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핵가족 사회, 파편화된 도시의 삶에서 우리는 얼마나 타인을 납작하게 바라보고 오해를 거듭하는가. 납작한 인물을 입체화해서 바라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깨닫게 된 영화였다.
영화의 주인공 나옥분 여사(나문희)는 구청의 프로 민원러다. 재개발 구역 지정 위기에 내몰린 시장 상가에서 옷 수선집을 하며 홀로 살고 있다. 그러다 구청 직원 민재(이제훈)에게 영어를 가츠려주면 민원을 보류하겠다는 조건으로 선생-제자 관계가 된다. 할머니가 왜 그렇게 영어 배우기에 열성인지 궁금했던 민재에게 그녀는 어렸을 적 헤어지게 된 남동생이 LA, 캘리포니아에 살고 있어 그를 만나 한번이라도 대화를 해보고 싶어서라고 답한다. 그러나 민재가 몰래 전화해보니 남동생은 그녀를 만나기를 원하지 않는 상태였고, 이래저래 재개발 관련 이슈로 할머니와 관계가 틀어져 버린다.
그 와중에 나옥분 여사가 일제 강점기 위안부 강제 동원 피해 증언을 공개적으로 하게 되면서, 동네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도 바뀌기 시작한다. 가장 친하게 지냈던 진주 상회의 진주댁이 자꾸 할머니를 피하는 것 같아 왜 그러냐고 따지니, 할머니가 부끄러운 게 아니라 여태껏 말 안하고 아픈 비밀을 혼자 꽁꽁 싸매고 끙끙 댔던 세월에 섭섭하고 알아주지 못한 자신이 미안하기도 해서 그랬다고 눈물을 흘린다. 나옥분 여사는 여태 위안부 피해가 본인의 의지에 반한 것이었음에도, 수치스럽게 생각하고 남들에게는 한 번도 입밖으로 내놓지 못하고 평생을 살아왔다. 그 시절에 여성의 정조가 목숨과도 같이 여겨지던 시절이었기 때문이었으리라. 하지만 위안부 피해자이면서 당시 자신의 자살을 막아준 친구 (정심-손숙 배우)가 치매에 걸리자 그녀는 이제 자신이 나서서 일본의 사과를 받아내야 한다고 결심한 것이었다. 영화의 마지막에 미국 연방 회의에서 나옥분 여사는 위안부 피해인으로 정식등록되어 있지 않아서 그 증언이 실효성이 없을 뻔 했지만, 본인 몸에 남겨져 있는 일본군들의 만행(칼자국, 일본어 문신 낙서 등)과 민재가 가져다 준 흑백 사진을 증거로 전 세계에 그 피해를 알린다. 사과하라는 그녀의 울부짖음에도 일본 정부는 끝까지 사과하지 않고 얼마나 돈을 더 뜯어내려고 그러냐며 그녀를 모욕한다.
영화 중반부네 진주댁과의 눈물 고백 장면에서 나도 폭풍 눈물을 흘렸다. 성폭력 피해 여성들은 그녀들의 잘못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사건을 가까운 사람에겐 오히려 더 털어놓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그 사건의 피해자라는 것 자체에 대한 부끄러움, 수치심을 가득 안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가까운 사람들에게 털어놓았을 때 본인을 '그 사건의 피해자'로서만 바라봐서 자신을 납작하게 만들어버릴까봐, 동정어린 시선만 가지게 될까봐 염려한다. 본인 스스로도 '피해자다움'의 굴레를 덧싀우며 자기 억압을 그만두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러나 영화의 진주댁의 경우처럼, 진정으로 서로를 위해하고 위해주는 관계라면 그런 피해 사실이 피해자가 생각하고 우려하는 상황과는 전혀 다른 위로와 공감을 얻게 된다. 주변 사람들은 그녀의 잘못이 아님을, 그녀가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 아님을 끝없이 이야기해줄 것이고, 같이 마음아파 해줄 것이며, 그녀의 피해 회복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는 방법을 같이 찾을 것이다.
성폭력 피해자들의 피해는 단순히 육체적인 것 이상의 관계에 대한 불신과 인지부조화를 일으킨다는 것을 이 영화를 보면서 다시 한번 느꼈다. 타인에게 말할 수 있는 용기를 나도 꼭 내게 되길 날마다 기도하고 바라고 있다. 내가 믿는 사람들과 나 사이의 보이지 않는 어둠의 장막을 난도질 할 수 있는 날이 근 시일내에 도래하길. 나 뿐만 아니라 이 땅의 모든 폭력 피해 생존자들에게 그러한 용기의 힘이 자랄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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