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나를 함부로 대할까>
프롤로그: 스스로 가혹하게 대하고 후회하는 당신에게
1장 자기에게 말 걸기 나는 왜 나를 이렇게 대하는가?
1. 아무것도 안 하는 꼴을 못 본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을 때에는 어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 지나치지만 않는다면 그 시간은 고스란히 휴식이 된다. 애쓰지 않는 시간이 있기에 하고 싶은 것도 생길 수 있고, 해야 하는 것도 해나갈 수 있다.
그렇게 보면 의미 없는 시간은 없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조차 무언가를 한 것이다. 자기를 착취해 가면서까지 해야 할 중요한 일은 세상에 없다. (22)
2. 그녀가 칭찬을 못 받아들이는 이유
칭찬을 사양하는 것은 겸손이 아니다. 칭찬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은 자기를 칭찬할 줄도 모른다. 받을 자격이 없는데 어떻게 줄 수 있겠는가. 자기의 좋은 점을 인정하고 칭찬하는 것은 오만함이 아닌 건강한 자부심이다.
우리는 오만함이나 우월감에 빠지지 않으면서 우리 자신의 좋은 점에 대해서 관찰하고 인정하고 발달시킬 수 있다. 특히, 자기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단점과 장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다면 자기 칭찬은 오만함이나 우월감으로 흐르지 않고 자기성장으로 이어진다.
이는 자기친절의 중요한 기준이다. 자기 장점을 인정할 수 있을 때 다른 사람의 장점을 인정할 수 있다. 자기가 잘한 것에 대해 칭찬할 수 있을 때 다른 사람이 잘한 것 또한 칭찬할 수 있다. 스스로를 존중할 수 있을 때 모두를 존중할 수 있는 법이다. (27)
3. 바보야,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지
그러나 한번 생각해 보자. 이렇게 얼어붙어 버리는 것이 비난받을 일일까? 긴장성 부동은 유아동기 때 상처가 치유되지 못하고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성인이 된 지금에는 적절하지 못한 대응이지만 유아동기에는 그렇게 행동했기 때문에 덜 다치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트라우마나 범죄 희생자들은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의 트라우마 반응도 용납을 못 하지만 과거에 얼어붙어 버렸던 자기에게도 계속 벌을 준다.
‘너는 그때 다르게 행동해야 했어.’
그러나 우리는 그 당시에 다르게 행동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본능적으로 부여된 신경계의 자기보호본능이다. 신경계는 우리의 생존을 위해 존재한다. 어떻게든 몸을 돕고 살리려고 할 뿐이다. 그 덕분에 우리는 참혹한 경험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고 생존할 수 있었다.
물론 얼어붙는 반응을 계속 반복해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심하다면 치료가 필요하다. 다만, 치료의 과정에서도 중요한 것은 그런 자신에게 연민의 마음을 보내고 이해하는 것이다. (31)
4. 당신이 원하는 대로 살지 않을 거야
문제는 타인의 기대뿐 아니라 자신의 기대에 대해서도 저항한다는 점이다. 이들은 자기를 잘 돌보지 않고, 되고 싶은 것도 이루고 싶은 것도 없이 살아가기 쉽다.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과 밀착되어 있기에 자신을 잘 챙기는 것은 상대를 위하는 것이 되어버리고, 반대로 자신을 함부로 대할수록 상대에게 복수를 하는 것이 된다.
그는 상담을 통해서 자기 안의 분노와 반항심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는 자기 삶을 방치할수록 그 원인 제공자인 상대의 책임은 더욱 커진다고 느끼고 있었다. 뒤늦게 그는 자신이 여전히 부모와 융합되어 있음을 자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반항심에 담긴 진정한 자기 욕구에 주목하게 되었다.
그가 진짜로 원하는 것은 결국 자기 삶을 살아가는 것이었다. 부모의 기대대로 살아가는 것도 아니고, 부모의 기대에 반대하며 살아가는 것도 아닌 자기 욕구에 충실한 삶을 말이다. (35)
5. 자기에게 너무 몰두되어 있는 사람들
중요한 것은 자아의 기능을 잘 활용하되 그 함정에 빠지지 않는 것이다. 내부세계와 외부세계의 균형과 유연한 초점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여야 할 때 주의를 기울이고, 외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때 외부에 주의를 기울이는 스위치가 잘 작동되어야 한다. 즉, 자아의 스위치를 켜고 끌 수 있는 능력을 필요로 한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이는 자신과 관련된 생각을 안 하겠다고 결심한다고 해서 되는 것은 아니다. 외부세계를 반영하는 신체적 자아 즉, 감각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중요하다. 감각이 살아나면 우리의 생각은 완화되고 세상과 연결되며 지금을 살아가게 된다. (41)
6. 나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 너만 잘된다면!
안타깝게도 희생적인 부모 아래에서 자란 자녀는 행복할 수 없다. 희생적인 부모는 늘 자녀의 행복을 원한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이들은 자녀 고유의 행복에는 관심이 없고, ‘자기가 살지 못한 삶’을 자녀가 살아가길 바랄 뿐이다.
