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수 감독의 1995년작 영화 <301 302>를 봤다. 몇 년 전에 보고 두 번째로 봤는데 역시나 가히 충격적이다.
새희망바이오아파트 모동 302호 거주민 윤희(황신혜) 집 앞으로 301호 송희(방은진)가 이사오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301호 (영화 내내 여주 2명의 이름보다 '301호', '302호' 대부분 이렇게 거론된다. 닭장같은 원룸의 설정, 싱글과 돌싱의 설정, 각자 파편화되어 있는 영화 전반적인 흐름으로 보아 이 또한 외로움/단절/소외를 드러내기 위한 의도적 설정이겠지) 가 302호와 친해지기 위해 본인이 평소에 좋아하는 요리를 가져다 주면서 둘의 갈등은 불이 붙여진다.
301호는 요리에 집착하다 남편으로부터 이혼까지 당할 만큼 요리에 관심이 많고 상당한 수준을 보여준다. 그녀는 남편에게 맛있는 요리와 섹스를 통한 내조로 그녀의 존재가치를 인정받던 여자였다. 남편을 위한 행위들이기도 하지만 본인 스스로도 요리와 섹스를 즐기는 인물이다. 하지만 사육당하듯 요리에 집착하는 부인에 질려버린 남편은 바람을 피고 그녀와 섹스를 거부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요리까지 인스턴트로 대충 먹자고 몰아세운다. 301호는 자존감이 바닥나 폭식증에 시달리다 남편의 사랑을 받던 애완견을 요리해버림으로써 결혼은 종지부를 찍는다.
302호는 사춘기시절 식육점을 운영하던 의붓아버지로부터 수시로 성폭행을 당했던 트라우마를 지니고 있는 인물이다. 친엄마는 이 사실을 알면서도 가난에 시달리지 않기위해서 외면한다. 또한 그녀를 따랐던 여자아이를 식육점 냉동창고에서 동사하게 만든 원인제공자라는 죄책감에 거식증에 시달리는 여성이다.
301호가 가져다준 음식을 못 먹는 302호가 음식물쓰레기로 만들어버린 장면을 들키면서 301호는 본격적으로 302호를 먹이기에 집착하게 된다. 아픔을 알기 전 302호가 자신의 요리를 거부했다는 것은 남편에게 거부당한 과거의 아픔을 다시 상기시키면서 본인 존재를 거부하는 것으로 투사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서로의 아픔을 알게 되고 끝내 301호는 302호를 요리(인육으로 만듦)해 먹으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
그 때나 지금이나 여성의 욕구는 가부장제 아래 억압되고 뒤틀려 왜곡돼 나타난다. 식욕(요리)과 성욕을 묶어버리는 단순한 설정이 식상하기는 하지만 상징적 의미로서는 충분히 가치가 있다. 현대의 여성들은 가부장제가 거세하고 억누르는 욕망을 해소할 방법이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과거에 비해 현대에는 살찐 여성은 게으른 여성으로 치부되면서 현대여성은 먹는 것 마저 구속으로 작용해 이중구속에 시달리며 분열하는 현실이다. 영화의 설정이 다소 파격적인 면이 있지만 그 세부적 캐릭터들은 지금도 우리 주변 도처에서 발견할 수 있는 생생한 인물들이다.
ps. 영화 시나리오 모티브가 장정일 시인의 <요리사와 단식가>라는 시에서 착안을 했다고 한다.
요리사와 단식가/장정일
1
301호에 사는 여자. 그녀는 요리사다. 아침마다 그녀의 주방은 슈펴
마켓에서 배달된 과일과 채소 또는 육류와 생선으로 가득 찬다. 그녀는
그것들을 굽거나 삶는다. 그녀는 외롭고, 포만한 위장만이 그녀의 외로
움을 잠시 잠시 잊게 해준다. 하므로 그녀는 쉬지 않고 요리를 하거나 쉴
새없이 먹어대는데, 보통은 그 두 가지를 한꺼번에 한다. 오늘은 무슨 요
리를 해먹을까? 그녀의 책장은 각종 요리사전으로 가득하고, 외로움은
늘 새로운 요리를 탐닉하게 한다. 언제나 그녀의 주방은 뭉실뭉실 연기
를 내뿜고, 그녀는 방금 자신이 실험한 요리에다 멋진 이름을 지어 붙인
다. 그리고 그것을 쟁반에 덜어 302호의 여자에게 끊임없이 갖다준다.
2
302호에 사는 여자. 그녀는 단식가다. 그녀는 방금 301호가 건네준
음식을 비닐봉지에 싸서 버리거나 냉장고 속에서 딱딱하게 굳도록 버려
둔다. 그녀는 조금이라도 먹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그녀는 외롭고, 숨
이 끊어질 듯한 허기만이 그녀의 외로움을 약간 상쇄시켜주는 것 같다.
어떡하면 한 모금의 물마저 단식할 수 있을까? 그녀의 서가는 단식에
대한 연구서와 체험기로 가득하고, 그녀는 방바닥에 탈진한 채 드러누
워 자신의 외로움에 대하여 쓰기를 즐긴다. 흔히 그녀는 단식과 저술을
한꺼번에 하며, 한 번도 채택되지 않을 원고들을 끊임없이 문예지와 신
문에 투고한다.
3
어느 날, 세상 요리를 모두 맛본 301호의 외로움은 인육에까지 미친
다. 그래서 바싹 마른 302호를 잡아 스플레를 해먹는다. 물론 외로움에
지친 302호는 쾌히 301호의 재료가 된다. 그래서 두 사람의 외로움이
모두 끝난 것일까? 아직도 301호는 외롭다. 그러므로 301호의 피와 살
이 된 302호도 여전히 외롭다.
'길안에서의 택시잡기' 198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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