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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_최승자

비상하는 새 2022. 11. 25.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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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 호칭에 관하여

그래, 난 아줌마다. 아저씨 없는 아줌마다.”

이런 호칭 외에도 내가 얼마간의 충격과 함께 받아들여야 했던 또하나의 호칭은 선생님이라는 호칭이었다. 언제나 선생님이라고 불러야 하는 입장이었던 내가 어느 날 갑자기 선생님으로 불리는 일을 당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그 일은 내가 첫 시집을 낸 얼마 뒤에 일어났다. 시집을 낸 뒤 아주 이따금씩 독자에게서 전화나 편지를 받기 시작했는데 그 편지나 전화 속에서 내가 선생님으로 불리게 되었던 것이다.

이번에는 충격과 더불어 어떤 정신적인 반성까지 치러야 했다. 그건 이제 내가 받아야 할 위치를 지나 어떤 식으로든, 그리고 내가 결국 줄 수 있든 없든 간에 주어야만 하는 위치로 옮겨와 있다는 반성이었다.

사람은 태어나 성장하면서 가족과 이웃과 사회 일반으로부터 많은 것을 무조건적으로 받게 되고, 그 받은 것을 밑받침으로 한 사람의 성인으로 성장하여 결국 어느 때엔가는 자신이 받은 만큼 주어야만 하는 입장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그 사람의 능력과는 상관없이 인간이 해야 할 도리로서.

시 속에서나 현실 속에서나 나는 나 자신이 많이 받지 못했던 것에 앙심을 품고 있었던 사람이지만, 처음으로 선생님으로 불린(물론 그것은 단순한 사교적 호칭이었지만) 그 순간 나는 나 자신이 그동안 나를 둘러싼 세계로부터 마땅히 받아야만 했었을 것들을 얼마만큼 받지 못했든 간에, 이제 무조건적으로 받는 시기는, 그리고 못 받았다고 앙앙 우는 시기는 끝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눈치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나 자신이 나를 둘러싼 세계에 무엇인가를 줄 만큼 성숙한 인간이 못 되었다는 사실에 내가 선생님으로 불렸다는 게 몹시도 거북스러웠다.

그러나 인간은 정말로 습관의 동물인지 그런 호칭으로 심심찮게 불리다보니 이제는 그것이 아무런 마음의 켕김도 주지 않는 잘 길들여진 신발처럼 편안한 호칭이 돼버리고 말았다. (1985)

 

- 새에 대한 환상

물위에 그냥 두둥실 떠 있거나 스르르 미끄러져 떠다니는 오리들을 볼 때마다 얼마나 한가롭고 여유 있고 가볍고 편안한 삶인가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런데 그 물밑으로 보이지 않게 그들은 중노동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새에 대한 나의 환상은 그때 깨어졌다. 그 이후로 나는 하늘에서 날아가는 새들을 보면서 그들의 자유로움을 그리기보다는 그들 날갯짓의 중노동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한다. 쉬운 삶이란 없다. 어떤 존재든 혼신을 다해서 살아가는 것이다. (1996)

 

- 죽기 전의 죽음

수피즘 이야기 중에 이런 게 하나 있어. 세상에서 가장 높은 어떤 산꼭대기에서 흘러내리기 시작한 물은 모여 모여, 흘러 흘러 마지막으로 바다로 흘러들지. 그러나 이 물이 하는 숱한 여행 중에서 언젠가 한 번은 사막을 건너가는 여행을 하지 않을 수 없는 때가 와. 온 세상을 돌고 돌아 흐르다 마침내 사막 앞에 다다른 물은 절망하지. 달구어진 거대한 모래사막을 앞에 두고서 물은 공포에 떨어. 물이 사막을 건널 수는 없으니까. 도중에 물은 깊은 모래 속으로 빨려내려 흔적도 없이 사라질 테니까. 그때 사막이 물에게 말하지. 선택하라, 죽을 것인가, 살 것인가를. 물은 물론 살고 싶다고 말하지. 그러자 사막은 그러면 공기로 변해 하늘로 올라가라고 말해. 하지만 물이라는 육체의 아이덴티티밖에 알지 못하는 물에게는 그 물(육체) 형태를 잃는다는 것 자체가 죽음이야. 그래서 물은 더욱 공포스러워하지. 그때 허공의 보이지 않는 바람이 물에게 속삭여. “우리와 함께하라. 우리는 수도 없이 이 일을 해왔다. 우리가 공기가 된 너를 실어날라 그 산으로 데려다주마. 그러면 너는 거기서부터 다시 물이 되어 흐르기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생명의 내용을 알지 못하고 물(육체)이라는 형태를 생명으로 알았던 물은 자기 죽음 앞에서 선택하지 못하고 떨 수밖에 없었어.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 할 순간은 오고, 그리하여 그 물 중의 어떤 부분은 증발해 바람에 실려갔고, 다른 어떤 부분은 사막의 모래 깊은 곳으로 흘러들어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지. 그때 공기로 변하는 쪽을 택했던 물은 비로소 그것이 이것이냐 저것이냐 양자택일이 아니라 하나밖에 없는 선택이라는 것을, 그리고 모래 속으로 자취 없이 사라져 죽음을 맞이했던 다른 부분은 바로 그렇게 자기 자신으로부터 죽어 떨어져 나가야 했던 부분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는 거야. 아마 우리 인간들의 삶도 그럴지 몰라. 언젠가는 그렇게 선택하지 않을 수 없을 때가 오고, 그리고 그렇게 선택하지 않을 수 없을 때가 오는 인생이 겉으로는 무시무시하고 불행해 보일는지 모르지만, 일단 그 과정을 거친 뒤에는 그것이 오히려 축복이었음을 알게 될지도 모르지.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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