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
프롤로그
인터뷰이들은 아픈 상태에서도 수천 번 자기 경험을 곱씹고 재해석하며 성장했다. 이들은 가정폭력 혹은 성폭력의 피해자이지만, 동시에 피해를 고발하고 뭔가를 바꿔보려 한 생존자들이다. 이야기에는 모순과 혼란이 있다. 진공 속 피해자가 아닌 살아 있는 인간이기에 그러하다.
1부. 나의 고통에도 이름이 있나요
1장. 엄살
호르몬은 여성의 건강을 설명할 때 거의 만능 열쇠처럼 이용된다. 호르몬만을 강조할수록 그 밖의 원인들은 탐구하기 어려워진다. 여성의 우울, 그 원인을 에스트로겐으로 한정하는 설명은 우울을 경험하는 여성의 구체적인 사회문화적 맥락을 지워버린다. 정신의학 교과서에서 남성의 우울은 여성의 우울과 달리 성호르몬보다는 사회문화적 요인으로 설명된다. 남성의 몸이 표준이 될 때 아픈 것, 병리적인 것, 비정상적인 것은 남성 몸 바깥에 놓인 것이어야 한다. 여성의 우울은 그 원인이 여성의 ‘비정상’적인 몸 안에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곧 여성이 아픈 것은 ‘원래 그렇게 태어나서’이다.
언어화되지 못할 때, 고통은 심화된다. 여성, 사회 하층민, 농촌 거주자, 저학력자, 지능이 낮은 사람에게서 신체형 장애가 많이 나타나는 이유는 이들의 스트레스 관리 및 대처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들의 고통이 주류 학문의 담론으로 제대로 언어화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성의 고통을 엄살로 보는 역사는 유구하다. 더 안타까운 것은 고통을 인정받지 못하는 경험이 계속 반복되다 보면 스스로도 자신의 고통을 믿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2장. 진단
기존에는 의학적 문제로 여겨지지 않았던 증상들이 의학적 문제로 정의되는 과정을 ‘의료화medicalization’라고 부른다. 우울증은 알코올의존증, ADHD, 출산, 비만과 더불어 대표적인 의료화 사례이다.
당사자에게 진단이란 나의 우울이 병이냐, 병이 아니냐 하는 문제라기 보다 누군가 나의 고통을 알아주는가, 알아주지 않는가의 문제이다. 고통을 계속해서 호소하는데도 반응하지 않는 사회에서 오래 홀로 버티던 사람에게 누군가의 ‘알아줌’은, 그것이 설령 신자유주의 시대 감정 관리의 결과이며 다국적 제약회사의 자본주의적 책략이라 할지라도 소중한 것이다.(이전 내용에 멘탈관리도 자기관리라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압박과 다국적 제약회사에 의해 만들어지는 정신질환에 대한 내용이 있었음) 증상만 나아진다면, 고통만 경감된다면 무엇인들 못 할까? ‘알아줌’은 너무도 중요한 문제이다. 어쩌면 전부이다. 누군가를 죽고 살게 한다.
3장. 치료
DSM 진단 기준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환자도 알고 의사도 안다. 에밀 크레펠린의 후예들이 만든 것이 DSM이라면, 다른 대안을 제시한 학자들도 있었다. 20세기 초 미국의 전신과 의사 아돌프 마이어와 독일의 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정신질활에 관한 네 가지 치료적 관점을 제시하고, 이를 모두 고려하여 체계적으로 환자를 돕자고 제안했다.
1) 질병 disease 관점. ex) 치매/조현병을 뇌의 생리적 변화로 보는 것
2) 규모적dimensional 관점. 사람의 유전적(성격적) 특성에 따른 분포도로 설명
3) 행동 behavior 관점. 환자는 어떤 고통을 겪길래 특정 행동을 반복하는가?
4) 생애사 life story 관점. 고통받는 이유를 인생에서 우연히 마주해야만 했던 것들 때문
-> 인터뷰이 대부분이 어떤 특정 관점만 받아들이기보다 내가 아픈 곳, 내가 나인 것, 내가 행동하는 것 그리고 내가 겪은 것을 모두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자신의 질병을 대하고 있었음.
우울은 그게 어떤 종류의 생각이든 ‘나’를 향한 몰두와 관련이 있다. 자아가 강조되기보다 자아가 해체될 때, 그래서 중요한 문제가 아니게 될 때, 마음은 더 평온해 진다.
