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리막 세상에서 일하는 노마드를 위한 안내서_누구와, 어떻게, 무엇을 위해 일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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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아버지 세대와 다를 수밖에 없는 우리 시대 일에 관한 이야기
내리막 세상에서‘일’하는 노마드
| 일은 노동이기만 해야 할까?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인간의 활동을 노동labor, 작업work, 행위action로 나눈다. 노동은 생물학적 존재인 인간이 먹고살기 위해 필연적으로 해야 하는 활동이다. 작업은 개인의 수명을 넘어 지속하는 인공 세계를 창조하는 활동이다. 행위는 타인의 현존 앞에서 생각을 말하고 실천하는 활동이다. 이 세 가지 활동은 인간이 지닌 세 가지 욕구needs에서 파생한다. 노동은 말할 것도 없이 생물학적 욕구를 해소하기 위한 것이다. 작업은 유용한 것을 창조하고픈 욕구에서 나온다. 행위는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픈 욕구에 응답한다. 아렌트는 인간의 활동을 이렇게 셋으로 나누면서 고대 아테네의 사례에 기댄다. 고대 아테네에서 노동은 노예의, 작업은 자인의, 행위는 귀족의 몫이었다. 그리고 각 활동에 투사하는 세 가지 욕구를 모두 해소하며 살아갈 수 있었던 사람은 귀족뿐이었다. 우리는 이 세 가지 활동의 구분이 사라진 시대를 살고 있다. 생물학적 필요는 이제 화폐가 있어야만 충족된다. 과거의 노예, 장인, 귀족 중 누가 하던 일을 하든, 그 일로 화폐를 벌어들여야 먹고산다. 결국 모든 일이 ‘노동’으로 수렴하고 우리는 모두 노동자가 되었다. 노동은 화폐로 환산되는 한에서만 가치를 인정받는다. 그 가치가 높아야 자신과 가족의 배를 채운다. 그러나 밥벌이야말로 귀하다지만, 누구든 밥벌이만으로 인생을 채우기를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일을 둘러싼 모순은 여기에서 비롯한다. 우리는 먹고살기 위한 욕구를, 창조하고픈 욕구를,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일 하나로 해결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10)
1 표류하는 우리: 일의 배신
1 일일 뿐인데
길을 잃었다는 느낌
일에서 의미를 찾지 못해 괴로움을 토로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런 괴로움이 애초에 사회의 구조 탓이라고 이야기하는 목소리가 있다. 일에 과도하게 의미를 부여하고 ‘좋아하는 일’을 좇도록 이끄는 것이야말로 자본의 새로운 착취 전략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속지 말라는 조언은 공허하다. 이왕이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마음, 그 일을 잘해내고 싶은 마음, 그 일에 밥벌이 이상의 의미가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어느 쪽에 유리하든, 그 마음은 이미 내 마음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두 편으로 나뉜다. 자본의 착취 전략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가닿지 않은 곳에서 사람들은 일을 사랑해야 한다는 말을 진리로 받아들인다. 좋아하는 일을 찾지 못해 슬퍼하거나 좋아하는 일을 더 잘하지 못해 슬퍼한다. 다른 한쪽에선 일을 향한 열정을 부끄러워하는 이들이 있다. 일에 의미를 부여하고 일을 통해 자기를 실현하려는 욕구가 마치 명품 가방을 사려고 돈을 모으는 마음과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일에 열을 올리는 것만으로 ‘착취하는 자본’의 한편이 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일에 지나친 의미를 부여하며 사랑에 빠지는 것은 나를 책임져주지 않을 상대에게 몸과 마음을 다 바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결국 이쪽이든 저쪽이든 형편은 녹록지 않다. (26)
| 한곳에 머무를 수 없다 |
일과 나, 그 사이의 거리
2 우리가 일에 투사하는 욕망들
어떻게 일하고 싶은가
| 욕망들 사이의 우선순위
