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페미니즘

<셀프 혁명>, 글로리아 스타이넘

비상하는 새 2022. 2. 23. 09:00
반응형

<셀프 혁명>

글로리아 스타이넘

(422)

 

I. 자긍심이란 무엇인가?

 

흑인이나 유대인들이 비싼 곳이든 싼 곳이든 식당이나 바의 출입이 거절당하면 그에 대한 항의에는 아무 거리낌 없이 찬성하면서도, 인류의 절반이자 흑인과 유대인의 반을 차지하는 여성의 문제에는 왜 좀 더 진지하고 심각하지 못했는지 모르겠다. 그 진실은 내가 나 자신을 포함해 여성과 관련된 건 뭐든지 진지하게 바라보지 않으려는 사회의 시각을 그대로 내면화했기 때문이었다. 자긍심이 낮아서였을 뿐이지 결코 논리적인 시각은 아니었다. (20)

 

어째서 자긍심에 관한 시민들의 관심과 정부, 종교단체, 언론기관들의 지원 사이에 그런 분열이 생기는 것일까? 나는 그 이유가 내전 권위 inner authority에 대한 발상 자체가 외부로부터 명령을 받는 것에 익숙한 사람이나 그 명령을 내리는 데 익숙한 사람들의 기분을 상하게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외부의 권위만을 심각하게 받아들일 경우 내적 경험은 하찮은 관심거리로 전락한다. (29)

 

나는 내 어린 시절의 그 고통스럽고 낯설지 않은 삶의 패턴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나에겐 어째서 집이 안전하고 즐거운 곳이 아닌가? 내 어린 시절 내겐 그런 집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날 기꺼이 도와주려는 사람한테 나는 왜 도움을 청하지 않는가? 과거에 그런 사람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째서 내가 어디에 살더라도 언제든 떠날 사람 같은 삶을 살았는가, 실제로는 전혀 그리하지 않았음에도? 어린 시절 떠돌이라서 어느 곳에도 정을 붙이지 않음으로써 내 자신을 보호했던 탓이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어린 시절 대우받았던 그대로 스스로를 대우하려는 경향이 농후한 듯하다. 아마 다른 이들도 그러지 않을까.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패턴들을 돌아보게 되어서야, 우리는 스스로를 변화시킨다. 오래된 패턴들은 아무리 부정적이고 고통스러울지라도, 마법같이 우리들을 끌어들이는 힘이 있다. 그게 우리가 살아온 집이기 때문이다. 패턴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를 직시하게 되면 패턴의 반복은 사라진다. 그리고 그렇게 과거를 치유할수록 우리는 현재에 응답하게 된다. (40)

 

우리가 누구이든 천부적 권리인 자긍심을 재발견하기 위해 떠나는 여행은 비슷한 단계를 밟는다. 첫 번째는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우리 자신의 눈으로 보는 경험이다. 두 번째는 수치스러운 비밀처럼 보이는 것을 당당히 말함으로써, 그것이 수치스럽지도 않고 비밀도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세 번째로 내내 정상적인 것처럼 취급되어 이름조차 가지고 있지 않은 문제들에 이름을 부여하는 일도 있다. 네 번째는 비슷한 경험을 가진 사람들과 결속하는 것이다. 다섯 번째 단계로, 스스로에게 권한을 부여하고 자치를 할 수도 있다. 여섯 번째로, 힘이 분배된 구조 안에서 결속하게 된다. 그러고 나면 마침내, 독립과 상호의존 사이에 균형을 유지하면서 참된 자아의 동심원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52)

 

II. 행복한 유년 시절은 지금도 늦지 않다

 

심리학에서도 내내 남성들에 맞춰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성장하면서 더 많은 자유를 만끽하는 것과는 반대로 성장하면서 억압되고 고립되어져 가는 성향이 얼마나 크게 다른 지에 대해서는 거의 주목하지도 않았다. (125)

 

여자아이에 대한 잔인한 통제는 오랫동안 여성들이 당해왔던 수치에 대한 보상으로, 당시 사회가 어머니들에게 전통적으로 부여한 일종의 유일한 권력이었다. 자녀의 육신과 영혼에 대한 절대적 통제라는 형식으로 그녀에게 거대한 왕국이 주어졌던 것이다. (148)

 

 

III. 배움의 함정

 

종족과 계급을 떠나, 여성들에게 있어서 교육은 삶과 지식을 분리시켰다. 배운 것과 살아내는 일이 따로따로인 것이다. 그것은 정신과 정서의 고리를 끊어버린 일로서, 지적으로 우리가 배운 것과 여성으로서 우리가 겪은 것 사이의 연결고리의 단절이기도 했다. (167)

 