2부. 죽거나 우울하지 않고 살 수 있겠니
4장. 가족
반복되는 폭력은 유진이 온전히 행복할 수 없게 했다. 그래서 꾹꾹 눌렀다. 누워서 아무 감정도 느끼지 말자. 자신을 우울한 상태로 만들자. 누워서 아무 감정도 느끼지 말자. 자신을 우울한 상태로 만들자. 그러면 낙차가 생기지 않을 테니까. 유진은 우울한 상태로 있으려는 것이 생존 본능이었다고 말했다.
우울은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가 아니라, 감정이 전혀 분화되지 못하고 한데 뭉쳐 나를 난도질하는 상태이다. 우울증을 겪는 상태의 나는 화도 나지 않고, 기쁨도 느낄 수 없다.
유진은 엄마가 자신에게 실망하고 삶의 의미를 잃게 되는 것이 죽을 만큼 무서워서 아등바등 모범생으로 살았다.
‘착한 딸’을 우울증과 이렇게 연관시켰다. “여자아이는 정서 인식 발달을 저해받으며 자란다고 생각해요. ‘친절하다’, ‘사근사근하다’라는 말처럼 사회친화적인 모습을 보이도록 강요받죠. 그러니 분노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느껴도 이를 표현하지 못하는 진퇴양난의 상황이 일어납니다.” 분노가 내면으로 향하는 것이 우울이라고 말했다. 감정이 생기는 것은 막을 수가 없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상활일 때, 우리는 내 안에서 생겨난 감정 자체를 부인하게 된다. 어떤 것도 느끼지 않고 살아가야만 할 때, 무서움을 느끼는 데 남들은 무서운 것이 아니라고 말할 때, 감정을 느끼는 것보다 당장 누군가에게 맞지 않는 게 더 중요할 때, 폭력이나 학대로 감정을 느낄 여유가 없을 때, 감정을 느끼는 게 생존하는 데에 있어서 너무 거추장스러운 일일 때, 온전히 감정을 느끼는 게 너무 괴로운 일일 때...
우울증을 겪는 사람에게 주변인들이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묻자, 두 가지가 실은 같은 질문이라고 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사람의 감정을 수용하고 인정하는 것이다. 반드시 하지 말아야 할 것은 감정을 수용하지 않고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누군가 “나 너무 힘들어”라고 말했을 때 “그렇구나. 많이 힘들었구나”하고 말해주면 된다. “그 정도가 뭐가 힘드냐”, “나 때는 더 심했다”, “그만해”, “왜 그렇게 부정적으로 생각해?” 등등 다양한 말로 누군가의 기분이나 감정을 수용하지 않고 고통을 비교하거나 부정하는 것이 가장 해서는 안 될 일이다.
“너는 왜 그런 이야기를 아직도 하니?”, “이제 그만 잊어라”, “다 그렇게 산다”. 이렇게 자신의 감정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경험을 반복하다 보면 상처는 계속해서 깊어진다. 가족이니까 포기하기도 어렵다. 누구보다 인정받고 싶은,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들 아닌가. 오랜 시간 고통을 부정당하다 보면 중요한 순간에 더 이상 도움을 요청할 의지를 잃고 고립된다. 혼자 죽는 길을 택한다. 나의 감정이 인정받는가, 인정받지 못하는가. 이것은 사람을 죽고 살게 만드는 문제이다.
지현은 말했다. “욕심껏 살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정작 힘들 때는 스스로 해결했어요. 부모님한테도 얘기를 안 했는데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어요. 내 문제니까 내가 해결해야지. 누구한테 기대는 거 있잖아요. 그걸 못 했더라고요. 그러다 보니까 억울함 같은 게 생겨요. 가족한테 손을 내밀어도 (가족들은) 엉뚱한 리액션을 해요. 정말 기상천외한 반응들을 하죠. 내가 죽을 것 같아서 손을 내밀었는데 어처구니없는 반응이 오니까 얘기를 못 해요. 안 하는 거죠. 너무 슬프니까.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손을 내밀었는데 돌아오는 반응이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뭐 이런 게 다 있지, 싶은 반응이 오니까.”
가족 구성원 중에서도 엄마에게 가장 이해받고 싶지만, 엄마와의 대화는 늘 평행선을 달린다. 계속 시도하고 계속 좌절한다. 내 고통을 말하면 엄마는 자신의 고통을 말한다. 엄마 역시 내게 이해받기를 원하고 내게 자신의 감정을 해소하려 하기도 한다.