자녀들은 부모의 희망이 되어 그들의 기대대로 삶을 살아가거나 아니면 그 답답함을 견디지 못하고 그 기대에 맞서 일탈과 투쟁을 벌인다. 순응이든 저항이든 공통적인 것은 이들은 자기가 원하는 삶을 살아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행복의 주체가 되지 못한다. 더 큰 문제는 자기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부모에게 사랑과 안타까움을 느끼면서 동시에 질식감과 분노를 함게 느낀다는 것이다. (45)
7. 모두 다 나를 싫어해
8. 나는 처음부터 잘못된 존재인가
우리는 자기 부족함 때문에 부정적인 자아상을 가지게 된 것이 아니라, 부정적인 자아상 때문에 자기 부족함에 집착하는 것이다. ‘내면화된 못마땅한 시선’을 거두어내지 않는 한 내적 평화는 찾아오지 않는다. 자신을 끝없이 몰아붙인 결과가 자신의 근원적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구렁텅이로 빠뜨렸다는 사실을 깊이 자각할 때 그때서야 비로소 삽질을 멈추게 된다. 그리고 다시 이 질문을 맞닥뜨릴 것이다.
‘나는 왜 나를 이렇게 대하는가?’
이러한 고질적인 자기비난의 습성을 약화시킬 수 있는 것은 진실뿐이다. 자기비난은 문제나 결점을 실제보다 확대시키고, 미래로 확장시키고, 문제를 존재와 일치시키려고 한다. 그러므로 자기비난이 들리면 우리는 무엇보다 진실을 살펴보아야 한다. ‘정말 그런가?’를 물어야 한다. ‘내가 정말 실패자인가?’ ‘정말 해도 안 되는 것인가?’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이 정말 없는가?’ ‘나라는 존재는 처음부터 잘못된 것인가?’라고 말이다.
자신에 대한 느낌과 생각에 대해 의문을 품고 질문을 던지는 것! 그것은 자신과의 관계를 재정립하기 위한 출발점이다. 이제 이 질문을 당신에게 드리고자 한다. 자신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기를 원한다면 당신은 이 질문을 놓지 말아야 할 것이다. (57)
2장 자기와의 관계 이해하기 왜 스스로를 괴롭히는가?
우리가 자신을 심하게 괴롭히는 가장 큰 이유는 아물지 않은 상처 때문이다. 상처 난 마음과 건강한 마음은 그 구조와 작동방식이 다르다. 상처 난 마음은 수치심, 죄책감, 무력감이라는 핵심 감정을 형성하고 그에 바탕을 둔 부정적 신념을 형성하게 된다. ‘나는 근본적인 결함이 있어!’라는 자아상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이를 인정하고 살아가는 것은 쉽지 않기에 방어기제로 ‘이상화’를 선택한다. 자기를 구원해 줄 수 있는 이상적인 대상을 찾거나 스스로 이상적인 사람이 되어 자기 문제를 모두 해결하기를 바라게 된다. 하지만 그러한 이상은 현실과 자기 자신에 바탕을 두지 않는 완벽에 가깝기에 이들은 더 깊은 자기비난의 수렁에 빠지게 된다. (59)
1. 수치심 발작 그냥 숨고 싶어
애착은 아이에게 생존의 과제이기 때문에 애착손상이 되면 아이는 생존에 위협을 느끼며 아이의 신경계 발달에 손상을 일으킬 만큼 독성 스트레스로 작용한다. 사랑과 보살핌을 받아야 할 아이가 양육자로부터 반복적인 거절이나 방임 혹은 학대를 당할 때 아이는 자기 존재가 잘못되었다고 느끼게 된다. 이것이 바로 원초적 수치심이다.
원초적 수치심은 평생을 따라다니는 감정이다. 다른 감정들은 구름처럼 생겼다가 사라지지만 이 감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것이 유년기의 수치심이 바탕감정으로 굳어지는 이유이다. 바탕감정이란 도화지의 각기 다른 바탕 색깔처럼 마음을 채색하는 핵심 감정을 말한다. 이는 한 사람의 감정 양식, 자존감, 대인관계 방식 등에 큰 영향을 미친다. 아동기의 부정적 경험이 많을수록 ‘수치심’ ‘죄책감’ ‘무력감’이라는 바탕감정이 만들어진다.
이러한 바탕감정은 자기와의 관계에 깊은 흔적을 만든다. 마치 영혼에 새겨진 문신과도 같다. 즉, 원초적 수치심은 자기감을 기형적으로 비틀어놓는다. ‘나는 처음부터 잘못되었다’ 혹은 ‘나는 모든게 잘못되었다’라는 부정적 믿음을 만드는 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낮은 자존감’의 가장 중요한 원인이 바로 원초적 수치심에 있다. 그러므로 원초적 수치심을 치유하지 않는 한 아무리 많은 성취를 이루어도 인정을 받아도 자존감 훈련을 해도 자존감은 본질적으로 회복되지 않는다. 원초적 수치심을 지닌 사람은 늘 문제와 존재를 구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들은 작은 실수나 잘못에도 걸핏하면 자신을 ‘잘못된 존재’라고 느낀다. 살면서 어떤 문제가 생기면 이들은 ‘어떤 문제가 생겼어’가 아니라 자동적으로 ‘난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어’ ‘결국 내가 문제야’라는 느낌에 휩싸이고 마는 것이다. (63)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공황장애는 사실 죽을 것 같지만 절대 죽지 않는 병이다. 그 공포는 실재하는 위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두뇌 경보체계의 오작동이기 때문이다.
수치심 발작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잘못된 존재’라는 그 느낌은 사실이 아니다. 당신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잘못된 경험에서 비롯된 마음의 상처인 것이다. (64)
2. 애착손상 사랑받고 자랐는데 애정결핍이라니!