매슬로의 욕구 단계설에 따르면 사람들의 욕구는 위계를 따라 가장 1차적인 생리적 욕구로부터 안전에 대한 욕구, 소속과 사랑에 대한 욕구, 자존의 욕구, 그리고 가장 고차원적인 자아 실현의 욕구로 차례차례 나아간다. 즉 1차적인 욕구가 충족되고 나서야 그보다 고차원적인 욕구를 품게 된다는 의미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배가 고픈 사람은 사랑이나 인정에 대한 욕구가 없다. 그러나 현실에서 사람들의 욕구는 이런 식의 위계를 기계적으로 따르지 않는다. 매슬로 자신도 일부 사람은 이런 도식에서 벗어난 욕구 체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심지어 한 사람을 놓고 보아도 욕구의 위계는 때에 따라 상황에 따라 변한다. 매슬로의 이론은 세상의 상식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일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상의 상식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이다. 세상이 말하는 우선순위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세상이 내 인생의 결정에 권력을 행사하도록 내버려두는 것과 다르지 않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다각적인 욕구와 그 사이의 우선순위, 그리고 상호작용을 이해하는 것이다. (43)
| 내게 가장 중요한 조건은 무엇인가
일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은 일을 이루는 활동, 일이 낳는 결과와 함께 일이 놓인 차원과 일을 통해 형성되는 국면을 이해하는 일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어떻게 일하고 싶은가?”라는 문제를 훨씬 더 정교하게 구성하게 된다. 무슨 일을 어디서 누구와 얼마나 오랫동안 어떤 형식으로 할 것인가? 재미있는 일을 원한다면 나는 어떤 것에서 가장 큰 재미를 느끼는가? 나는 어떤 상황을 가장 견딜 수 없어하는가? 돈을 벌어야 한다면 얼마를 벌어야 하는가? 나에게 가장 가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어째서 그것을 가장 가치 있게 생각하는가? 구체적으로 일을 고민할 때, 내 욕망들 사이의 우선순위를 이해할 때, 그때만 우리는 일의 다른 실천으로 나아갈 수 있다. 해답은 사표일 수도, 전직이나 이직일 수도, 창업일 수도, 부업일 수도 있다. 물론 현재의 자리가 최선이라는 답이 나올 수도 있다. 당분간 지금 자리에 머물며 준비할 것의 목록을 답으로 얻을 수도 있다. 그 해답은 우리의 일을 재구성할 것이고, 일이 재구성되면 필연적으로 삶이, 삶이 놓인 관계망이 재편될 것이다. 많은 사람이 입버릇처럼 ‘일하기 싫다’고 말하지만 싫은 것은 대개 일 자체라기보다 일이 놓인 조건이다. 그저 싫다, 괴롭다 토로하는 대신 정확히 어떤 부분이 싫은지 구체적으로 파고들어야 한다. 거기서부터 무엇이든 하나씩 지금과는 ‘다르게’ 해보아야 비로소 실마리가 드러난다. (49)
3 일은 언제나 기대를 배반한다
“좋아하는 일을 하라”는 주문
번역가 정영목은 돈벌이를 해야 하는 현실을 받아들였지만 돈을 많이 버는 것만을 무조건 좇지는 않았다. 돈은 덜 될지언정 정말 하기 싫은 것을 피할 수 있었던 일이 번역이었다. 그렇게 번역가가 되고 2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다. 내 눈에 그는 자신의 일을 좋아하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정영목의 선택이 자신의 호불호와 현실 사이의 냉정한 타협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랬기에 ‘관성’이라는 것이 생겨났다고 믿는다. 그 관성이 “번역할 책을 제가 고를 수 있는 위치”로 그를 데려다 주었다. 때로 지극히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이유가 “그 일이 제 가슴을 뛰게 해요”라는 이유보다 훨씬 오래가는 동력을 선사하기도 한다. “번역할 책을 제가 고를 수 있는 위치”에 이르고 나서야 번역가로서 자의식이 생겼다는 그의 말에는 중요한 교훈이 담겨 있다. ‘일을 향한 열정만이 성공의 필수 조건’이라는 흔한 말보다 훨씬 현실적인 교훈이다. (55)