가부장적인 가정 안에서 엄마는 피해자이지만 동시에 가해자가 되기도 한다. “엄마는 피해자이면서 2차 가해자이죠. 여자들은 여성혐오를 안 할 거라는 착각을 하는데, 엄마들이 그 집에서 왜 버티고 있겠어요. 여성혐오로 똘똘 뭉쳐있고, 가부장적이기 때문에 버틸 수 있는 거라고요. 저 사람들은.”
정신질환과 모성애의 관계를 다룬 대부분의 연구는 여성혐오적인 시각을 가진 남성 연구자가 아니라, 당시 영향력이 있었던 여성 정신분석학자들에 의해서 시작됐다.
5장. 연애
“제 눈에는 다 동아줄이에요. 이 남자가 아무리 ○신 같아도 조금이라도 좋은 점이 있으면 그 부분만 보려고 해요. 살아야 하니까. 이게 내 희망일 수도 있으니까.”
가족에 관한 기억은 혼란스럽다.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이기에 그의 나쁜 점뿐만 아니라 좋은 면까지 모두 알고 있다. 방에 들어온 아빠는 억지로 지은을 껴안으며 뽀뽀를 하곤 했다. “5분만 껴안고 있게 해주면 뭐 사줄게.” 언젠가 한번은 술에 취해 혀를 집어넣기까지 했다. “자고 있는 저를 가만히 보더니 ‘지은아 네가 몸매가 좋다’ 이러는 거예요. 이게 뭐지? 이게 아빤가?”
데이트폭력, 성폭력을 반복적으로 겪는 이들도 많았다. 이런 악순환을 벗어나기 힘든 이유 중 하나는 지금 당장 곁을 지켜줄 누군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당장의 돌봄이 필요한 여자들은 돌봄을 제공해 주리라고 기대되는 연인을 찾거나, 이러한 연인이 접근하면 쉽게 마음을 연다. 많은 여자들이 비슷한 얘기를 했다. “한 번도 온전히 받아들여진 적이 없었는데 그는 나에게 너무나 잘해줬어요.”, “거의 아기처럼 받아줬어요”, “사랑이 너무나 필요했기 때문에 놓기 어려웠어요” 여자들은 돌봄이 필요해 연인 관계를 택했는데, 지나고 보니 도리어 자신이 돌봄을 제공해 주지 않으면 안 됐다.
여자들은 혼자 남겨지는 것이 너무 두려운 나머지 스스로를 지키거나 관계를 유지하는 것 중 하나를 택해야 할 때 종종 관계를 선택하곤 했다. 나를 바꿔야만 그가 내게 머문다면, 기꺼이 나를 바꾼다. 욕망을 숨기고 분노를 누르고 고통을 견딘다. 그렇게 점차 관계 속에서 나는 지워진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이야기를 내가 수행하면서 살게 된다. 그러다 어느 날, 어떤 여자들은 이 모든 것을 뒤엎는다.
칼리는 자신이 느끼는 우울감이 사실 세상에 대한 분노였던 것 같다고 말했다. 부당한 세상에 대한 분노, 나에게 공감하지 않는 세상에 대한 분노. 내가 무엇 때문에 분노하는지 명확히 언어화하지 못할 때, ‘우울증’이라고 이름 붙은 증상이 찾아왔다고 했다.
연애 관계는 여성이 대접받을 수 있는, 소중한 사람으로 여겨지는 몇 안 되는 경험이다. 가족 안에서도 회사 안에서도 받기 힘들었던 인정의 감각을, 연애는 준다. 섹스는 ‘누군가 나를 간절히 원한다’라는 감각을 준다. 그 순간만큼은 나는 이 세상에 반드시 필요한 존재이다. 죽으면 아쉬운 존재이다. 매력과 관능은 권력처럼 휘둘러져, 마치 내가 이 관계를 통제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이것은 대단히 일시적이며 허구적인 힘이다. 세상은 젊은 여성을 팜 파탈femme fatale처럼 그리지만, 팜 파탈은 절대 일상의 영역에 침투할 수 없다. 팜 파탈은 승진하거나, 책을 내거나, 법을 제정하는 존재가 아니라, 랑데부를 위해 어두운 침실에서 대기하는 존재이다. 우리는 스스로 되물을 필요가 있다. 내가 바라는 인정의 감각은 정확히 정체가 무엇인가?
