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름답고 추한 몸에게
chapter1 관리당하는 몸
몸뚱이를 사랑해 달라고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은 <혐오와 수치심>에서 정신분석, 문학 등을 몽땅 동원해 이 두 감정의 뿌리를 짚는다. 오염, 전염을 떠올리게 하는 오줌, 똥, 콧물, 끈적끈적한 체액은 원형적 혐오의 대상이다. 이 이미지들은 비약을 거듭한다. 인간이면 가질 수밖에 없는 동물성과 유한성에 대한 두려움을 타인에게 투사하면서 혐오는 자란다. 승자만 지배하는 환경에서는 더 잘 자란다. 자신 안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것을 타자에게 덮어씌우고 자기에게는 없는 척한다. 이상적인 남성성에 대한 환호는 여성혐오로 완성된다. 이상적인 몸은 추한 몸이 없으면 있을 수 없다. 인종주의, 동성애에 대한 거부의 근간에도 이런 투사가 똬리를 틀고 있다. 누스바움은 이를 동물과 인간 사이 ‘완충지대’를 만들려는 욕망이라고 해석한다. 그렇게 경계 뒤에 숨어야 자신 안의 취약함이 보이지 않는다. 못생긴 사람들은 그 ‘완충지대’에 세워진다. 혐오에는 위계가 따른다. 누스바움은 장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혐오 투사물의 대표 격은 여성이라고 설명한다. “유약하고 끈적거리고 유동적이고 냄새나는 존재로서 여성의 몸은 오염된 불결한 영역으로 상상되어왔다.” ‘핵토.’ 토가 나올 것 정도로 혐오한다면, 타인을 지르밟아 감추려는 자기 안의 불안이 핵폭탄급이라는 뜻일지도 모른다. 리처드 윌킨슨과 케이트 피킷이 쓴 <불평등 트라우마>를 보면, 소득불평등 수준이 높은 사회일수록 지위고하 막론하고 불안과 사회적 평가 위협에 시달린다. 이런 사회일수록 외모에 대한 압력이 심하다. 불안을 없애는 쉬운 방법은 위계를 확인하는 거니까. 외모는 바로 확인할 수 있는 위계니까. 외모는 개인의 가치를 드러내는 가격표가 된다. 그렇게 약자에 원인을 돌려야 자신과 ‘그들’ 사이 거리를 더 넓히고 모욕으로부터 안전해질 수 있다. 서로를 협력의 대상으로 보는 곳에선 지위를 과시해 자신을 지킬 필요가 없다. (26)
44사이즈가 돼야 얻는 사랑이라면
공포는 ‘돈’이 된다. 함인희는 ‘1960년대 이후 한국 사회의 몸의 ’식민화‘ 현상 연구를 위한 탐색’이라는 글에서 몸이 자본의 ‘식민지’가 됐다고 썼다. 그래서 어쩌라고? <무엇이 아름다움을 강요하는가>를 슨 나오미 울프나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을 쓴 김원영이 제시하는 ‘해법’은 모호해 보인다. ‘결단’이다. ‘아름다움’을 재정의하겠다는 결단, 내가 내 아름다움을 발견하겠다는 결단. 세상이 나를 존엄하지 않게 대하더라도 나를 존엄한 존재로 선언하겠다는 결단. 내 몸의 자유를 누리겠다는 결단. 그리고 이런 결단을 서로 부추겨주는 연대라고 한다. 멋있는 말이지만, 그 결단은 매 순간 흔들릴 거다. 매 순간 질 것 같다. 그런데 질 줄 알면서도 애써보는 수밖에 없다. 자기한테까지 미움받으며 살기는 싫으니까. (33)
30대가 세 살이 되는 사랑의 불시착
‘공감과 섬세함’이 무섭다
