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 마흔에 시작한 글쓰기>
4. 트라우마
트라우마를 들어줄 귀
박완서의 이러한 결의는 트라우마 생존자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서 살아남겠다는 의지를 다질 뿐만 아니라, 그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그들에게는 생존의 길이 되기도 한다. 즉, 내가 살아남아서 반드시 이것을 증언하겠다는 욕구가 생존의 이유가 되고, 또한 생존하기 위해서라도 자신의 경험을 증언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박완서의 문학은 복수로서의 글쓰기로도 알려져 있는데, 그는 언젠가는 이것을 글로 쓰리라는 생각이 그 상황을 견디는 데에 도움이 되었고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품위를 지킬 수 있게 해주었다고 한다. (94)
5. 고통
스스로 이유를 찾고 납득되어야
그렇다고 해서 ‘절벽’ 같은 존재로부터 박완서가 얻어낸 것이 전혀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어쩌면 ‘한 말씀’ 보다 더 심오한 것이었다.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의 맨 마지막 장면에 보면 절벽 같은 침묵 속에서 듣기만 하던 시댁 형님이 마침내 운다. 처음에 화자는 형님이 울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다가 문득 깨닫고는, “아니, 형님 지금 울고 계신 거 아뉴?” 하고 묻는다. 그러고는 형님은 울면 안 된다고, “형님은 언제나 저에게 통곡의 벽”이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 “통곡의 벽이 우는 법이 세상에 어디 있대요.” 하는 말로 소설은 끝난다.
이 마지막 말에는 많은 아이러니가 담겨 있다. 뭐라고 한 말씀이라도 해보라며 덤볐지만, 그 대상이 나와 너무 쉽게 말을 섞는다면 그는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든든한 존재가 아닐 수 있고, 내 문제 또한 그리 심각한 게 아닐 수 있다. 왜 멀쩡하던 내 자식이, 그토록 선량하던 내 자식이, 나보다 먼저 가야 했느냐와 같은 큰 질문은 몇 마디 말로 답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니다. 그래서 통곡의 벽은 인간의 질문에 너무 쉽게 답하려 하기보다 벽답게 든든히 버티고 있어주어야 인간이 찾아가서 기대어 울 수 있다. 그래서 “울음을 참고 할 때도 통곡의 벽은 있어야만”하고, “통곡의 벽이 우는 법”은 없어야 한다. 그러나 이 마지막 말은 사실 반어법이기도 하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우리는 전화통을 붙들고 있는 이 동서지간이 서로 말없이 한참을 흐느꼈으리라는 것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통곡의 벽이 우는 법은 없어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통곡의 벽이 나와 함께 운다는 것을 깨달을 때, 치유는 시작된다. (123)
다시 산 자의 자리로
마음이 상할 때 우리는 가장 먼저 자기 몸을 돌보길 그만둔다. 생때같은 아들을 하루아침에 잃은 박완서도 밥을 먹을 수 없었다. 목으로 넘어가는 것은 술뿐. 제대로 먹지 못하니 변비가 오고, 잠을 자지 못해 수면제를 먹었다. 그러다가 한 번씩 억지로, 오기로 먹고 나면 체해서 속을 게워내야 했다. 그렇게 여러 날을 보내다가 그가 영적인 전환점을 맞이한 다음날, 비로소 식욕이라는 것을 느꼈다. 아들을 잃고 살 소망이 없어진 그에게 끝까지 식욕이 돌아오지 않아야 마땅하건만, 산 자에게는 산 자의 시간이 남았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듯한 몸의 반응은 그를 “한없이 부끄럽고 참담하게 했다.”
하지만 이 부끄러움을 딛고 서야 비로소 산 자는 자신에게 남아 있는 시간을 살아갈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런 부끄러움이 싫어서 계속해서 오기를 부리면서 밥도 먹지 않고 자신을 돌보지 않는 대신, 이런 부끄러움이 싫어서 세상 탓, 남 탓, 신 탓만 하는 대신, 겸손히 받아들일 때 비로소 자기 본연의 모습과 마주하며 남은 날들을 살아갈 수 있다.
이러한 인간 본연의 모습을 박완서는 “파렴치한 생명력”이라고 표현했는데, 파렴치하기 때문에 “죽고만 싶은 지극히 인간적인 염치를 거역하고” 살려 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명력은 신이 인간과 짐승에게 공히 주신 본능이자 능력이라고 그는 말한다. 우리는 흔히 염치를 아는 것이 인간됨의 도리라고 생각하지만, 이 염치를 거역하는 파렴치한 생명력에 오히려 인간됨의 근원이 있는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면 염치도 일단 존재하는 자에게 허락된 것이니, 염치를 갖추기 위해서라도 파렴치해질 수밖에 없다. 그 모순을 받아들이고, 생존을 위해 몸이 보내는 허기의 신호를 받아들이는 것이 산 자로서 발을 떼는 첫걸음일 것이다. 그래서 그는 끼니때마다 고파오는 배가 한없이 부끄러웠지만, 생명의 그 능력을 거역하지 않고 받아들임으로써 다시 산 자의 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129)
6. 독립
“틈바구니”에 서다
오롯이 홀로 종교, 정치, 사회 등 굵직한 갈래의 사고에 대해서 이것이 정말 내가 생각하는 바가 맞는지, 이것을 내 이름을 걸고 주장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야 했다. 소설 속의 화자처럼, 자신의 혼란을 애꿎게 화풀이할 상대도 없이 직접 그 틈바구니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찾아가야 했던 것이다. 소설 속 화자가 지금까지 자신이 노동자 편이었다고 생각한 것은 그들과 직접 부딪힐 일이 없는 상황에서의 관념적 문제였다. 그러나 남편의 질병을 계기로 그들의 파업이 자신의 문제가 되면서, 이제는 직접 그 틈바구니에서 자신의 “숨결”을 찾아야 했다. 그와 비슷하게 나도 어떤 식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낼지, 내 나름의 ‘숨결’을 찾아야 했던 것이다.
이 과정은 그동안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 나는 마땅히 이런 정도의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무의식적 특권 의식과 같은 것들에서 벗어나는 과정이기도 하다. 박완서는 자신의 의존적 자세에서 자기 응석을, 나아가 자기 과시를 보았다고 했다. 이것은 아들을 잃은 후 어떻게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날 수 있느냐고 항변했을 때, 당신이라고 해서 그런 일을 당하지 말란 법이 어디 있느냐고 반문한 어느 수녀의 말에서 얻은 단서이기도 하다.
나의 경우도 비슷했다. 둘째를 사산하고 내게 처음 들었던 생각은, 이런 고통이 나를 피해 갈 거라고 생각했던 막연한 특권 의식에 대한 도전이었다. 나름 반듯하게 살았다고 생각한 지난 삶도, 고생도 할 만큼 했다고 하는 나름의 판단도, 다 소용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환상에서 잘 깨어났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남편과 아들이 있는 화목한 가정 등, 나를 은연주에 보호해주던 것들이 사라지고 오직 자기 자신으로 세상 앞에 섰을 때의 새삼스러운 자의식이기도 하다. 새로운 숨고르기의 시간인 것이다. (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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