마지막 질문은 이것이다. 사랑이 구원이 될 수 있을까. 나는 그렇다고 말하고 싶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을 받을 때가 아니라 줄 때, 우리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 구원의 대상이 아닌, 구원의 주체가 될 때만이 사랑은 구원이 된다. 나를 구원하는 것은 나 뿐이다. 사랑하는 대상이 꼭 인간일 필요는 없다. 동물일 수도 있고, 글쓰기와 같은 행위일 수도 있다.
6장. 사회
이삼십 대 여성은 도대체 왜 우울할까. 김새론 연구활동가는 “이삼십 대 여성은 사회가 요구하는 규범과 스스로 추구하는 가치 사이의 균열이 가장 큰 세대, 그래서 추락하기도 쉬운 세대”라고 봤다. 이삼십 대 여성은 더 교육받은 세대이고, 더 깨친 세대이지만, 과도기 단계에 놓인 세대이기에 막상 현실에서 스스로 기대하는 수준의 삶을 꾸리기는 어렵다.
3부. 이야기의 결말을 바꿀 수 있다면
7장. 자살
삶을 지속하는 일이 너무도 피로하게 느껴질 때마다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정확히 말하면 애써서 살아야 할 의미가 무엇인지를 찾지 못해서였다. 마음속 공허감을 참기 너무도 어려웠다.
자살이 의료화되고 우울증과 연결되면서, 결국 개인적인 치유 문화의 논리 안에서만 설명되기 시작했다고 지적한다. 한 사람의 죽음과 관련된 공적, 정치적 내용이 텅 비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한 사람의 자살을 우울증의 결과로만 치부하는 것은, 어쩌면 그것이 가장 간편한 해결책이기 때문일 것이다. 자살의 원인이 공동체의 문제라면 함께 풀어가야 하지만, 개인의 우울증이라면 그것은 자살자 본인만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 ‘힐링’은 이제 개인의 몫이 됐다. 그것도 돈을 주고 소비해야 하는 상품과 서비스로서의 ‘힐링’이다. 이러한 관점이 무서운 이유는 무엇보다 이 일련의 과정이 자발적으로 추동된다는 점에 있다. 스스로의 자유와 행복을 증진하기 위해서 우리는 정치에 참여하거나 공동체를 꾸리거나 관계 내에서 돌봄을 주고받기보다는 PT를 끊고, 1회에 10만 원이 넘는 임상심리 상담을 받고, 항우울제를 먹고, 원데이 클래스 힐링 글쓰기 수업을 듣는 쪽을 기꺼이 선택한다.
8장. 돌봄
돌봄은 또한 침범이어서 어렵다. 돌보기 위해서는 타인의 삶에 관여해야만 한다. 선을 넘는 순간이 생긴다. 어디까지가 돌봄이고, 어디서부터는 폭력일까?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을 억지로 얼마나 말릴 수 있을까. 당사자가 원망한다면? 그래서 관계가 끊어진다면? 돌봄은 때때로 의도와는 다른 결과를 가져온다. 본질적으로 양가적이고, 맥락적이고, 관계적이다. 돌봄은 사랑, 양육, 친절, 다정과 같은 속성과 자주 연결되지만, 현실의 돌봄은 불안, 상처, 억울함, 분노, 증오와 같은 속성과도 밀접하다. 완벽한 돌봄을 하려고 하면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
돌봄의 과정에서 매번 발생하는 시행착오를 실패로 여기지 않기 위해서는, 돌봄을 해왔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세상에 널리 알려질 필요가 있다. 돌봄을 제공한 사람들은 마음속에 말이 가득 고여도 침묵하기 쉽다. 자신이 가장 아픈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렇게 많은 돌봄 제공자들이 홀로 말을 삭여왔다.
내 안의 상처를 언제, 어떻게 꺼내는지도 되게 중요하다. 안정적인 가정을 일구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났다고 그간의 상처가 바로 회복되는 게 아니다.
이야기를 일부러 꺼내는 이유가 있다. 얘기할 수 있는 분위기가 만들어져야 하는 거다. 그러기 위해서는 고백이 많아야 한다. 우리 얘기를 꺼내놓으면 조금 더 힘든 상황에 놓인 누군가를 살릴 수도 있다.
