점을 두고 사는 것이 자신의 삶을 관리하고 실패에 단단히 대비하는 태도라는 착각을 일으킨다.

 

계속 일을 한다. 바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용인된 고통 회피 방법이다. 만약 우리가 멈춘다면, 자신은 혼자이며 완전히 무가치하다는 참을 수 없는 느낌에 빠져들 위험과 마주하게 된다. 그래서 허둥지둥 우리 자신의 시간, , 마음을 잔뜩 채운다. 새로운 것을 사거나 아무 생각 없이 잡담에 몰두한다. 틈이 생기자마자 이메일을 확인하고, 음악을 틀고, 간식을 먹고, 텔레비전을 본다. 우리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취약성과 결핍의 느낌을 숨겨주는 것이면 무엇이든 한다.

 

자신에 대한 최악의 비평가가 된다. 우리 마음속의 방송국에선, 우리는 항상 일을 망치는데 다른 사람들은 훨씬 더 효율적이고 성공적으로 삶을 관리하고 있다고 끊임없이 해설을 한다. 우리는 대개 부모가 그만두고 떠난 자리를 이어받아, 자신의 결함을 스스로에게 예리하게 상기시킨다. 자신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훤히 알고 있다는 것은, 자신의 충동을 통제하고 약점을 감추어 자신의 성품을 개선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타인의 잘못에 초점을 둔다. 세상은 자기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로 나뉜다는 말이 있다. 자신이 부적합하다고 느끼면 느낄수록 잘못을 인정하는 일이 더 거북해진다. 남을 탓하면 일시적으로 실패의 부담에서 해방된다.

 

이 모든 전략들은 사실 무가치감의 트랜스를 지속시키는 바로 그 불안정감을 강화시킬 뿐이다. 우리가 실패할 수 있다거나 자신이나 타인에게 어떤 문제가 있다는 스토리를 스스로에게 걱정스럽게 말하면 할수록, 결함의 느낌을 생성하는 신경회로는 더욱 더 굵어진다. 우리가 패배를 숨길 때마다 자신이 불완전하다는 두려움은 더욱 커지게 된다. 우리가 남에게 깊은 인상을 주려 하거나 그를 능가하려고 할 때, 우리가 그 자체로 충분히 선하지 않다는 근본 믿음이 강화된다. 이것이 우리가 건강한 방식으로 경쟁하거나, 일에 전폭적인 노력을 기울이거나, 자신의 능력을 알고 즐기는 것이 가능하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의 노력이 자신에게 결함이 있다는 두려움에 의해 추진될 때 무가치감의 트랜스는 더 깊어진다. (41)

 

2. 근본적 수용 : 지금 이 순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세상에서 매우 존경받는 몇몇 사회운동가는 그들의 활동 기반을 근본적 수용에 두었다. 인도의 간디, 미얀마의 아웅 산 수치, 아프리카의 넬슨 만델라와 같은 인물들은 모두 감금의 고통을 겪었고, 자신들이 받는 탄압에 무력감, 외로움, 불안을 경험했다. 그들은 분노 반응의 잠재적 고통을 명확히 이해했고, 사람들을 이롭게 하려는 자신들의 의도를 계속 마음챙김했다. 자신들의 고통을 부정하거나 그것에 습관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수용함으로써, 비통함이나 자기연민 없이 평화와 정의를 위해 스스로 자유롭게 활동했다. 이들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괴로움을 경감시키려는 노력의 중심에 근본적 수용을 두는 것의 힘을 보여준다. (73)

 

5. 몸과 가까워지기 : 근본적 수용의 기반

 

붓다는 지속적인 정서적, 정신적 자동반응을 폭포라고 불렀는데, 그 이유는 그 강력한 힘에 의해 우리가 너무 쉽게 지금 이 순간의 경험으로부터 휩쓸려 가버리기 때문이다. 불교와 서양심리학 모두 이것이 어떻게 발생하는지 얘기하고 있다. 마음은, 우리가 무엇을 경험하든 그것을 유쾌하거나 불쾌한 것 혹은 중립적인 것으로 즉각적이고 무의식적으로 평가한다. 기분 좋은 흥분을 야기하는 생각이나 짜릿짜릿한 감각은 유쾌한 것으로, 나쁜 냄새나 갑작스런 큰 소리는 불쾌한 것으로,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은 대개 중립적인 것으로 평가한다. 유쾌한 감각이 일어나면 반사적으로 그것들을 쫓아가 붙잡고 계속 보유하려고 한다. 대체로 우리가 계획을 세울 때 이렇게 하는데, 거기에는 흥분과 갈망의 감정 에너지가 들어간다. 불쾌한 감각을 경험할 때는 위축되고 그것을 피하려고 한다. 그 과정 역시 동일하다. 우리는 걱정스레 계획을 세우고, 두려움과 초조함을 느낀다. 중립적인 것은 좀 더 강하거나 자극적인 경험을 주는 다른 것으로 주의를 돌리게 하는 신호다.