3. 아동기 부정적 경험 어린 시절의 불행이 내 발목을 잡는다
4. 비합리적 기본믿음 난 아무것도 아니야
유년기에 만들어진 자기, 사람, 그리고 세상에 대한 믿음을 ‘기본믿음’이라고 말한다. 이를 자기관, 인간관, 시계관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이 기본믿음은 마음의 틀이 된다. 자라면서 있는 그대로 보고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기본믿음에 부합되는 것 위주로 선택적으로 지각하고 수용하게 되는 것이다. 즉, ‘난 쓸모없는 사람이야’라고 한다면 자기의 부족한 면만을 보고, ‘사람은 믿을 수 없어’라고 한다면 다른 사람들의 신뢰할 수 없는 면만을 보고, ‘삶은 불공평해’라고 한다면 세상의 불공평한 부분만을 주목하게 된다.
그렇기에 그러한 기본믿음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강화되고 바윗돌처럼 굳어지게 된다. 이는 영혼 깊숙이 침투되어 문신처럼 새겨진다. 아무리 주위에서 ‘넌 괜찮은 사람이야’라고 이야기해줘도 그 문신은 잘 지워지지 않는다. 아동기 트라우마는 그만큼 삶에 큰 영향을 미친다. (78)
5. 완벽주의 언제까지 더 나은 내가 되어야 해
많은 경우는 어릴 때부터 자신이 괜찮은 사람임을 타인으로부터 확인받으려는 인정강박을 지니게 된다. 이를 위해서 ‘나는 ~해야 한다’ 혹은 ‘나는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높은 기준과 지나친 당위를 만들어낸다. 당위란 ‘당연히 그렇게 하거나 되어야 하는 것’을 말한다. 마음의 상처를 입은 이들일수록 당위적 사고가 많다.
이들은 자기가 어떤 상태인지 자기가 어떤 욕구를 가지고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를 이해하는 데는 관심이 없다. 자기가 괜찮은 사람임을 입증하기 위해 스스로를 늘 성과와 능력을 보여주는 도구로 만들어버린다. 그리고 이를 위해 끊임없이 채찍질을 가한다.
이러한 완벽주의와 이상적 자아상은 수치심, 죄책감 그리고 무력감에 대한 ‘이상화’라는 심리적 자기방어의 결과이다. 그런데 자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만들어낸 이상적 자아가 오히려 문제를 더욱 악화시키고 만다. 자기가 세워 놓은 높은 기준에 부합되지 못하는 상황과 수시로 마주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기의 작은 실수, 약점, 실패 따위가 드러났을 때 심한 수치심을 느끼고 자신을 용납할 수도 돌볼 수도 없게 된다. 이상과 현실의 불일치 앞에서 이들의 선택은 자기비난이다. 더 잘하기 위해 자신을 후려치는 것이다.
물론 발짝 효과가 있다. 그러나 이런 일이 반복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자기비난의 채찍질은 일시적으로 효과를 보이는 것 같지만 결국 독이 되고 만다. 파멸로 치닫는다. (81)
6. 자기조율의 실패 내 기대대로 되기를
누구나 이상과 현실의 차이에 힘들어한다. ‘지금의 나’와 ‘바라는 나’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는 것이 바로 인간이다. 이 ‘자기불일치’야말로 인간의 숙명이고 본질이다.
인간은 이 불일치 때문에 절망에 빠지기도 하지만 반대로 발전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이 불일치를 조율하여 자기발전으로 나아가느냐이다.
이 자기불일치에 따른 자기조율의 실패가 바로 완벽주의이다. 완벽주의는 이상과 현실의 조율이 되지 않는 만성적인 ‘자기부조화’ 상태를 말한다.
이러한 자기조율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들이 있다. 바로 트라우마가 있거나 신경증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절대적인 이상에 집착하거나 반대로 아무런 이상도 품지 못한다. 물론 둘 사이를 오갈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뜻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다시 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일치도 분열도 아니다. 통합일 뿐이다. 자기돌봄이란 바로 자기의 모든 부분과 관계를 맺고 연대해 나가는 것을 말한다. (87)
7. 감정소진 가짜 미소로 나를 속이다
8. 상처 난 마음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다
상처 난 마음은 건강한 마음과 작동방식이 다르다. 간단히 이야기하면 ‘3P+1F’의 특징을 지닌다. 3P는 ‘개인화Personalizadion’ ‘일반화Pervasiveness’ ‘영속화Prepetuation’를 말한다. 개인화는 모든 문제나 사건을 자기와 관련지어 생각하는 것을 말하고, 일반화는 부분을 전체로 확대시키는 것을 말한다. 영속화란 어떤 일이나 특성이 변함없이 지속될 거라고 보는 것이다. 1F는 융합Fusion을 말한다. 융합은 마음에서 떠오르는 생각이나 감정을 사실화시키는 것을 말한다. 즉, 3P로 인해 어떤 일이 생기면 다 나 때문이고(개인화), 모든 게 문제이고(일반화),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영속화)이라고 생각할 뿐 아니라 1F로 인해 그런 생각과 느낌을 사실이라고 믿게 된다. 그러니 그 마음 상태에서 헤어 나올 수가 없다. (96)
3장 자기와 친구 되기 힘들 때조차 나에게 친절할 수 있기를
다행히 성인애착과 회복탄력성에 대한 연구를 보면 희망적이다. 인생 초기의 애착손상과 낮은 회복탄력성이 평생 따라다니는 것이 아니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를 ‘획득된 안정성’이라고 한다. (101)
1. 나의 부모는 나를 어떻게 대했는가
인간의 학습능력은 2단계로 발달한다. 거칠게 이야기하면 유아동기에는 모방적 학습이 이루어지고, 청소년기 이후로는 비관적 학습이 이루어진다. 유아동기는 비판이나 선택기능이 없는 일방적 모방에 가깝다. 양육자가 자기를 대하는 방식을 그냥 무비판적으로 흡수하여 자기와의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일방적 모방과 흡수를 심리학에서는 ‘내사’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므로 양육자의 방임과 학대는 고스란히 아이에게 내면화되기 쉽다. 양육자의 시선, 표정, 말투 그리고 말의 내용까지 그대로 자기와의 관계에 적용된다. 그렇기에 자기가 힘들어하거나 잘못했다고 느껴지면 양육자가 그랬던 것처럼 ‘넌 왜 그 모양이냐!’ ‘왜 징징거려!’ ‘꺼져!’라고 자기를 방임하거나 학대한다. 힘들어하는 자신에게 최소한의 연민조차 품지 못한다. 그냥 함께 있다는 것 자체를 견디지 못한다.
