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세이

<아무튼, 트위터>, 정유민

비상하는 새 2023. 1. 2. 15:33
반응형

<아무튼, 트위터>

 

 

느슨한 랜선 친구

어딘가의 혼자인 누군가와 혼자인 내가 느슨하게 닿아 있는 심정적인 관계. 손에 잡히지도 않고 눈에 보이지도 않는 관계를 상상하고 신뢰하며 즐거워하는 건 섬뜩한 일이긴 하다. 그렇지만 다들 그걸 알면서도 크리피함은 애써 넣어두고 즐거워하는 것에 집중하며 슬기로운 트위터 생활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누군가는 나의 아무 말 트윗을 보고도 어느 순간 조용히 마음을 누르겠지. 공감한다는 의미일까, 좋다는 의미일까, 바보 같은 말이라서 표시를 해둔 것일가, 저장하고 싶다는 의미일까. 무엇이든 상관없다. 그 애매한 마음들이 남겨놓는 넉넉한 거리가 좋아서 도망쳐 온 곳이니까. (30)

 

만남의 광장

돌이켜보면 현실 인연이 랜선으로 이어진 경우는 있었어도 그 반대는 거의 없었다. 닉네임으로 존재하던 인물들을 실제로 마주하면 서로 곤란해진다. 우리는 자기 상상 속에 존재하는 캐릭터가 상대방의 실제 모습과 같을 리 없다는 걸 잘 안다. 그리고 그 당연한 진실을 직접 경험하고서야 비로소 깨닫는 때가 있다. 인터넷에 공개된 정보와 생각들이 그 사람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은 인터넷을 사용하는 본인이 가장 잘 알 것임에도, 종종 그 사실을 잊는 것이다. (35)

 

이름이 없는 천국

내가 간절히 바란 것은 내가 원할 때, 생활 반경이 겹치지 않는 공간에서, 모르는 사람들을 무심히 지나칠 수 있는 기회였다. 그것이 때론 대도시의 삭막함이나 이웃 간의 무관심, 현대인의 개인주의 같은 비판으로 이어지더라도, 그로 인해 누릴 수 있는 자유보다 중요하지는 않다.

트위터는 내가 생각했던 대도시와 가장 닮았다. 우리는 언제든 서로를 무심히 지나쳐 갈 수 있다. 원한다면 교류할 수도 있고 때론 친구가 되기도 한다. 모르는 사람이 툭 던진 정보를 획득해도 굳이 그에 보상할 필요가 없다. 사생활을 간섭하는 것은 무례한 일이라는 데에 모두가 동의하므로 함부로 타인의 삶에 개입하려 들지 않는다.

나에게 익명성의 가치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나의 영역을 존중받는 것이다. 무관심이라 해도 좋다. 그로 인해 나는 조금 더 자유로울 수 있으니까. 트위터에서 새로운 나를 생성한다는 것이 진실 되지 못한, 가식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동시에 트위터는 내가 가장 나인 채로 살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51)

 

매력있어 내가 반하겠어

SNS에 몰두하면 우울해진다고들 한다. 자신이 행복한 순간만을 선택적으로 전시하기 때문에 남의 SNS를 보면 나만 빼고 다 행복한 것처럼 보여서 내 삶이 불행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과거 싸이월드가 한창 흥하던 시절부터 꾸준히 있었다. 나는 대체로 이런 주장에 동의하는 편이다. 그러나 적어도 트위터만큼은 거기서 예외가 아닌가 생각한다. 트위터에서 타인의 계정을 보면서 느낄 박탈감이란 게 있다면, 이런 것이다.

 

1. 나는 왜 저런 재밌는 드립을 치지 못했는가

2. 나는 왜 일본 여행 중이 아닌가

3. 나만 고양이 없어!

 

자신의 우울을 마음껏 내보이고 아무 말도 막 던져보고 빻은자들을 탄탄한 논리로 응징하기도 하는 타임라인을 보며 과연 내 삶이 남들에 비해 보잘 것 없다고 느끼게 될가. 상대적 박탈감도 패배감도 느끼지 못하도록 일상을 평균치로 다듬어서 하나 마나 한 푸념과 응원을 주고받는 것보다 이편이 훨씬 더 평온하지 않은가. (127)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