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들은 다른 장소를 살아간다>
(207쪽)
부엌
여성에게 주어진 역할과 관계맺음에서 부엌이란 말뚝과 거기 묶인 줄을 누구도 시원스레 제거하지는 못했다. 왜 말뚝이냐 하면, 부엌에 있지 않더라도, 부엌에 있을 필요가 없더라도, 부엌에 있어야 할 존재라는 사회적 압력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부엌에서의 역할을 기대받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소위 ‘바깥일’을 하더라도 부엌과 관련한 수발노동을 요구받거나 부엌일을 하는 존재에게 ‘큰일’을 맡길 수 있느냐는 평가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10)
시간과 장소는 인간 삶에서 중립적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인간의 하루는 24시간이라지만, 누구나 24시간을 공정하게 누리지는 않는다. 누구는 각종 수발노동을 받아 가며 24시간의 몇 배를 누릴 수 있고, 누구는 각종 수발을 바치느라 자기 시간이란 걸 못 가질 수 있다. 동일한 공간을 무대로 하는 사람들이 실제로는 아주 다른 ‘장소’를 살아간다. 장소는 경험이 일어나고 무르익는 공간인데, 성별, 나이, 계층 등에 따라 특정 공간에서 맺는 관계와 역할이 다르기 때문이다. (11)
차별은 누구에게만 특정 역할을 할당하고 그걸 본분이라 여기게 만든다. 그 역할에 충실한 것을 희생이나 헌신 등의 말로 치장해서 차별받고 있다는 감각을 지우는 게 차별의 전략이다. 장소가 의미 있으려면 소속감을 느끼고 나를 인정받는 곳이어야 한다. ‘소속감’을 느끼려면 동료가 있어야 한다. 나의 부엌에는 그런 것이 없었기에 끔찍한 고립의 장소였고, 거기서의 경험은 나누거나 전승할 수 있는 경험이 아니라 신세 한탄이 될 뿐이었다. “나 이렇게 힘들었어”라고 울을 뗄 때마다 ‘또 시작이네’라는 눈총을 받는 이야기는 경험으로 전승될 수 없다. -> 여성들의 이야기는 역사적으로 운집되지 못하고 파편화되어 있었기에 경험이라기 보다는 신세 한탄으로 인식되어 왔구나.
내가 가장 속 쓰린 경우는 따로 있었다. (저자는 인권활동가로서 벌이가 시원치않을 때 각종 식당 주방일을 했다) 식당 노동자들은 소위 ‘진상’ 손님을 자주 겪는데, 그들이 가고 나면 으레 뒷말을 한다. 그런데 동료들이 가장 싫어하는 ‘진상’ 손님은 밥때 식당에서 밥 먹고 있는 여자들이었다. “밥때 다 됐는데, 지 집 가서 밥 안 하고 여기서 저러고 있을까?”가 비난의 내용이었다. 여성은 ‘먹이는’ 사람이지, 남이 해 준 음식을 ‘받아먹는’ 사람이 아니라는 오랜 규범의 질김을 본다. 집을 나와 바깥 부엌에서 일하고 있는 여성이, 집 부엌에 있지 않은 여성을 비난하는 광경은 있어야 할 곳과 역할을 지정하는 폭력의 정점이었다. (19)
연단
연단과 청중석 사이, 권력관계는 단순하지 않다. 내가 연단에 자리했다고 해서 그 ‘권력’이 안정적인 건 아니다. 나의 연단은 특수한 도전에 늘 노출돼 있기 때문이다. 일부 청중의 끼어들기나 위협하는 식의 도전은 ‘평등’한 위치에서 새로운 문제 제기나 환기가 아니다. 그런 거라면 언제든 환영이다. 이것과는 성격과 의도가 전혀 다른 식의 ‘도전’이 있다. 노골적으로 진도 나가기를 방해하거나 권위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비하적 표현을 들이댄다. (30)