 

사람, 상황, 마음속 생각들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실제로는 몸에서 일어나고 있는 감각들에 대한 반응들이다. 누군가의 무능함을 참지 못하고 비난을 할 대 사실은 우리 자신의 불쾌한 감각들에 반응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마음이 끌려 열망과 환상으로 가득 찰 때 사실은 유쾌한 감각에 반응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자동반응적인 생각, 정서, 행동의 소용돌이는 이와 같이 감각에 대한 자동반응으로부터 나타난다. 이들 감각이 인식되지 않으면, 우리 삶은 자동반응의 폭포에 휩쓸리게 된다. 우리는 생생한 깨어있음으로부터, 온전한 의식으로부터, 우리의 가슴으로부터 단절되는 것이다.

 

이 트랜스로부터 깨어나기 위해서 붓다는 몸에 집중하는 마음챙김을 추천했다. 사실 붓다는 신체적 감각을 마음챙김의 첫 번째 기초로 여겼다. 그 이유는 그것이 느낌과 생각에 내재되어 있고, 의식과정의 바탕이기 때문이다. 유쾌하거나 불쾌한 감각은 너무 빠르게 정서와 전신적 스토리의 연쇄반응을 촉발시키기 때문에,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알아차리면 즉시 즉각적인 감각 경험으로 주의를 돌리는 것이 수행에서 중요하다. 우리는 등 아래쪽에 불편함을 느끼면서 속으로 얼마나 오래 지속될까? 어떻게 없앨 수 있을까?”라고 걱정하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다. 또는 가슴에서 유쾌한 짜릿함, 편안한 열림을 느끼면서 어떻게 이 상태에 이으렀는지... 그것을 다시 경험할 수 있을지.”를 매우 궁금해 할 수도 있다. 우리는 이런 스토리를 바라보고 그냥 내려놓은 다음, 몸의 살아 있는 감각으로 돌아가는 훈련을 한다.

 

감각은 항상 변화하고 움직이고 있다. 만약 우리가 감각에 저항하거나 계속 붙잡으려 하고, 감각들에 맞서서 몸을 바짝 긴장하거나 우리 자신에게 스토리들을 말함으로써 감각들의 자연스러운 전개와 변형 과정을 습관적으로 방해하고 제약한다면, 이는 강물의 진행을 둑으로 막거나 우회시키는 것과 같다. 감각이 유쾌하면 강물을 흐르게 놔두기 쉽다. 그러나 유쾌하지 않다면, 즉 감정적으로나 신체적으로 고통스럽다면 우리는 움츠리고 도망가려고 한다. 이를 알고 근본적 수용으로 고통과 마주하는 법을 익히는 것은 가장 도전적인 훈련이자 자유로워지는 훈련 중의 하나다. (155)

 

6.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많은 수련생들이 영적 수행을 오래 하면 욕구의 끌어당김에서 자유로워지느냐고 묻는다. 그들은 우리가 여전히 특정한 사람에게 고통스럽게 애착을 느낄 것인지, 일에 강박적일지, 외로운 저녁을 헤쳐 나가기 위해 초콜릿이나 연애소설이나 맥주에 의존할지에 대해 알고 싶어 한다. 이런 경향들이 지속될 수도 있지만, 그렇더라도 대개는 마음챙김의 빛 안에서 지배력이 약화된 욕구와 수치심의 복합체를 드러내 보이며 전개될 것이다.

 

가장 강력하고 집요한 형태의 욕구가 일더라도 반드시 괴로움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불안과 욕구의 감각은 불쾌한 것일 수 있지만, 고통을 있는 그대로 볼 때 괴로움은 선택일 수 있다. 우리가 경험하는 욕구나 갈망이 우리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제한할 때 우리는 괴로워한다. 만약 우리가 욕구의 감각, 정서, 생각을 근본적 수용으로 마주한다면, 욕구하는 자기와의 동일시에서 깨어나서 우리 존재의 온전함과 다시 연결될 것이다. (217)

 

12. 나는 누구인가?

 

내면을 들여다보면 어떤 존재도 없다. 마음의 실체도, 나도, 우리가 식별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없다. 단지 의식, 비어 있는 열린 의식만이 있다. 우리의 경험에는 중심도 없고 가장자리도 없다. 우리가 다시 자신을 생각에 연결시키거나 욕구하는 감각들이나 느낌들을 쫓지 않는다면, 우리가 서 있을 어떤 견고한 바닥은 없다. 이 깨달음은 당황스럽고 두려우며,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기이할 지도 모른다. 많은 소리, 감각, 이미지 등이 있을 수 있지만, 붙잡을 것은 아무것도 없고 그것들을 조종하는 장막 뒤의 나도 없다.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바로 아는 것이 티베트 스승들이 최고의 앎이라고 부른 것이다.

 

그러나 이 공(), 아무것도 없음은 삶이 비었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빈 의식은 생생하게 인식하는 깨어있음으로 가득 차 있다. 의식의 이런 성질은 인식, 즉 경험의 흐름에 대한 연속적인 앎이다. 당신이 읽고 있는 이 순간, 소리가 들리고, 떨림이 느껴지고, 형태와 색깔이 보인다. 이 앎은 즉각적이고 자발적으로 일어난다. 햇빛이 빛나는 하늘처럼, 의식은 의식 안에서 빛나며 또한 무한하여 모든 생명을 담는다. (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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