“딸은 애교도 많고 공감도 잘하고 노후에 부모도 잘 돌본다.” 딸을 향한 상찬같이 들리는데 불편하다. 나는 이런 ‘딸바보’들이 무섭다. 1950년대생인 우리 엄마가 평생 감내해야 했던 “큰딸은 살림 밑천”이라는 말의 다른 버전 같다. 딸을 인간이 아니라 기능으로 환원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살림 밑천이 되길 거부한 큰딸들은 ‘이기적인 x’이 됐고, 애교도 공감도 모자란 딸은 ‘인정머리 없는 x’이 된다. 딸이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공감과 돌봄의 짐을 지운다. (46)
‘탈코르셋’을 바라보는 복잡한 마음
아홉 살 여자가 말했다, “여자애라서”
내가 ‘생리충’이 아니듯 그녀도 ‘내시’가 아니다
나는 왜 방탄소년단 춤을 포기했을까
갱년기, 댄스복을 사다
Interview 어쩔 수 없는 나여도 괜찮다(거식증과 싸워온 신지유 씨)
강박증, 예민함, 불안... 그 중심에는 통제하고 싶은 욕망이 있어요. 내 몸, 사람들이 나를 대하는 방식, 모든 걸요. 그 바탕엔 공허함이 있었어요. 내가 없는 듯한 느낌이에요. 내가 뭘 해야 할지, 뭘 느껴야 할지 몰라요. ‘내가 되고 싶은’ 나보다 ‘남이 원하는’ 내가 되려 했기에 기준이 외부에 있었어요. 그래서 내부를 알아차릴 수 없게 돼버렸어요. 생리적인 것까지 못 알아차릴 정도였어요. 예전에는 오줌을 누기 직전까지 오줌이 마려운 줄 몰랐어요. 신발 때문에 발에 피가 나도 하루 종일 걸어요. 공허해서 나를 못 알아차리고 내가 없어서 공허해지는 사이클을 돌아요. 먹는 순간에는 내가 존재하는 걸 확인할 수 있으니 배가 터지게 먹어요. ‘뭘 하고 싶다’가 없으니 ‘실수하면 안 돼’만 남아요. 이 삶은 실수 아니면 통과인 거예요. 타율에 따라 살다 보니 자율이 사라져 버렸어요. (93)
여전히 내 목소리가 잘 들리지는 않아요. 그런데 이제 느끼고, 생각하고, 화장실 가고 싶고, 배부르고, 배불러도 더 먹고 싶고, 살쪄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내가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내가 있다는 걸 아니까 ‘살 자격’이라는 문제도 해결 됐어요. 아무거나 해도 되니까 아무 존재여도 되는 거예요. 현재의 나로 머물 자격이 있는 거예요. 진짜 작은 것들이 쌓이며 알게 됐어요. ‘한 큐’ 같은 건 없어요. 인과관계가 정확히 보이지 않아도 이게 답이에요. 현재의 내가 원하는 걸 해주다 보니 딱히 문제가 안 생기는 것 같았어요. 나를 받아들이는 순간과 과정의 조각들이 모여서 ‘어느새’ 괜찮아지고 있는 거죠. ‘이게 어쩔 수 없는 나구나. 어쩔 수 없는 나라도 괜찮구나. 나라는 게 있는 거야’라고 생각하니 공허감이 사라져갔어요. 사랑받지 못한 공허감 때문에 내가 누군지 몰랐는데 내가 누군지 알게 되면서 굳이 사랑에 연연하지 않게 된 거예요. 나를 인정하니까 욕구에 솔직해져요. 내 한계를 수용하니 타인의 한계도 수용하게 돼요. 어쩔 수 없음을 받아들이는 거예요. (96)
chapter2 추방당하는 몸
나의 깨끗함을 위해선 남의 더러움이 필요해
밥 먹고 똥 싸는 그 ‘지저분한 과정’이 우리를 살게 하는데, 어떤 사람들은 그 과정이 없는 것처럼 군다. 신체 분비물과 연결된 악취, 끈적끈적함, 불결함은 다른 집단에 투사된다. 자신의 ‘깨끗함’을 증명하려면 타자의 ‘더러움’이 필요하다. 투사를 뒤집어쓴 집단은 사회적 위계 아랫단을 차지한 사람들이다. 여성, 빈곤층, 외국인은 역사적으로 ‘단골 투사 집단’이었다. 실제건 아니건 불결한 이미지가 한 집단에 들러붙으면, 차별과 학대가 합리화된다. 그 차별과 학대의 결과로 더러워지면 혐오는 더 단단해진다. 