스미스여대 졸업생들 중에는 정치나 사업에서부터 교육이나 예술에 이르기까지 모든 면에서 자긍심을 느끼고 활동하는 이도 있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용감하게 주목할 만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집단으로 보면 그들은 동부 톨레도 여성들보다 더 강하고 더 재미있고, 유쾌하거나 자유로워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남에게 한 번 더 사과하면서 자신을 비난하고, 그러면서 자기 자신과는 거리를 두었다. 이혼을 해도 무엇을 잃는지는 남편의 직업에 따라 결정되었다. 남편이 판사나 의사라면 그들이 잃은 것은 판사 부인, 의사 부인의 자리였다. 결혼을 할 경우에는 더욱더 남편의 직업에 의해서 여성의 지위가 정해졌다. 그들의 가장 큰 차이점은 말하는 내용에서가 아니라, 어떻게 말하느냐에서였다. 동부 톨레도 여성들은 나는 원해’, ‘나는 알아’, ‘나는 바라고 있어등으로 말을 시작했다. 그에 반해서, 스미스대 졸업생들은 사람들이 말하길’, ‘사실인지도 몰라’, ‘아마 단지 나 뿐이겠지만이라고 했다. 그들의 생각을 넌지시 비치기만 하는 쪽이었다. 동창회에 관한 글을 쓸 때 나는 이 두 가지를 비교해 보았다. 그 차이점은 경제적인 면에서 오는 듯했다. 동부 톨레도 여성들은 자신의 가정을 부양하기 위해 일을 해야만 했지만, 그것은 또한 그들의 힘과 독립심을 발견하게도 했다. 반면에 스미스대 졸업생들은 의존적인 아내를 부양할 능력 있는 남자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스스로도 먹고 살 수 있다는 자기 확신을 박탈당하고 있었다. 물론 둘 중 어느 그룹에 대해서도 가정을 꾸려 나가고, 아이를 양육하는 일을 경제적 가치로 평가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계층 간의 경계를 넘어서는 가부장적인 규칙이기도 했으므로. 나는 아직도 계층이 여성들에게는 종종 반대로 작용한다고 믿는다. 평범한 남편과 아내 사이보다 거물과 그의 아내 사이에서 더 큰 힘의 차이가 있다. 그리고 전문직 남성은 노동자 계층과는 다르게 중요한 일을 하는 직업을 가지려 들기 때문에, 아내가 갖는 직업은 곁가지로 여긴다. 하지만 경제학만으로는 그처럼 상이한 두 동창생 그룹들 간의 전체적인 차이를 설명하지 못한다. 내 생각엔 우리 같은 대학 졸업자들이 받은 교육의 내용에 문제가 있다고 본다. 그 교육의 내용들이 여성들에게 은밀하게 다음과 같은 치명적인 훼손을 더 받기 쉽도록 만들었다. (서구 문명의 고전을 존경하도록 가르침으로써 인류의 절반인 여성에 대해 그냥 선심을 베풀거나 왜곡하고, 손상시키며 때로는 증오를 드러내야할 대상으로 가르침. 철학 체계에서도 양성을 인정하거나 그 반대로 최악의 경우는 여성의 열등감을 주로 다루는 내용을 배움. 모든 권력과 권력 기관이 남성에게 부여된 역사책을 읽음. 교육의 사다리를 올라갈수록 점점 더 여성 권위자의 수가 줄어들다보니 다른 여성들과는 고립되는 꼴을 자초하게 됨) (170)

 

외양적인 면(성적)에서는 남녀 학생 사이에 드러나는 차이가 없음에도 그들 자신이 느끼는 내부적 지적 자긍심에서는 대차가 난다. 어째서일까. 그것은 학년이 올라가면서 여학생들은 자기 자신을 덜 돌아보기 때문이다. 자신만의 모습을 드러낼 기회가 줄어든다. 학문의 좁은 길에서나 강의실에서나, 학교 당국에서 볼 때도 남학생들에 비하여 덜 대표적 존재가 되면서, 눈에 덜 띄게 되고 때로는 업신여김을 받게도 된다. 심지어 성공을 위해서 죽어라 고생했음에도 그 성공이 도리어 비여성적으로 보여서 고생 자체가 묵과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 학생들은 대부분 남녀공학 대학으로 진학했기 때문에, 인종이 어떻든 그들은 일종의 이방인이었고 심지어는 적대의 대상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결국 이런 말도 되지 않을까. 더 많이 교육을 받고 높은 성적을 받는 일조차도 자신의 진정한 자긍심을 낮추는 데 한몫할 수 있다고. 여학생들이 학교 교육 과정에서 내내 배운 것은 바로 그들의 처지라는 교훈이었으니까. (185) -> 비록 성적은 남성 못지 않게, 자주 더 높은 점수를 획득하는 여성들이지만 내적 만족도는 아주 낮은 현실.