교실
입시 공부로 들볶았지만, 여자의 공부에 대한 이중성은 교실에서 익숙한 것이었다. ‘뛰어나길 바라지만, 너무 뛰어나선 안 된다’는 단속이었다. 남자 기죽이면 안 된다, 공부 잘하는 거 예쁜 것보다 못 하다... 공부의 목적을 ‘시집 잘 가려면’으로 설정하는 훈화를 들을 때마다 공부는 나를 해방하는 게 아니라 나 자신과 불화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나중에 보면 공부 잘한 애들보다 꾸밀 줄 알고 놀 줄 알았던 애들이 더 잘 살더라”는 말을 자주 하던 선생님은 왜 그러면서도 시험 성적이 떨어지면 매를 들고, 반 평균이 떨어졌다고 우리를 닦달했을까? 미와 지의 이분법, 미와 지의 적대, 이런 이분법이 여성들을 상호 비교하게 하고 ‘매력’이라는 이상한 기준에 맞춰 경쟁하게 하고, 스스로의 가치를 폄하하게 만든다. (49)
토론회 등에서 남성들끼리만 명함을 주고받고 나를 섬처럼 만드는 일, 정작 그 일의 전문가는 나인데 나를 제쳐 두고 경험이 훨씬 적거나 문외한인 남성들이 자원과의 연결을 차지하는 일, 나를 인터뷰하고 나를 초대한 자리임에도 저명한 남성 활동가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나를 평가하려는 질문이나 인사말을 듣는 일... 그럴 때마다 내가 지워지는 유령의 경험을 한다. (52)
광장
광장이란 내가 정치체의 성원이고 다른 누가 아닌 내가 이곳의 정치를 결정한다는 깨달음을 주는 장소이다. 우연한 탄생과 혈통 덕분에 날 때부터 완전한 시민권이라는 선물을 받은 사람을 혹자는 ‘Accidental Citizen’이라 불렀다. 사고처럼 우연히 태어난 곳에서 선물처럼 받게 된 시민권을 배부받게 된 자리는 자랑스러울 것도 없고, 타자에 대한 배타성을 고집할 자격도 될 수 없다고 했다. 민주주의적 시민성은 ‘사고(accident)’처럼 우연히 갖게 된 시민권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사회정치적 삶에 관심을 갖고 공동의 세계를 구성하려는 의지와 호혜적인 행위에서 생기는 것이다. 의지도 호혜성도 없이 조성된 광장은 흔히 ‘동원’이라 불린다. ‘동원’에서 강조되는 것은 ‘날 때부터 저절로’에 속하는 국적이나 민족에 관련된 것이 많다. 이런저런 광장에 동원된 기억이 내 학창 시절에는 빼곡하고 그 중에는 괴롭고 수치스럽기까지 한 경험이 있다. (59) -> 최근 여고생 군위문편지 사건도 정치적 ‘동원’이다.
광장에서 여성은 지적인 개념이나 진지한 명상 능력이 없기 때문에 여성의 몸은 공적 광장에 적합한 몸이 아니라고 여겨졌다. 그러나 유독 광장에서 환영받는 여성의 몸은 ‘모성’으로서였다. 군사정권 시절, 광장은 늘 위험한 곳이었는데, 그곳에서 일말의 안전을 느끼게 되는 순간은 ‘민가협(민주화실철가족운동협의회)’의 ‘엄마들’이 앞에 섰을 때였다. ‘엄마들’은 ‘자식’ 같은 시위대를 지키기 위해 늘 맨 앞에 섰고, 제일 용감했다. -> 국가는 비/미혼 여성을 시민으로 여기지 않았으며, 그나마도 ‘엄마’일때만 정치적 존재로 인정해줬음. 그런데 ‘엄마’의 자격으로 정치적 행동을 할 때마저 ‘아들’들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을 때가 대다수였다.