만약 방임이나 학대 경험으로부터 완충작용을 해줄 또 다른 환경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내면화된 자기학대에서 벗어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런 탓에 자살이, 끝없이 이어지는 자기학대의 고통스러운 관계를 궁극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105)
2. 심리적 베이스캠프, 안전기지
3. 의지할 중간대상이 필요하다
4. 조건 없이 믿어줄 한 사람
논문에 의하면 불안정 애착에서 획득된 안정 애착이 된 이들은 그 이유로 긍적적인 관계경험과 자기성찰 등을 꼽았다. 당신이 배우자, 친구, 잔, 스승, 상담가, 지지그룹, 초월적 존재 등 인생에서 ‘의미 있는 누구’를 만나 교정적인 관계를 경험하고, 자기성찰과 자기친절의 훈련을 통해 ‘내면의 벗’이 되어준다면 우리는 자신의 애착유형을 바꿔갈 수 있다. 상처의 대물림을 끊어낼 수 있다. (116)
5. 만들어진 채로 살 것인가 만들어가며 살 것인가
어떻게 쉰 살이 넘을수록 행복해질 수 있을까? 가장 큰 이유는 자기수용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젊을수록 우리는 다양한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지 않고 ‘나는 이런 사람이어야 한다’는 특정한 자아상에 집착한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자신을 받아들인다. 그것은 자신이 마음에 들어서가 아니다. 마음에 드는 나도 마음에 안 드는 나도 모두 자신임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자기를 받아들이게 되면 내적평화와 함께 삶의 변화가 시작된다. 자기 안에 있었지만 발휘되지 못했던 가능성들과 만나고 자기 인생을 살아가고 싶은 욕망이 솟아난다. (123)
6. 자기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는가
진정한 이타심은 높은 차원의 이기심이다. 굳이 구분하자면 낮은 차원의 이기심은 ‘자기만’ 위하는 것이라면 높은 차원의 이기심은 ‘자기도’ 위하는 것이다. 한 글자 차이지만 그것은 삶에서 큰 차이로 드러난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낮은 차원의 이기심이고, 발달시켜야 할 것은 높은 차원의 이기심이다. 높은 차원의 이기심이 바로 자기친절 혹은 자기사랑이다. (126)
7. 내 안의 것들을 존중하기
‘나-너’의 만남은 상대를 자기 경험과 기대에 의해서 재단하지 않고 상대를 개별적 존재로 존중하는 것을 말한다. 이에 비해 ‘나-그것’ 방식은 일방적 관계를 말한다. ‘그것’은 한 인격체로서의 고유성을 잃고 ‘나의 경험과 기대가 투여된 이미지로서의 대상’을 말한다. 즉, ‘나-그것’의 관계에서 상대는 나의 기대와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수단으로 전락한다. 이 관계에서 존재와 존재 간의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고 상대는 목적이 아닌 수단의 ‘그것’으로 규정된다. 결국 ‘나-그것’의 관계방식은 판단하고, 논쟁하고, 통제하는 관계가 되고 만다. (131)
8. 스스로 내면의 벗 되어주기
자기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자기를 비난하고 혐오하는 이들은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를 쓴다. 자기가 사랑할 수 있는 자기가 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일 수도 있고, 혹은 비난이나 혐오 자체를 끊어내려고 애를 쓸 수도 있다.
그것은 말이 노력이지 기나긴 자신과의 투쟁이다. 다른 자기가 되고자 자기 마음을 통제하고 바꾸려는 끝이 없는 싸움의 연속이다. 그러나 몇 번의 전투는 승리할지 모르지만 전쟁은 실패하고 만다. 결국 지쳐 쓰러지고 만다. 어떠한 노력도 이제는 의미 없다고 느낀다. 이제는 더 이상 자신에게 어떤 기대도 하지 않겠다고 깊은 좌절에 빠진다.
놀랍게도 그러한 바닥에서 반전이 일어나는 경우가 있다. 자기와의 싸움이 끝나고 자신과의 화해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 순간, 자기를 바꾸려고 애쓰기보다 자기를 돌보려는 방향으로 에너지의 흐름이 바뀐다. 나중에 친절하고 사랑을 베풀겠다는 마음에서 지금 친절하고 사랑을 베푸는 것이다. 자기가 바라는 그 돌봄과 사랑을 자기 자신에게 건네는 것이다. (135)
우리는 바뀔 수 있다. 부실한 안전기지를 튼튼한 안전기지로 만들어 갈 수 있고, 오랜 자기비난의 습관에서 벗어나 자기에게 좋은 벗이 되어줄 수 있다. 단, 자기 문제를 인정하고, 그 문제를 이해해야 하며, 그 문제의 해결을 위해 충분한 시간을 갖고 노력해야 한다.