 

시몬 드 보부아르 같은 지적 선구자조차도 여성들이 현재와 미래의 반란만을 바라보았고, 과거 역사 속의 혁명의 증거들을 챙겨서 보존하자고 하지는 않았다. 엘리자베스 캐디 스탠튼은 성경을 여성 중심으로 개작하기도 했는데, 도리어 다른 여성 참정권자들로부터 비난받았다. 이와 같은 관점의 차이를 살펴볼 때, 스탠튼은 공식 교육을 별로 받지 못했고, 보부아르는 고등교육을 받았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스탠튼은 지나간 역사 속에서라도 여성이 어떻게든 한 부분을 차지해야만 한다고 단순하게 생각한 반면, 보부아르는 그와 반대되는 내용으로 교육을 받았으니까. (190) -> 자유로운 상상을 제한하는 보수적인 교육 체계.

 

호르몬의 영향을 받은 남성형 우뇌와 여성형 좌뇌이론(반대 아닌가?)은 현대의 생물결정주의에서 가장 대중적인 개념이지만, 역시 비난받기 시작했다. 좌반구는 분석이나 논리와 같은 남성적역할 전문인데, 그와 동시에 여성적이라 할 수 있는 언어 작업도 하고 있다. 우반구도 마찬가지다. 공간 처리나 시각 작업과 같은 것은 수학 관련으로 남성적기능인데, 직관이나 연상과 같은 여성적작업도 수행한다. 말하자면 각각의 두뇌 반구는 양성이랄 수 있다. (217)

 

 

IV. 다시 배우기

 

한 가지 사실만은 명백하다. 인간의 마음은 자긍심을 무너뜨리는 방법과 그것을 키우는 방법 양쪽을 다 알고 있다. 그리고 상상은 창조의 첫 단계가 된다. 진정한 자아의 존재를 믿는다는 것은 진정한 자아의 탄생을 허락하는 일이기도 하다. (231)

 

일반적으로, 마음이 통하는 가족에서 잘 알려진 4가지 원칙이 있다. 첫째, 어떤 일을 실제로 경험한 사람은 그 방면에 있어서는 전문가보다 더 전문가이다. 둘째, 경험의 공유와 그것을 통해서 변화하려는 욕구가 서로 만났을 때 서로를 하나로 묶을 수 있다. 셋째, 상호간의 비밀 유지 약속은 반드시 존중되어야 한다. 넷째, 모든 이가 참여는 하지만 아무도 독단적으로 지배하지는 않는다. (266)

 

사회의 지배적 제도가 우리의 관점과 경험을 눈에 보이지 않는 하찮은 것으로 여기는 탓에, 우리는 그런 대우를 그냥 내면화하게도 된다. 이와 같은 경우 두 가지의 유사 이론 대비는 그러한 장벽을 부수는 데에 도움이 된다. 첫 번째는 우리 자신들의 경험과 다른 그룹들의 그것을 대비하는 방법이다. 차별대우를 거부하거나 저평가된 사람, 집단의 경험을 비교하는 것인데, 이들이 겪은 고통에 대해서는 사회가 좀 더 심각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ex. 여성을 성녀 아니면 창녀라는 두 가지 전형적인 부류로 나누듯, 유대인들도 두 가지 부류로 나눔 : 희생자(안네 프랭크)와 가해자(샤일록)) 두 번째의 대비적 사고는 두 개의 차별반대 그룹을 비교하는 대신에, 강한 그룹을 약한 그룹의 자리로 바꾸어 넣어 보는 것이다. (ex. 백인을 비흑인으로, 기독교인을 비유대인으로 정의) -> 미러링이랑 비슷한 방법인 듯. (275)

 

 

V. 자긍심의 그릇

 

나는 일본 여행 중에서야 비로소 우리의 감각이 얼마나 강력하게 우리 몸 안에 살고 있는가를 깨달았다. 도쿄의 번잡한 거리를 걷고 있을 때, 전혀 다른 나라의 거리를 걷고 있음에도 갑자기 아주 안전하고 편안하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그 이유를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 원인을 알게 되었다. 평생 처음으로 나는 거리에 있는 대부분의 남자들보다 키가 컸던 것이다. 그런 차이점이 그렇게 중요할까 일부러 생각하기도 했다. 그걸 중요하게 여기면 여길수록, 나는 미국의 길거리에서 내가 얼마나 그런 점에 신경을 썼던가, 나 외에도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공공장소에서 자신들보다 큰 사람 사이에서 불안한 기분을 느꼈을까를 떠올려야 했기 때문이었다. (289)

 

린다 샌포드와 엘렌 도노반은 [여성과 자긍심]이라는 책에서 자신의 육체나 육체의 한 부분을 혐오스러워하면서도 나 자신을 좋아한다는 건 아주 힘든 일이다라고 말했다. 이 말을 뒤집어 하자면, 여러분이 정말로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면 자신의 외모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느낄 수 있고, 때로는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느낄 수 있으며, 나아가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느낄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다. (318)