2008년 광우병 쇠고기 촛불집회에서는 군복 차림의 예비군이 등장해 “우리가 지켜 줄게”, “위험하니 여성분들은 뒤로 빠지세요”라고 했다. 과거에 ‘꽃잎’으로 저항 시민을 호칭했던 공권력처럼, 같은 차여자들이 그렇게 여성성을 폄하했다. 때로는 시위에 참여하는 여성을 ‘개념녀’라고 지칭하며 추켜세웠다. ‘개념녀’는 결코 칭찬이 될 수 없다. 동등한 광장의 구성원이 아니라 ‘기특하다’고 칭찬받는 하위의 인간이 되는 것이다 (67)
거리
복기하는 것 자체가 고통인 일을 나서서 고발하는 것은 대단한 용기와 인내가 필요한 일이다. 그런 상황에 처한 여성을 가장 괴롭히는 말은 “위험하면 나다니지 마”라는 말이다. “나는 그런 일 겪은 적 없는데 너만 유별난 것 아냐?”, “모든 남자가 다 그런 건 아냐”는 별책부록이다. ‘나는 그런 사람 아니다’라는 말로 빠져나가려는 것은 성차별적인 환경과 구조를 특수한 개인의 일탈로 내치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문제와의 관계성을 부인하고 책임성에서 손 떼겠다는 선언이다. 어떤 사회 문제를 놓고 개인의 일탈로 치부하면 편하다. 일탈자가 아닌 내가 책임질 일은 없다고 여기니 편한 것이다. ‘이상한’ 개인을 마음껏 비난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자기가 경험하지 못했으면, 자기에겐 왜 그런 위험이 닥치지 않았을까를 생각해 봐야 하는데, 문제의 고발자를 의심해 버린다. (79)
쇼핑센터
노동으로 소비하든, 기호 또는 과시로서 소비하든, 어쨌든 간에 여성은 소비의 주체로 대접받지 못하는 것 같다. 오히려 쇼핑의 장소에서 여성은 소비의 ‘대상’이 되는 경험을 더 많이 한다. 쇼핑 장소를 차지하는 많은 광고 사진, 이미지, 홍보 문구 속에는 대상이 된 젊고 예쁘고 날씬한 여성들, 혹은 ‘엄마 마음’을 보증하는 특정 역할에 충실한 여성들로 넘쳐난다. 그런 여성 대상화의 이미지가 가득 찬 쇼핑 장소는 표준화, 정상화의 압박이 고조되는 곳이다. 저 사이즈, 저 나이대, 저 취향에 속하지 않으면 예외이고 비정상이라는 압박. 소비는 단지 물건을 사거나 쓰는 행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사람은 소비하는 대상의 이미지나 상징 등의 요소도 같이 산다. ‘가족의 건강을 생각하는 현명한 주부의 선택’이라는 문구는 이미 앞장서 여성의 선택권을 행사하고 있다. 같은 먹거리라도 ‘아이들 영양 간식, 아빠 술안주’ 식으로 여성만 빼놓고 먹을 사람이 지정돼 있다. 어쩌다 먹는 사람에 끼워 줄 때면, ‘엄마를 위한 다이어트’라고 쓰여 있다. (93)
옛 시대극을 보면 유럽 남성의 복장이 엄청 화려하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을 통해 귀족 신분을 과시하는 복식이 억압되고, 부르주아 복장을 기본으로 한 단순하고 통일된 형태의 허식 없는 옷이 등장하게 되었다. 18세기 지식인들은 ‘사치’를 정치적 악덕이라 비판하며 거리 두기를 했지만, 여성에게는 수수한 옷을 강요하지 않았다. 그런 사회에서 사치의 상징인 화려한 옷을 입는 여성은 자연히 남성보다 도덕적으로 열등한 이등 시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18세기 초에 이미 쇼핑 중독증을 보이는 여성들이 나타났다. 남성은 여성에게 아름답고 호화롭게 치장한, 그런 옷이 잘 어울리는 연약한 존재이기를 요구했다. 남성은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노골적으로 부를 과시할 수는 없었고 대신 아내나 딸, 연인을 통해 자신의 지위와 금전적 능력을 드러내고자 했다는 것이 베블런의 의견이다. 근대 여성에게는 ‘소비하는 일’이 허락되었지만, 그 소비는 언제나 ‘대리적’일 뿐 여성의 본질이 될 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95)