그 꾸준한 노력은 자기 투쟁이 아니라 자기돌봄이다. 자기돌봄의 구체적인 방법이 자기연민, 마음챙김, 친절한 자기대화이다. 이 세 가지를 꾸준히 실천하면 우리는 자신의 벗이 되어줄 수 있다. 획득된 안정성에 도달할 수 있다. (136)
4장 자기연민 사랑한는 사람을 돌보듯이 나를 돌보라
1. 관계가 가까울수록 기대는 커진다
2. 연민, 그 최고의 공감
3.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4. 심리적 조망권을 확대하기
치유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기보다 문제를 새롭게 바라보는 것에 가깝다. 자기 생각이나 관점에 사로잡혀 상황이나 문제를 바라보는 것에서 벗어나 새로운 생각이나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이를 ‘재구성’ 혹은 ‘재평가’라고 한다. 이는 부작용 없는 안정제와 같다. (154)
5. 자기동정에 빠지지 않기
힘들 때 자기를 돌보려면 자기연민의 마음이 꼭 있어야 한다. 모든 행동은 감정에 바탕을 둘 때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자기동정과 자기연민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자기동정은 고통의 보편성을 망각하고 이 세상에서 가지만이 그 고통을 겪는 불쌍한 사람처럼 느끼는 것을 말한다. 이는 ‘나만큼 힘든 사람은 없어’라는 생각으로 이어져 자신을 고립시키고 신세 한탄과 세상에 대한 원망에 빠지기 쉽ㄴ다.
그에 비해 자기연민은 자기 고통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을 갖고 그 고통을 이해하고 진정시켜주는 진짜 위로를 건네는 마음을 말한다. 이는 다른 사람과의 연결을 촉진하고 고통을 돌보고 치유하는 행위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자기 고통에 대해 자기연민을 갖는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친구의 고통에 대해 연민의 마음을 갖는다면 그 고통을 차분히 들어주고, 그 친구를 위해 도움을 베푸는 것처럼, 자기 고통에 귀 기울이고 고통을 위로하려고 할 것이다. 그 위로의 방법은 다양하다. 자기 감정에 공감해 주는 것은 물론 명상, 요가, 독서, 산책, 가드닝, 요리, 뜨개질, 반신욕 등 자기를 진정시키고 편안하게 돕는 활동이다. (157)
6. 내가 고통에서 벗어나 편안하기를
존중, 자비, 친절, 사랑, 공감 등 우리가 살아가면서 길러야 할 많은 미덕이 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미덕이라도 그 미덕이 자기를 제외하고 타인에게만 향한다면 이는 신경증이라고 할 수 있다. 남들에게는 친절하지만 자신에게는 유독 불친절한 이들이다. 그에 비해 건강한 사람은 미덕을 베푸는 대상에 자기를 포함시킨다. (161)
7. 누구나 아플 수 있는 권리가 있다
8. 나를 안아주고 토닥여주기
그렇다면 따뜻한 손길을 받지 못한 사람은 어쩌란 말인가? 어떻게 미주신경 긴장도를 활성화시킬 수 있을까?
가장 대표적인 것이 ‘느린 호흡’이다. 우리가 스트레스를 받으면 교감신경이 항진되어 자기도 모르게 호흡이 짧아진다. 명상을 통해 느린 호흡을 하는 것도 좋지만 입술을 오므려 ‘호’ 혹은 ‘후’ 하며 내쉬는 숨을 조금 길게 하는 연습 정도만 해도 좋다.
두 번째 방법은 미주신경이 성대와도 연결되어 있어 자주 흥얼거리거나 노래를 부르는 것도 미주신경을 활성화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
세 번째 방법은 연민심이다. 타인의 고통에 대해 연민의 마음을 가지는 것만으로도 미주신경 긴장도가 활성돠된다.
네 번째 방법은 마사지이다. 미주신경이 지나가는 목빗근이나 귀 아래 부위를 자주 마사지해 주는 것이다. (179)
5장 자기 알아차림 먼저 내 몸과 마음을 챙기자
1. 몸의 감각을 느끼고 표현하기
2. 마음은 관찰과 돌봄의 대상
3. 산만함의 순간이 마음챙김의 기회
4. 마음이 흔들리면 몸으로 지지하라
5. 현재의 경험에 머무르기
당신이 집을 나선다. 흐린 하늘에서 눈이 쏟아진다. 금방 세상이 눈으로 덮인다. 뇌과학적으로 보면 이 순간 두 가지 경험이 존재한다. 어떤 사람은 뽀드득 눈 밟는 소리와 함께 가슴이 들뜰 수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차가 막히고 출근이 늦어져서 벌어질 온갖 상상을 하며 걸을 수 있다.
<사회인지 및 감정 신경과학>에 실린 토론토대학교 심리학과 노먼 파브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첫 번째 경험은 현재 순간에 초점을 둔 방식으로 간단히 ‘경험방식experiential focus’이라고 이야기한다. 감각을 중심으로 현재의 경험에 집중되어 있는 상태이다. 두 번째 경험은 시간을 거슬러 경험을 연결하는 방식으로 간단히 ‘이야기방식narrative focus’라고 명명한다. 이는 경험에 대한 생각을 통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상태이다.