 

성형 수술이 허위적이고 부끄러운 경우로 전락될 경우 자아상은 부정되고 자존심은 상하게 된다. 이와는 반대로 당당하게 성형 수술을 하고자 하는 행동은 자긍심의 상징으로도 볼 수 있다. (327)

 

VI. 로맨스와 사랑

 

[폭풍의 언덕]의 로맨스가 이토록 오래 살아있다는 사실은 이상할 것이 없다. 가부장적이고 성의 양극화가 극심한 문화일수록, 사람들은 로맨스에 더 중독된다. 그리고 그러한 이야기들은 우리의 통합되고자 하는 열망을 채워주기도 한다. 그런 로맨스는 흔히 재산이나 계급, 인종 같은 장벽에서 시작되고, 죽음이나 이별로 강해진다.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투영시키는 일은 그 거리가 떨어져 있을수록 쉽다. 그러니 로맨스가 서로의 거리가 가까워지고, 일상화되고, 친숙해지면 점점 약해지는 것도 그리 이상하지 않다. 누구도 자신만이 지니고 있는 독특함을 채워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은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더 로맨스를 필요로 하는 것도 이상할 것이 없다. 인간 품성과 자질의 대부분이 남성적으로 딱지가 붙여지는 반면, 극소수의 것들만이 여성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에 여성들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삶을 내어줘야 한다는 인식이 더 크다. (344)

 

당신은 자신이 약하다고 느낄 때, 혹은 자신을 좋아하지 않을 때 사랑에 빠질 수 있는가? 아직까지도 지금 이 로맨스만은 다를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신을 발견할 때가 있는가? 당신 인생의 결정들을 대신 결정해줄 미래의 파트너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가? 자신을 기쁘게 하고 발전시키기보다 어떻게 파트너를 기쁘게 하고 발전하게 할 수 있을까 생각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가? 로맨스가 없으면 과식이나 과음 같은 이상행동을 하는가? 이 같은 질문 중 어떤 것 하나에라도 라고 답한다면 당신은 아직도 어떤 고전 로맨스의 한 장면을 따라하고 있는 것이다. 술이나 담배처럼 로맨스도 중독될 수 있다. 그럼에도, 다른 중독 증세와 마찬가지로, 우리 대부분은 아직도 그 사실을 부인하며 살아간다. 우리는 아직도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은 어떤 것들을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낮은 자긍심을 갖고서는 남녀 모두 그들에게 부여된 성 역할을 과장하여 인정받으려 하고 거기에서 피난처를 찾으며, 성장하면서 오히려 더 불완전하게 된다. 남성의 경우 융통성 부족, 독단성, 경쟁심, 공격성, 여성적인 것과의 거리, 동성애 혐오증, 심지어는 잔인성과 폭력 등이 저조한 자긍심을 보여주는 고전적 표본이 된다. 그 반면 복종, 의존성, 남성의 인정을 필요로 하는 심리, 갈등에 대한 두려움, 자기 비난, 그리고 분노를 표현할 수 없는 무능 등은 여성의 낮은 자긍심을 보여주는 전형적 모습이다. (345)

 

자긍심은 로맨스를 시들게 하는가? 그렇다. 하지만 단지 현재의 형태에서만 그렇다. 결국 로맨스는 중요하기는 해도 부가적인 것이다. 우리가 지나치게 절실히 필요로 하지 않고, 환상으로 가득 차 있지 않고, 다른 누군가를 소유하려고 몸부림치지 않는다면, 로맨스는 아주 깊이 친밀하며, 감각적으로 공감하는 배움이 될 수도 있다. 로맨스는 우리에게 결여된 것이 무엇인지 말해주고 있으며 그에 대하여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가를 알려준다. 예를 들어 우리가 경험했던 개인적인 로맨스들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과거에 놓쳤던 것이 무엇이며, 성장하고 변화하기 위해서 무엇을 할 필요가 있는지 알 수 있다. (348)

 

천천히, 나와 분명히 맞지 않는 누군가에게 그렇게 끌리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났다. 내가 만약 신중히 조직된 그의 삶에 편안함을 느꼈다면, 내 안에서 그런 편안한 것이 필요했다는 뜻일 거였다. 그와의 단순한 놀이나 춤 같은 것들에 내가 끌렸다면, 나는 다람쥐 쳇바퀴 같은 바쁜 생활에서 내려올 필요가 반드시 있는 것이다. (351)

 

VII. 우리의 세계

 


 

자긍심은 결국 나 자신에 대한 긍정적인 해석과 받아들임, 진정한 자아 찾기와 관련되어 있다. 저널리스트의 글인데도 불구하고 구어체 형식이라 읽기 편했다. 글로리아 스타이넘의 다른 책들도 읽어봐야겠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