차별하니 더 더러워지고 더러워지니 차별한다. 존 맥스웰 쿠체의 소설 <야만인을 기다리며>는 어떤 제국의 변경에 있는 마을 이야기다. 주인공은 이 제국에서 치안판사로 꽤 존경받던 인물이다. 이유 없이 고문당해 발이 뒤틀려버린 한 ‘야만인’ 여자를 부족에 돌려보내고 감옥에 갇힌다. 주인공이 존경받는 인물에서 떠돌이 개 같은 존재가 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첫 단계는 감옥에서 똥 싸고 오줌 누게 하는 것이다. 존엄이 무슨 성배처럼 인간 안에 버티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존엄하다는 건 서로 확인해줘야 알 수 있다. 그 확인은 사소하다 싶은 의례로 매 순간 일어난다. 어떻게 잠자고 똥 싸고 밥 먹는지가 존엄을 확인하는 순간들이다. 존엄은 한순간의 눈빛으로, 코 막음으로 무너뜨릴 수도 있다. (103)
천진난만함이 꼴 보기 싫어
특권은 편안함이다. 너무 자연스러워 특권을 누리는게 느껴지지도 않아야 일상적 특권이다. 피부색, 성별, 가난 탓에 자기가 타인에게 어떻게 보일지 매 순간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자유다. 타인의 시선, 타인의 시선으로 자신을 보는 자기 시선, 그 자기 시선을 회의하는 또 다른 자기 시선, 이 모든 시선에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거다. 그 시선들의 투쟁이 일어나는 복잡한 마음을 알지도 못하면서 묻는다. ‘그걸 왜 못 해?’, ‘왜 그렇게 꼬였어?’ (109)
백인 혼혈은 예능에, 동남아 혼혈은 다큐에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아이들
“그럼 시설에서 살래요?”
내가 살고 싶지 않은 시설에 너는 살라는 건 보호가 아니라 배제다. 시설 밖에서 사람으로 살 수 있어야 시설은 ‘선택’이 될 수 있다. 인지능력이 떨어지니 어쩔 수 없나? 북유럽 발달장애인들은 원하는 만큼 활동보조를 받으며 지역사회 속에 산다. (126)
그가 옳고 내가 틀렸다
사람 취급 못 받아야 사람이 되나
우아하게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다
비겁한 ‘사회적 합의’
Interview 영희 씨는 제일 못된 장애인이다
- 박김영희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상임대표
chapter3 돌보는 몸
자유는 몸으로 만질 수 있다
베셀 반 데어 콜크가 학대로 외상후 스트레스장애를 겪는 아이들에게 하는 치료 중에 하나가 공놀이다. 내가 던진 공을 네가 받아서 다시 던져주는 놀이로 아이들은 타인과 연결됐다는 느낌과 함께 안전을 확인한다. 슬프도록 사회적인 동물인 사람은 타인의 몸이 공기만큼 필요하다. 자유는 추상이 아니라 몸으로 만질 수 있다. 이정연은 <근육이 튼튼한 여자가 되고 싶어>에 역기를 들어올리며 오로지 자신을 느끼고 자기 몸의 한계를 시험해보는 충만한 기쁨을 썼다. 그는 옷맵시가 안 난다는 이유로 미워했던 튼실한 허벅지를 사랑하게 됐단다. 몸과 함께 마음이 치유됐다고 책에 고백한다. 자기 몸도 마음껏 움직이지 못하는데 무슨 자유가 있겠나. (165)
담을 넘으면 뭐가 보일까
촉감이 필요해
할머니가 뜬 수많은 별아
누가 나를 돌볼까, 나는 누구를 돌볼까