정신과를 찾는 이들은 마음이 현재에 머무르지 않는다. 과거의 상처에 매여 있거나 미래의 일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 차 있다. 이들은 한마디로 이야기회로가 과활성화되어 있고 경험회로가 저활성화되어 있다. 쉽게 말해 생각이 많고 감각이 떨어져 있다. 그렇기에 경험 중에 너무나 쉽게 과거나 미래로 끌려가고, 다른 사람이나 자신과 관련된 온갖 이야기를 만들어내느라 지금의 경험에 집중하기 어렵다.
다행히 우리는 이 두뇌의 방식을 전환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마음챙김 훈련이다. 초심자의 경우 생각, 감정, 감각 등 여러 가지를 알아차리기보다 신체감각에 초점을 맞추게 되면 훈련이 쉬울 수 있다.
생각이 많아지면 몸에 집중해 보자. 감정이 요동치면 감각에 집중해 보자. 이야기에서 빠져나와 경험에 머물러보자. 몸에 주의를 기울이면 머리는 가벼워지고 삶은 깊어진다. (198)
6. 내 마음에 괄호넣기
앞에서 상처받은 마음과 건강한 마음의 작동방식은 여러 가지 면에서 다르다는 것을 이야기했다. 그중 하나로 심리적 융합을 꼽았다. 상처받은 마음은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느낌과 생각을 사실이라고 받아들인다. 비판적 사고나 거리두기와 같은 의식적 반응이 잘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심리적 융합에는 크게 5가지가 있다.
첫째는 평가(판단)와의 융합이다. 좋고 나쁘고, 맞고 틀리고의 자동적인 평가를 사실로 받아들인다. ‘저 사람은 나쁜 사람인 것 같아’라고 판단된다면 상대는 나쁜 사람이 되고, ‘나는 쓸모 없는 것 같아’라는 생각이 올라오면 실제 ‘나는 쓸모없는 사람’이 되고 만다.
두 번째는 감정과의 융합이다. 감정과 과잉 동일시되어 내가 감정을 느끼는 것이 아닌 내가 곧 감정인 것처럼 받아들인다. ‘나는 지금 우울해’가 아니라 ‘나는 우울한 사람’이 되어버린다.
세 번째는 상상과의 융합이다. 안팎의 자극으로 떠오르는 미래에 대한 온갖 부정적 상상을 곧 사실이라고 받아들인다. 수입이 감소해서 ‘이제 곧 길거리에 나앉을 거야’라는 파국적인 생각이 떠올랐다면 그것을 바로 사실화하여 공포에 파묻힌다.
네 번째는 인과관계의 융합이다. 어떤 일에 따른 원인을 찾고 그 원인 때문에 이러한 결과가 나왔다고 사실화시켜 버린다. 여러 가지 원인 중에 하나이거나 우연적인 원인이 아니라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원인이 되고 만다.
다섯 번째는 경험과의 융합이다. 과거의 경험에 지나치게 융합되어 변화된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지금도 비슷한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믿는다. (200)
심리적 융합은 하나같이 현재의 경험을 왜곡시킨다. 현재의 경험에 대한 접촉력이 감소되고,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이나 느낌에 끌려가게 된다. 특히, 과거의 경험으로 인해 마음의 틀이 견고하게 만들어진 이들은 더욱더 그에 갇히게 된다. 마음의 작동방식을 살펴보지 못하고 마음의 내용을 의심 없이 사실로 받아들이고 마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심리적 탈융합이다. 마음의 내용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작동방식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거리를 두고 생각을 생각으로, 감정을 감정으로, 기억을 기억으로, 상상을 상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심리적 탈융합을 위한 좋은 방법이 바로 마음챙김이다. 마음챙김은 ‘지금의 경험에 대한 집중’의 의미와 함께 ‘자신이 무엇을 경험하고 있는지를 알아차리는 것’을 포함한다. (201)
7. 마음의 고통을 관찰하기
8. 내 안의 밝음을 키우자
6장 자기대화 나에게 위로와 격려를 건네자
1. 거울 속에 내가 어떻게 느껴지는가?
2. 잘못된 존재가 아니라 잘못된 경험이 있을 뿐
왜 고통 속에 있는 자신을 더 큰 고통으로 몰아갈까? 정말 그렇게 비난할 만큼 잘못이었을까? 원래 그런 사람으로 태어났을까? 정말 친절이나 위로를 받을 만한 자격도 없어서일까?
그렇지 않다. 어떻게 보면 이유는 간단하다. 자기가 처음부터 ‘나쁜 사람’ 혹은 ‘잘못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자기에 대해 나쁘게 생각하도록 학습되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잘못된 존재여서가 아니라 자기를 잘못된 존재로 느끼게 된 잘못된 경험 때문이다.
그렇게 영향을 끼친 존재는 부모일 수도 있고, 또래일 수도 있고, 조직이나 사회일 수도 있다. 이들은 오랜 시간에 걸쳐 자기를 싫어하는 게 습관이 되었다. 힘들 때뿐 아니라 평소에도 거친 눈빛과 표정 그리고 말투로 자신을 대한다.
특히, 양육자와의 관계에서 상처를 입은 경우가 자기비난이 심하다. 부모로부터 상처를 받은 자녀들은 미움과 분노를 넘어 울분, 배신감, 무력감 등 여러 파괴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무엇보다 치명적인 것은 그 파괴적인 감정으로부터 자기를 분리시킬 수 없다는 점에 있다.
