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세이

<아무튼, 잠>, 정희재

비상하는 새 2023. 2. 20.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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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

왜 그리 잠에 집착했을까. 몇 가지 이유가 떠오른다. 하나는 체력이 약해서. 충분하게 자서 체력을 비축해둬야 최상의 컨디션으로 버틸 수 있었으니까. 두 번째는 습관성 긴장이라는 지병 때문에. 인간은 일정 시간 이상을 긴장한 채 깨어 있으면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풀 방법을 찾기 마련이다. 수다, 목욕, 폭식, 음주가무, 섹스 대신 나는 잠을 택했다. 또 다른 하나는 도피하고 싶은 무의식에 혐의를 둬본다. 먹고 잠깐 노는 시간을 제외하곤 외면하고 싶은 마음이 눈꺼풀을 짓누른 게 아닐까.

무엇을 그토록 외면하고 싶었을까. 마치 조상들이 너 글 쓰는 데 도움이 될까 해서 배경을 세팅 해봤어한 듯이 심상치 않은 가족사, 자극과 현상에 반응하는 민감도가 예민한 감수성, 잘 풀리지 않는 연애, 파탄 난 남북 관계와 망해가는 지구 생태계... 자면서 잊고 싶은 일은 차고 넘쳤다. ‘너만 정신 차리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며 본인 책임론을 강조하는 기성세대의 하울링도 지겨웠다. 요약하면 외롭게 세상을 횡단해야 하는 피로감, 그 자체가 아니었을까. (22)

 

현실은 고되고 자극에 반응하는 자아의 활동은 활발하다. 하지만 자는 동안에 에고(ego)의 생각 공장은 휴업에 들어간다. 자면서 불안, 결핍감, 고독, 분노, 갈망... 같은 것들도 정화 작업을 거쳐 다룰 만한 사이즈로 줄어든다. 잠잘 때 두뇌 회로 구조에서 도파민이라는 신경전달물질을 활발하게 분비하기 때문이다. 덕분에 안정감과 균형감각을 되찾고, 그 안도감을 몸과 마음은 또렷이 기억한다. 그래서 중독된 것처럼 이불 속 동굴로 들어가곤 했다. (22)

 

그때는 몰랐다. 한창 예민한 시기에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라는 상처를 입게 됐다는 것을. 훗날 그 결락을 채우기 위해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도. 이를테면 약한 체력을 윽박지르며 자신을 과도하게 혹사하거나, 아니면 낡은 로컬 버스를 타고 천 길 낭떠러지 끝의 오지를 악착같이 찾아가거나. 또는 사람 마음이 얼마나 약하고 불가역적인지 모른 채 방심하다 결국은 잃어버리는 식으로. (53)

 

프랑스 시인 생 폴루는 낮잠을 잘 때 방문에 이런 표지를 걸어두었다고 한다.

시상(詩想) 작업 중.’

잠에 바치는 최상급 찬사였다. (139)

 

잠 파수꾼의 역할은 다음과 같다.

요란한 벨 소리에 깨지 않도록 휴대폰 무음으로 해두기. 커튼이나 블라인드를 내려 어둠 채집해주기. 가위에 눌려 귀신 울음소리를 내고, 벼락같은 잠꼬대를 해도 놀라서 맞고함 지르지 않기. 비몽사몽 상태에서 지금 몇 시냐고 물어오면 시곗바늘을 10분쯤 뒤로 돌려 말해주기. 숙면에 도움이 된다면 손으로 머리카락을 빗어줄 수도 있다. 심리적 안정이 필요하다면 속삭임 서비스도 가능하다.

피곤하지? 외롭고 두렵지? 괜찮아. 두려워하는 일이 실제로 일어난대도 모든 문이 닫히진 않아. 가만히 지켜보면 아주 작은 틈새라도 반드시 있어. 그동안의 삶에서 부족했던 것, 정말로 필요했던 것이 뒤늦게 오려고 그러는 거야. 당신이 인간답게 살아보려고 얼마나 분투했는지 알아. 모진 마음이 들고, 화와 원망과 환멸이 들끓었을 때는 또 어땠어? 그거야말로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하며 생명을 갉아먹는 거였지. 그것도 그 순간엔 노력하는 거였지.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노력하는 거였어. 돈이나 실력이 부족해서, 혹은 탐욕과 어리석음 때문에 지금이 이렇다고 당신의 지나온 날을 깎아내리고 싶지 않아. 적어도 지구상에 한 사람은 당신의 앴므을 알고 있어. 그러니 지금은 그냥 쉬어.” (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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