돌봄은 받는 사람과 돌봄을 주는 사람 사이에는 필연적으로 권력관계가 형성된다. “돌보는 사람이 감시자가 되면 안 된다” 예를 들어 내가 자해할 때, 이 사람이 내가 자해하려는 것을 막아선 감시자인지, 아니면 나를 보호하려는 보호자인지, 그걸 가르는 건 진짜 한 끗 차이다. 어떻게 결정되냐면 이 사람이 지금 나한테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는가. 거기서 갈린다. 예를 들어 화를 낸다거나, 왜 그랬냐고 답답함을 토로한다거나, 뭔가를 가르치려 드는 경우에는 그 사람을 감시자로 보게 된다. 반대로 굉장히 침착하게 대처를 한다거나 ‘그래도 나는 너를 믿어’라는 걸 변함없이 보여줄 때, 이 사람은 저의 보호자가 된다. 혹시라도 이 글을 읽게 될 누군가에게 ‘꿀팁’을 전하자면 일단 잘 못 하겠으면 “미안하다”로 말을 시작하는 거다. “나는 너를 막을 수밖에 없다. 이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어서 미안하다”라고. 두 번째 팁은 평소의 그 사람과 자해하려는 그 사람을 분리하는 거다.
여성 남성 구도에도 적용되지만, 내가 경험하지 않은 상처를 가진 친구들을 어떻게 공감한다고,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상처를 (쉽게) 이해하는 건 (어떤 의미에서는 당사자가 가진 고통의) 고유함이 존중되지 못하는 일이기도 하다.
함께하는 감각과 소외감을 어떻게 동시에 느낄 수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이런 양가적인 감정이 돌봄의 본질이 아닌가 싶다.
질병, 아픔, 고통을 지워야 할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야 할 것으로 다시 받아들이는 것처럼, 돌봄의 과정에서도 우리는 다양한 갈등과 미움, 질투와 억울함 등을 지우고 부정하기보다는 함께 머무르며 나아가야 한다. 돌봄은 언제나 종착지가 아니라 과정에 있다.
9장. 회복
내가 만난 여자들은 대체로 자신의 고통을 말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른 사람들이었다. 고통을 말할 수 있다면, 고통을 회복하는 과정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트라우마를 유발한 핵심 기억에 다가갈수록 언어화하기 힘들어하는 경우도 있었다. 기억이 지워졌거나 파편화되어 있기도 했다. 고통의 한가운데에 있을 때는 세상과의 연결이 단절되고 옳고 그름, 건강한 거리감 등의 감각이 무너진다. 머리에서 느끼기 전에 몸에서 먼저 반응한다. 마치 그 사건을 경험한 순간으로 되돌아간 것처럼.
고통에 관한 다양한 이론이 있지만, 핵심은 비슷하다. 치유를 위해서는 먼저 ‘안전하다’라는 감각을 회복해야 한다. 그다음, 언어를 통해 지나간 고통의 기억을 애도하고 통합하여, 고통이 파괴한 것과 가르쳐 준 것 모두를 간직한 채로 나를 새롭게 재창조해야 한다. 무엇보다 안전하다고 느껴야 한다. 또한 고립되지 않아야 한다. 타인과, 나아가 공동체와 연결되어야 한다. 자신의 고통을 ‘엄살’로 보지 않는 공동체에서 사회적, 정서적 지지를 충분히 받아야 한다. 편애를 받아야 한다. 이야기를 털어놓고, 이를 들어주고, 또 믿어주고, 서로가 연결되며 혼자가 아님을 알게 되고, 여러 자원을 통해 고통에 이름을 붙이고, 억울함이 어디서 기인했는지를 알고, 나아가 이것을 개인적인 차원이 아니라 사회적인 차원에서도 ‘중요한’ 고통으로 만들며 스스로 자신의 고통에 다시 이름을 붙이는 과정까지. 이 작업의 전체 과정이 내가 스스로 회복하는 과정이었다. 누구도 대신 해주지 않아 나와 같은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한 일이었다.
지금보다 덜 고통스럽고 더 행복한 삶을 살고 싶어 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 애쓸 것이며, 그게 나와 잘 어울린다는 마음을 먹어야만 한다. 이것은 대단히 어렵고 엄청나게 두려우며 또한 결정적인 선택이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과거 자체는 바꿀 수 없지만, 현재와 미래는 조금씩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고통의 기억은 지워지지 않겠지만, 이야기의 결말은 아직 맺어지지 않았다.
“예전엔 무력하고 초라한 나를 미워했지만, 이제는 약자인 내가 아니라 부당한 권력과 시스템을 미워하고 항의하기로 했어. 난 살아남아서 해낼 거야. 인생 한 번인데 자살로 끝낼 수는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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