“우리는 취약한 생물이고, 인간들은 바로 이 취약함을 공유한다.”(아서 프랭크, <아픈 몸을 살다>) 그런데 우리는 몸을 통제할 수 있다는 환상 속에서 살아간다. 취약해지는 건 자기관리에 실패한 창피스러운 일이다. 모두 취약한데 안 취약한 척해야 하니 불안하다. ‘잘못 살아서 아픈 거다’라며 병에 도덕적 실패를 붙여 환자 개인의 탓으로 돌리는 건 불안 때문이다. 두려움을 내쫓으려 자기랑은 상관없는 이야기인 것처럼 늙고 병든 몸을 혐오한다. 전희경 등은 <세벽 세 시의 몸들에게>에서 책임이자 권리인 돌봄을 시민으로서 정의롭게 나눠야 한다고 제안한다. 헌신을 당연시하지 않고 서로 개별성을 알아봐 주는 돌봄의 상호작용이 가능해지려면 공공의 역할을 늘리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누가 나를 돌봐줄 것인가’라는 질문을 ‘나는 누구를 돌볼 것인가’라는 질문과 연동시키지 않는다면 그러한 논의는 윤리적이지 않을뿐더러 유의미한 대안을 만들어낼 수도 없다.” (186)
밥하는 일보다 중요한 노동은
셋째 이모, 박영애
빨래방 구직기
Interview 걸으며 발의 감각을 느껴봤나요? (문요한 정신의학과 전문의)
자기 몸을 사랑하는 게 가능한가요? 자기를 사랑하는 건 어려운 일이죠. 사랑해야지 결심한다고 사랑이 생겨나는 건 아니니까요. 몸을 사랑할 수는 없어도 존중할 수는 있어요. 존중은 기본적으로 약자와 다름에 대한 인간적인 태도를 말해요. 내 몸이 예쁘고 힘이 세고 완전해서가 아니라 부족하고 약하고 병들어가는 존재라서 존중하는 거예요. 존중하면 관심을 기울이게 돼요. 몸의 신호에 귀 기울이게 되죠. 몸과 관계가 좋아져요. 뜻대로 되지 않는 인생에서 우리가 가장 배워야 할 건 자기친절이에요. 그 친절은 몸에서 시작해야 해요. 몸 존중은 내 몸을 한 인격체로, 친구처럼 대하자는 거예요. 저는 ‘내가 아플 때조차 내 몸에 친절할 수 있기를’ 이런 구절을 자주 읊조려요. (207)
chapter4 당신은 혼자가 아니라는 인기척
고독이 고립이 되기 전에
전화 한 통보다 절망이 쉽다
더럽게 외로운 나를 구한 ‘개 공동체’
너는 도인 아니 도견이구나
개에게 배우는 사랑
쓰레기 자루 속 레몬 빛깔 병아리
냉소한다 그래서 행동한다
냉소는 스스로를 높이 평가하는 태도라고 생각해요. 제가 뭐라고 저 때문에 세상이 변하겠어요. 저 하나 때문에 안 변하는 게 당연하잖아요. 큰 의미 같은 건 없으니까, 그러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거나 해야지, 그래요. 안 할 이유도 없잖아요. ‘냉소한다. 그래서’ 다음에 ‘행동한다’가 나올 수 있다는 걸 그를 보고 처음 알았다. 한 사람이 사는 세상은 그 사람이 공감각하는 고통의 경계까지다. (249)
이 문어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수나우라 테일러는 장애인과 동물 차별의 논리는 같다고 주장한다. 이성에 특권적 지위를 부여하고 이를 담은 특정한 몸이 있다고 상정한 뒤 줄세우기 하는 방식이다. 성별, 인종에 따른 차별도 이 줄세우기에 따른다. 유색인과 여성은 덜 이성적인 존재로 취급당했고, 그게 차별의 근거가 됐다. 애초에, 인간이 상상도 못 할 수많은 재능과 미덕이 반짝이는 세상에서 이성이 특별한 지위를 누릴 이유는 없다. (252)
가래떡을 먹는 시간
‘땐뽀걸스’의 지현과 현빈이는 아직도 춤을 출까
그때까지 행복해질 수 없다