부모를 증오하는 인간의 가장 큰 불행은 자기까지 증오하게 된다는데 있다. 분노를 폭발하다가도 늘 분노의 끝은 자기를 향한다. (221)
3. 내면의 관찰자 두기
자기비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장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자기비난을 멈추자는 결심이 아니라 자기비난이 일어나는 것을 관찰하는 마음이다. 어떤 상황에서 자기를 무엇이라고 비난하는지 자세히 관찰해 보는 것이다. 자기비난을 많이 하는 사람들조차 자기가 어떤 비난의 말을 자주 하는지, 어떤 톤으로 이야기를 하는지, 그 목소리가 누구와 닮아 있는지 등을 물어보면 자세히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기록해 보면 더욱 좋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나는 왜 나에게 이렇게 이야기하는가?’라는 질문이 생겨난다. 이렇게 자기 내면을 관찰하는 마음이 자리 잡는다는 것은 아주 큰 변화이다.
물론 처음에는 브레이크 기능이 약하기 때문에 의문이 잘 떠오르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내면의 관찰자는 내면의 비난자에게 계속 말을 건다. 게다가 자기관찰의 마음과 함께 자기연민의 마음이 자라면 내면의 비난꾼은 점점 약화된다. 과거와 달리 자기비난에 자동적으로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멈춤, 살핌, 다독다독’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224)
4. 괜찮아, 그럴 수 있어!
자기친절은 힘들었던 수많은 날들을 견뎌온 나에게, 그리고 앞으로도 힘든 삶의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는 나에게 보내는 최소한의 응원이자 예의이다. 자기친절은 무언가를 얻기 위한 기술이 아니다. 고통 속에 힘들어하는 자기를 소중하게 대해주는 것이 목적이다. 고통이 줄어드는 것은 그 결과일 뿐이다. 이렇게 자기친절의 마음이 조금씩 스며들면 ‘내면의 관찰자’와 함께 ‘내면의 벗’으로 자리잡는다. (227)
5. 반성이 비난이 되지 않게
반성과 비난은 전적으로 다르다. 반성은 자기 잘못이나 부족함을 돌아보고 이를 개선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인간다움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그러나 반성은 칼과 같아서 안전하게 사용해야 한다. 자기의 허물을 잘라낼 수도 있지만 잘못 사용하면 자기를 해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반성이 비난으로 흐르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무엇보다 문제와 존재를 동일시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반성은 기본적으로 부정이 아니라 인정이다. 즉, 반성은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지 자기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바로 반성과 비난의 차이이다. 나에게 도움이 되는 반성은 자기 잘못을 인정하되 개선에 대해서는 관대해지는 것이다. (232)
6. 자기비난까지 끌어안을 수 있을 때
변화의 과정에서 실수를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받아들이기보다 자기의 무능함을 드러내는 증거라고 생각할수록 포기하고 만다. 그렇다면 우리는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루이지애나주립대 클레어 애덤스와 듀크대 마크 리어리는 이러한 악순환을 깨뜨리기 위해 여러 실험을 했다. <사회 및 임상심리학 저널>에서 자기가 한 실수에 대해 너무 자책하지 말고 가끔은 누구나 유혹에 넘어간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오히려 의지력의 회복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밝혔다. 더 나아가 자기친절로 자기비난을 끌어안을 때 가장 자기조절력이 향상되었다.
자기를 비난하는 것은 자기가 잘하기를 바라지만 혼내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자기비난의 긍정적 의도를 알아차리고, 그 의도와 표현을 일치시키도록 돕는 과정을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다음과 같다.
모드1 : 자기비난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자기비난의 목소리. ‘이 멍청아!’ 모드2 : 자기관찰 ‘내가 나에게 ’멍청이!‘라고 이야기하고 있구나’라고 알아차리고 그 비난의 마음에 거리를 둔다 모드3 : 자기친절 ‘괜찮아. 잘 모르는 길이니 그럴 수도 있어.’ 모드4 : 통합적 자기 대화 자기비난의 마음과 대화를 해 보는 것이다. 특히, 자기비난의 마음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물어본다. ‘실수하지 말자!’라는 의도로 멍청이라고 이야기했다면 그 의도를 중시한다. |
7. ‘흔들리지만 가라앉지 않는다’
8. 일상에서 건네는 자기친절의 만트라 만들기
7장 자기에게 활력 선물하기 사랑하고 배우고 나누어라
1. 주의를 밖에서 안으로
당신은 여전히 자기연민이나 자기친절에 대해 의심의 시선을 거두지 않고 있을 수 있다. 연민과 친절이 자기만족과 타성으로 이어지지 않는지 의심할 수 있다. 그러나 마음챙김-자기연민 프로그램 공동개발자인 크리스틴 네프의 연구에 따르면 자기연민을 가진 사람들은 결과를 중시하는 성과목표보다 배우고 성장하는 학습목표를 중시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실패를 딛고 일어나 재시도하는 능력이 더 높았다. 실제 중간고사에 낙제한 대학생 그룹 중에서 자기연민 점수가 높은 학생들은 실패를 성장의 기회로 받아들이는 비율이 높았다. 실패했을 때 자기효능감이 덜 손상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실패를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자신을 지나치게 엄격하게 대하지 않기 때문에 넘어진 자신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다시 시도할 수 있었던 것이다. (251)
2. 인스턴트 위로가 아닌 느린 위로
3. 무언가를 돌보는 것이 나를 돌보는 일
4. 일과 휴식을 분리하기
상대적으로 잘 쉬는 사람들은 시간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휴식과 일이 잘 분리되어 있다. 예를 들면, 휴식 때는 업무에 대한 생각을 잘 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퇴근 후 저녁이나 주말처럼 짧은 시간도 긴 휴가처럼 회복에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잘 쉬는 사람들은 어떻게 일로부터 분리될 수 있었을까? 윈스턴 처칠은 이를 불을 끄고 켜는 것으로 비유한 바 있다. (262)
일상의 주요 관심사에 단순히 불을 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새로운 관심 분야에 불을 밝혀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지친 마음을 쉬게 하고 힘을 얻을 수 있다. 단순히 쉬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다른 부분을 사용하게 된다. |
5. 자신의 욕망을 파악하고 조율하기
자기를 돌본다는 것은 자신의 욕망을 잘 파악하고 그에 적절한 길을 내어주는 일이 포함된다. 반대로 자기를 돌보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의 욕망을 잘 알지 못하고, 중요하게 여기지도 않는다. 오히려 타인의 욕망과 기대에 더 편승한다.
