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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처녀들의 저녁식사(1998)>, 20여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한 그녀들의 성 담론

비상하는 새 2022. 4. 5.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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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상수 감독의 1998년작 <처녀들의 저녁식사> 영화를 봤다. 29살 (그 당시엔) 노처녀 3명 호정, 연, 순의 성 담론에 대한 영화였다. 20여년이 지난 지금 봐도 영상, 연출은 물론이거니와 그 내용면에서 상당히 파격적인데, 개봉당시에는 얼마나 논란이 되었을지..ㅎ

 

건축사무소 오너로 성공한 커리어우먼 '호정'에게 결혼은 그닥 중요한 삶의 절차가 아니어 보인다. 있는 집 자식으로 그녀의 어머니도 그녀에게 결혼하면 여자만 손해라며 결혼을 종용하거나 압박하는 기색은 전혀 찾기 힘들다. 그녀에게 성관계 또한 큰 의미부여가 되지는 않고 자유 연애를 하는 캐릭터. 영화 막판에는 간통으로 고소를 당하면서 회사도 문을 닫게 되고 파리로 정치적(?) 망명길에 오른다. 커리어우먼+자유연애주의를 엮는 구도는 그때도 있었고 지금도 여전한 것 같다. 아주 식상한 구도.

 

'연'은 호텔 웨이트리스인데 사회적 커리어에 대한 욕구보다는 남자친구와의 결혼을 통해 안정된 삶을 꿈꾸는 여자다. 원나잇 스탠드도 불사하는 호정과는 달리 연은 남자친구(조재현ㄷㄷ;;)와의 관계만을 가지는 보수적인 캐릭터. 그녀들끼리 섹스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 항상 심드렁하게 반응하며 섹스는 중요한게 아니라고, 자신의 몸에 대한 탐구도 크게 관심이 없다. 결국 사회적으로 안정되지 않은 남자친구가 결혼압박에 못견뎌 결별 수순을 밟게 되지만 마지막에는 그녀가 주도한 관계를 가지게 되면서 그녀 자신의 섹슈얼리티에 조금은 눈뜨는 설정이 있다.

 

'순'은 대학원생으로, 대학교수가 되고 싶지만 현실적으로 자신에게 대학 교수자리는 주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 또한 가지고 있다. 그녀는 셋 중 유일한 처녀인데, 결혼이나 남자와의 관계보다 아이만 낳아 기르고 싶다는 생각을 가진 여자이다. 그녀는 그녀의 욕구를 등산, 요리, 마스터베이션으로 해소하는 듯 보인다. '연'의 남자친구와 어찌저찌 하룻밤을 보내고 아이를 임신하지만 등산 도중 폭우를 피하다 유산하게 된다. 

 

 

 

2022년 현재 32살인 나의 상황과 여자 사람 친구들을 돌아보면 '순' 같은 처녀는 거의 보기 힘든 것 같다. 20대 때와 달리 30대가 되면서 '연'처럼 안정된 결혼을 생각하는 친구들과 그 생각을 실행에 옮긴 친구들이 많아졌다. '호정'같은 캐릭터도 아주 극소수지만 존재하기는 한다. 거기에 비혼주의에 대한 진지한 계획을 꾸리는 친구들이 일부 추가된 것이 지금20대 후반 30대 초반 한국 여성의 현주소이다. 결혼 연령이 점차 늦춰지면서 영화 설정에서의 '노처녀' 대열은 이제 30대 후반은 되어야 그렇게 불리는 듯 한데, 그때가서는 어떤 포션으로 나타날지는 아직 미지수이다. 

 

20세기와 달리 21세기가 되면서 신자유주의가 더욱 그 손길을 촘촘히 뻗치게 되었고, 안티페미에 대한 담론이 2030 남성들의 목소리로 등장하면서 젠더갈등이 심해진 것도 여성들의 성과 결혼에 대한 생각의 지형도를 많이 바꾸는데 기여를 했다. 한 인간이 태어나 성과 결혼에 대한 결정들은 20년전이나 지금이나 꽤나 중요하기에 이런 주제를 가진 영화나 문학 작품은 앞으로도 많이 나올 것이다. 간통죄로 고소당해(지금은 간통죄가 없지만) 파리로 떠나게된 '호정'도, 남자친구와 결혼에 실패한 '연'도, 미혼모가 될 뻔 했지만 되지 못한 '순'도 그녀들의 인생에 남자가 어떠한 의미로 결정지어지든, 결혼의 유무와 상관 없이 어떤 인생 행로가 펼쳐지든 그녀들의 인생이 행복하기를 바랄 뿐이다. 2022년 안티페미가 득세한 앞으로의 몇년간 여성들의 삶도 어떤 시련이 닥치든 견딜만 하기를. 묵묵히 견뎌내기를. 삶을 포기하지 않고 각자가 가장 원하는 선택들을 해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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