그때나 지금이나 내가 느끼는 세계는 위험한 곳이다. ‘신분’이 유일한 안전망 같다. 집에서 학교에서 내가 배운 세계는 위계로 짜인 곳이었다. 위로 올라가거나 내려가거나 두 가지 선택밖에 없는 곳, 떨어지면 바로 강바닥인 곳. 요즘 나는 내가 느끼는 불행의 바탕에는 이런 인식이 깔려 있다고 생각한다. 무엇이 기준이건 나보다 ‘윗줄’에 있는 사람 같으면 기죽거나 동경하고, 나보다 ‘아랫줄’이라면 무시하거나 동정하니 공감과 소통이 들어설 자리는 왜소하다. 그러니 당연히 외롭다. 외로우니 안전에 대한 불안이 커지고 신분을 향한 열망도 자란다. 고든 올포트의 <편견>을 읽다, 계속 이런 방식으로 세상을 보다가는 그 결과가 외로움만으로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억압과 처벌이 지배하는 권위적 환경에서 자란 아이는 신뢰가 아니라 힘이 인간관계의 핵심이라고 배우고, 이는 편견을 키우는 토대가 될 가능성이 크다. 자시 안에 ‘나쁜 속성’은 처벌을 불러올 수 있으니 억압되는데, 이 ‘나쁜 속성’은 고스란히 타자라는 거울에 투사된다. 자신의 가치는 지위로만 느낄 수 있는데 지위는 언제든 떨어질 수 있으니 이 위계적 세계는 좌절과 불안의 지뢰밭이다. 순전히 내 행복을 위해서 나는 기도한다. 세상이 사다리가 아니라 거미줄인 걸 느끼게 해달라고. 사람의 본성은 서로 사랑하고 공감하는 것이라고 절감하게 해달라고. 기도는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 기도가 이뤄질 때까지 나는 절대로 행복해질 수 없을 거다. (267)
김종분 씨와 곰돌이 푸
Interview 당신은 혼자가 아니라는 인기척
- 무연고 장례를 지원하는 사단법인
‘나눔과나눔’ 박진옥 상임이사
에필로그
자신의 약함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지구는커녕 타인과도 연결될 수 없다. 성경에 등장하는 욥은 재수 없는 사람이다. 욥은 신에게 해명을 요구한다. ‘어서 이 불행에 대해 말이라도 해보소.’ 그런데 신은 회개를 강요하는 친구들이 아니라 대화를 요구하는 욥의 곁에 있다. 이 이야기는 고통받는 사람 곁에 어떻게 서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욥의 친구들은 인과관계 뒤로 숨었다. 고통이 죄의 결과여야만, ‘선한’ 자신은 고통당하지 않을 수 있다. 세 친구가 욥에게서 불행의 원인을 찾고 싶었던 건 욥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서다. 불행의 원인을 개인에게 돌려 불행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고 싶었던 거다. 충고인 척 인과관계를 따지는 태도는 아픈 너와 아직 아프지 않은 나 사이의 거리를 떨어뜨려 놓으려는 시도다. 그러니 이런 충고를 들으면 아픈 사람은 더 외롭다. 그런데 마음 속에 불안이 있지 않나. 시련은 대개 그냥 찾아온다. 불행의 원인은 종잡을 수 없거나 개인 너머에 있다. 그때 필요한 건 가르침을 주는 ‘선인’이 아니라 같이 있어줄 ‘그저 그런 포유류’다. 함께 있어주기는 충고보다 훨씬 어렵다. 타인의 불행이 자기 일이 되어야 하니까. 그 공감은 자신도 실은 약한 존재임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한다고 생각한다. 늙어가는 건 더 많이 공감하는 기회일지도 모른다. (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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