여행지
마르코의 여행에서 어느 여성학자가 해 준 말이 떠올랐다. 남자는 돌아오지만 여자는 돌아올 수 없다는 게 남녀의 길 떠남의 차이라고 했다. 남자가 속한 장소는 원래 남자의 소유이고, 그 장소는 남자의 방황과 도전과 성장을 기대하며 기다려 주지만, 여자는 장소를 버려야만 떠날 수 있다 했다. 그 장소는 제 것이 아니기에 우선 버려야 여자는 자기 자신이란 걸 찾을 수 있다. 그 장소에 속한 알량한 지분이라는 것도 일단 ‘버리고’ 떠나게 되면 회복할 수가 없다. 여자의 떠남과 방황은 장소를 저버리는 행위이고 장소를 가꾸고 기다려야 할 본부를 저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104)
장례식장
나는 맏딸이고, 맏이라는 이유로 어릴 때부터 살림과 동생들 뒤치다꺼리, 나이 들어서는 부모 돌봄의 상당 부분을 도맡아 했다. 그런데 왜 장례 때만 남동생에게 그 역할을 양보해야 하고 동생들의 남편들보다 더 ‘뒤’에 있어야 하나? 비혼 여성이라서? 왜 다른 역할은 당연히 내 몫이었는데 장례식에서는 그게 내 몫이어서는 안 될까? 이런 소심한 속삭임은 다른 센 목소리에 금세 사그라들었다. ‘아니야. 그러면 정말 골 아파져. 남동생하고 원수지간이 될 거고 올케 눈치는 어쩔 거야. 집안 망신시킨다고 입질에 오를 테고, 살아남은 부모님 한 편이 왜 멀쩡한 아들 두고 네가 나서냐고 하겠지.’ 혹자는 페미니스트란 어떤 면에서 “더러운 년”이라는 욕을 들어도 전혀 위축되지 않으며, 오히려 이런 말을 듣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것이라 했지만, 장례식장에서 나는 과연 그런 말을 감당해낼 수 있을까 평소 내가 인권운동가임을 껄끄럽게 여기던 가족들은 진절머리를 칠 것이다. 숱한 이론과 가치를 외쳐 왔어도 내 삶과 친밀한 관계 속에서 그걸 꺼내 놓기는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122)
화장실
화장실 접근권의 평등성 침해로 여성들은 부득이하게 회의에 늦고, 공연 인터미션 내에 볼일을 해결하려 발을 동동 구르고, 스포츠 경기의 주요 부분을 놓치게 된다. 이런 이유로 미국 일부 주에서 ‘화장실 평등법’ 제정 요구에 여성들은 환호하며 찬성했는데, 어처구니 없게도 남성들은 항의에 나서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화장실 혁명 중 하나는 보다 ‘포용적인’ 화장실을 만드는 것인데, 젠더 중립 화장실이 한 예이다. 기존의 군집형 화장실이 아니라 모두 온전한 문이 달린 독립형 화장실로 만들고 남자용 소변기는 설치하지 않는 설계이다. (138) -> 젠더 중립 화장실? 공공장소나 술집과 같은 곳의 화장실에서 불법촬영이 판치는 현실에서 너무 나이브한 발상아닌가??
일터
어느 노동권 관련 집회에서 노동조합 조끼를 입은 한 남성이 마이크를 잡고 이야기했다. 요지는 ‘나 어렸을 때는 유치원 같은 데 애들 보내지 않았다. 엄마들이 집에서 아이들을 돌봤다. 그런데 살림살이가 정말 팍팍해졌다. 그러다 보니 요즘 엄마들이 줄어든 소득을 보충하기 위해 아이를 맡기고 일하러 나가야 하는 것 아니냐? 정말 삶의 질이 나빠지지 않았느냐?’ 그 집회에는 카트를 밀고 나온 대형 마트 노동자들을 비롯해 여러 직종의 유니폼을 갖춰 입고 나온 여성 노동자들이 엄청 많았다. 누군가를 부양할 뿐 아니라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부양해야 하는 나 같은 여성도 많았을 것이다. 이런 인식에서라면, 여성 노동자들은 ‘열악하고 비참한 노동자, 무력한 희생자의 이미지’로 그려지겠구나. 딱 그만큼에서만 얘기되겠구나. 여성의 노동도 자신의 자존감과 성취를 위해 중요하다고 하면 ‘사치’라고 여기겠지. 여성은 자기 부양을 할 뿐 아니라 누군가의 부양자라는 것, 저마다 정치적 의견을 가지고 실천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은 묻히겠구나. 아니 묻히는 게 아니라 ‘남성의 노동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걱정거리나 걸림돌이 되겠구나. (144) -> 이대남들이 부랄발작하는 것도 같은 맥락인 듯. 역차별 어쩌고저쩌고