특히, 힘든 감정을 오랜 시간 억압해 온 이들이 그렇다. 이들은 감정 뿐 아니라 감각과 욕망에 대해서도 무감각하다. 보람, 희망, 기쁨, 행복 등의 감정도 잘 느끼지 못한다. 마음 전체게 두꺼운 굳은살이 박인 것과 같다. 이들은 자신의 내면과 차단되어 있다. 그렇기에 딱히 원하는 것도 없다. 이들은 자존감 이전에 자기감에 문제가 있다. 자기에 대한 감각이 있어야 자신에 대한 평가를 할 수 있을 텐데 그 기본적인 감각조차 잘 발달되지 못한 것이다. (268)
6. 기쁨과 즐거움의 균형 맞추기
우리가 쾌감을 느낄 때 뇌에서 분비되는 신경호르몬이 있다. 바로 도파민이라는 신경전달물질이다. 술을 마시거나, 섹스를 하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거나, 산 정상에 오르거나, 새로운 것을 배울 때 도파민이 분비되어 기분이 좋아진다. 즉, 도파민은 즐거움을 느낄 때도 기쁨을 느낄 때도 분비된다. 그렇기에 중독호르몬이면서 동시에 행복호르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도파민은 어떨 때 중독이 되고 어떨 때 행복을 줄까? 그 답은 바로 스트레스에 있다. 즉, 아무 어려움 없이 쾌감을 느끼면 중독에 빠지기 쉽지만, 어려움을 거치고 난 뒤에 쾌감을 느낀다면 이는 행복이 되기 쉽다.
다시 말해 즐거움은 도파민만 분비되는 것이라면, 기쁨은 도파민과 스트레스 호르몬이 함께 분비되는 것을 말한다. 진정한 행복은 순수한 쾌감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불쾌감과 쾌감이 섞여 있어가 혹은 불쾌감을 거치고 난 뒤의 쾌감을 말하는 것이다. 단, 그 불쾌감이란 억지로 견디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 기꺼이 겪는 불쾌감을 말한다. (272)
중독은 기쁨이 결핍되고 즐거움이 과잉된 상태를 말한다. 그렇기에 중독의 회복은 쉽지 않다. 중독의 회복은 단지 중독의 대상을 끊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기쁨의 회로를 복원시켜야 하는 지난한 과정이다. 자기돌봄은 이 균형을 찾아가는 것이다. 자기에게 기쁨과 즐거움의 균형을 맞추는 기술이 바로 자기돌봄이다. (274)
7. 배움은 삶에 탄성을 준다
나는 종종 정신과 구분하여 ‘영혼’이라는 표현을 쓴다. ‘죽은 사람의 넋’으로서의 의미가 아니라 ‘산 사람의 넋’으로서의 의미이다. 즉, 한 인간의 몸을 거느리고 정신을 다스리는 높은 의식을 가리키는 것이다. 영혼이 살아 있어야 몸과 마음이 건강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영혼의 양식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바로 사랑과 배움, 나눔이다. 사랑, 배움, 나눔을 잃어가면 영혼은 힘을 잃고 삶은 죽어간다.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게 된다. (276)
8. ‘괜찮아’에서 ‘할 수 있어’로
자기돌봄이 잘 이루어질수록 내면의 ‘참 자기’와 접촉하게 된다. 참자기는 말 그대로 ‘타고난 잠재력’을 말한다. 안정적인 자기관계가 형성되면 자기 본성을 추구하게 되고 그 가능성을 유감없이 드러내고자 한다. 자기실현의 욕구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괜찮아’라는 위로에서 시작된 자기돌봄이 자연스럽게 ‘할 수 있어’라는 도전으로 이어진다. 그것은 다른 사람과 경쟁하거나 인정을 받기 위함이 아니다. 자기다워지는 것이다. 그것이 건강한 삶이다. 아프지 않는 것이 아니라 활기 있는 삶을 사는 것이며, 에너지를 아끼는 것이 아니라 에너지를 늘리는 것에 있다.
그렇다면 삶의 활기를 느끼고 배터리의 용량을 늘리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그 답은 도전이다. 이 도전에 따르는 스트레스는 우리를 강하게 하는 좋은 스트레스이다. 삶의 활력은 늘 스트레스를 필요로 한다. 스트레스 호르몬이 잘 분비되어야 우리는 삶의 활력과 적정 각성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아드레날린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분비되는 것도 문제이지만 너무 분비되지 않는 것 또한 문제이다. 그것이 바로 ‘권태’라는 감정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에필로그: 지금, 나에게 따뜻한 손을 내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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