모든 혐오는 ‘제 장소를 벗어나 있다’고 느끼는 데서 시작된다. 모든 것에는 제자리가 있기에 벗어난 것은 뭔가 오염되고 불결한 것이 된다. 오랜 세월, 집 ‘밖’에 나가 일하는 여성은 제 장소를 벗어난 존재로 취급됐고, 일하는 당사자는 ‘바깥’ 노동을 수치스럽게 받아들여야 했다. 여성이 밖에서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은 충분히 부양받고 있지 못하다는 신호였고, ‘안’에 있어야 할 것이 ‘밖’에 있는 것은 뭔가 이상한 것이 돼 버린다. 요즘 시대야 좀 다르긴 하지만 아직도 여성이 부양자로서 또한 스스로를 부양하기 위해 일을 하더라도, 잠시 용돈 벌러 나온 노동, 주 부양자를 보조하는 노동으로 취급된다. 여성의 자기 성취를 위한 노동은 ‘사치’로 간주하여 남성의 자리를 뺏은 듯 비난하고, 대우나 승진 등에서 불이익을 주고, 자를 땐 여성부터 자른다. 이런 관행들은 여자들의 노동에 대해 ‘제 장소를 벗어나 있다’는 인식이 여전함을 말해 준다. 그런 탓에 여성의 일터를 말할 때면 직장만이 아니라 꼭 가사노동이 같이 언급된다. (147)
재생산노동은 여성의 일터를 위해서일 뿐만 아니라 누군가에게 ‘의존’하는 것이 존재 조건인 모든 인간에게 필요하다. 우리는 한순간도 타인에게 기대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가사노동이란 ‘집안일’이 아니라 모두에게 필수적인 ‘재생산노동’임을 존중하고 모두에게 그것이 적절히 제공될 수 있도록 책임을 나눠 짊어져야 한다. 어느 페미니스트 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가사노동은 ‘탈젠더화’돼야 하고 국가가 이 노동에 대한 부분에서 이윤을 획득하는 ‘남성’ 노릇을 그만둬야 한다.” (151)
장소는 물리적인 공간만을 말하는 게 아니라 거기서 맺는 관계를 포함한다. 자기 장소성을 확보한 쪽은 ‘주도권, 독창성, 독립성’을 뻐긴다. 반면 다른 쪽에서는 눈에 띄지 말 것, 고분고분할 것, 보다 적극적으로는 ‘상대를 기쁘게 할 것’을 요구받는다. 독립 또는 자립은 혼자 하는 게 아니다. 장소를 공유하는 사람들의 경험과 반응이 중요하다. (152)
헬스클럽
몸은 누구나 가지는 장소이지만, 그만큼 타인의 시선이 강요하는 ‘표준화, 획일화, 정상화’의 간섭을 많이 받기에, 내 것임에도 전혀 내 것 같지 않은 장소이기도 한다. 몸은 쉽게 ‘물화’ 된다. 즉 ‘사물’처럼 취급받는다는 뜻이다. ‘물화’되어 유난히 시선의 폭력을 많이 받는 몸들이 있고 그중엔 단연 여성의 몸이 있다. 일차적 장소인 자기 몸이 폭력에 노출돼 있다면, 여성은 장소 없는 존재이고 장소 없는 설움과 싸워야 한다. 자기 몸을 상대로 싸워야 한다는 게 그 비극성을 배가시킨다. 몸은 여성혐오가 시작되는 일차적 장소이다. (160)
이제 운동하는 신체는 자기 관리의 표본이 되었다. ‘운동 안 하는 사람은 자기 관리를 안 하는 사람이다. 구직 활동을 위해서 운동을 해야만 하고 일을 하기 위해 체력을 갖춰야 한다.’ 이게 요즘의 기본 교범이라면, 여성에게는 날씬함을 비롯한 몇 가지 옵션이 추가된다. 여성에게 운동장을 내주지 않았던 사회는 여성이 건강한 신체까지 알아서 갖춰 주길 바란다. 여성들은 재생산노동을 해내는 한편 노동력을 팔기에 충분할 만큼의 체력을 확보해야 한다. 일터에서는 감정노동을 더 많이 감내할 만큼의 정신적 근육도 요구된다. (165)
파티장
회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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