“50대 초반 한 금융기업 부장 ㄷ씨”의 ‘가상 사표’에 등장하는 이야기다. “퇴직하고 나면 우리 가족 브랜드를 만들어 경영해보자는 이야기를 종종 나눕니다. 애들은 요리에 관심 있고 만화와 소설이 좋다니 출판업도 좋습니다. 제 아이들은 저처럼 좋아하는 일이 아닌 데 시간 쓰면서 살지 않길 바랍니다” 20년 넘게 ‘일’했던 ㄷ씨는 어쩌다 일에 대해 이렇게 낭만적인 환상을 품게 되었을까. ‘요리에 관심 있으니 요식업’, ‘만화와 소설이 좋다니 출판업’ 식의 생각은 얼핏 보면 ‘좋아하는 일을 하라’는 흔한 가르침을 따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요리는 요식업의 일부에 지나지 않고, 만화와 소설을 좋아한다고 출판업을 잘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ㄷ씨와 그의 아이들이 좋아하는 요리, 만화와 소설은 일이 아니다. 요식업의 일에는 진상 손님과 승강이를 벌이는 것도 포함된다. 재료비와 인건비를 따져서 음식 값을 정하느라 골머리를 앓는 것도 들어 있다. 이런 일로 하루 대여섯 시간을 보내는 일상을 맞닥뜨리면 ㄷ씨는 바로 이렇게 생각할지 모른다. ‘이건 내가 좋아하는 일이 아니었어.’ 그가 꿈꾸는 요식업에는 어떤 리얼리티도 없다. (물론 요리에 관심이 있어 요식업에 발을 들인다고 해서 무조건 포기하란 법은 없다. 요리 이외의 고단한 잡무를 견뎌내는 사람도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지점에 다다르려면 ‘요리를 좋아하는 것’을 넘어서는 훨씬 많은 것이 필요하다.) 그에 반해 “가르치러 왔다고 남의 집 대문을 두드”릴 필요가 없어 좋은 일이 현실에선 오히려 진짜 좋아하는 일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56)
│일은 직업보다 크다
정답을 향해 곧바로 돌진할 수 있는 운 좋은 사람도 있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운이 따르지 않았다면 분명히 아닌 것을 하나씩 지워가는 것도 나쁘지 않은 전략이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욕망에 대한 데이터가 쌓인다. 이런저런 재미를 느끼는 ‘일ㅡ들’을 만나게 된다. 어떤 일을 ‘좋아한다’는 것은 다양한 요소로 이루어진 상태이기 때문이다.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큰 문제가 있는 것처럼 생각할 필요는 없다. 열정을 가질 대상이 있어야 한다는 강박에 쫓겨 하나의 일을 이상화하는 것보다 오히려 나을지도 모른다. 더구나 내가 변화하고 성장하는 만큼 좋아하는 일 또한 달라질 수 있다. 일이 놓인 조건이 변하면서 좋아하던 일이 좋아하지 않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좋아하는 일을 이상화하며 집착하다 보면 오히려 그 모든 변화를 놓칠 수도 있다. 결국 좋아하지 않는 일을 좋아하는 일이라 착각하며 유통기한 끝난 열정을 쏟아붇기도 한다. (59)
|‘좋아하는 일’이 성립할 조건
좋아하는 일이라고 모든 면이 좋은 것도 아니다. 어떤 일을 좋아하는 일이라고 부르면서도 ‘그래도 싫은 부분’을 구체적으로 말할 수 없다면 아직은 그 일을 잘 모르는 것이다. ‘그 좋아함이 성립하는 조건’을 충분히 구체적으로 규정할 수 없다면 ‘좋아한다고 지금 생각하는 일’일 가능성이 크다. 열정이나 꿈, ‘좋아하는 일’ 같은 말이 절대적 목표인 양 추구되니, 일의 리얼리티 앞에서 모두가 속수무책이다. ‘좋아하는 일을 하라’는 말은 그래서 위험하다. 그 일이 놓인 조건, 일이 포함하는 다양한 활동, 그 안에서 맺게 되는 관계를 아우르며 총체적으로 일을 바라보아야 한다. 일이 놓인 조건에 만족하는 것과 일 자체에 만족하는 것은 다르지만 그 둘은 늘 서로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것은 언제나 조건과 상태를 전제한다. ‘좋아한다’의 대상은 겉으로 드러나는 목적어와 함께 그 목적어가 놓인 상태를 늘 포함할 수밖에 없다. 구체적인 상태와 조건을 포함하여 하나의 일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어야 비로소 우리는 현실적인 ‘애호’를 갖게 된다. 이제 그 일이 이루는 일상을 살아낼 준비를 마친 셈이다. 결코 즐겁기만 할 수 없는 일의 현실에 부딪혔을 때 많은 사람이 ‘어, 실은 내가 좋아하는 일이 아니었네’라는 실망으로 금세 치닫는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정확히 무슨 이유로 나는 지금 이 일이 좋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나아간다. 이 질문의 답을 하나씩 찾아나가면서 비로소 좋아하는 일의 조건을 깨닫게 된다. 자신의 애호가 작동하는 조건을 구체적으로 규정해나가는 것이다. 그래야 비로소 그 조건들을 하나씩 실현하기 위해 노력할 수 있다. “그 일의 무엇이 좋고 무엇은 싫은데, 이런 이런 조건에서는 그 일이 좋다” 정도로는 말할 수 있어야 진짜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65)
일의 세계에 발을 들인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도 나는 단 하나의 좋아하는 일을 찾지 못했다. 내가 찾은 나름의 해결책은 내 일을 포트폴리오처럼 꾸려가는 것이다. 일에 대한 서로 다른 욕망들을 이해하고 그 사이에서 적절한 타협과 균형을 이뤄줄 일거리의 조합을 만들려고 애쓴다. 적당한 돈벌이와 적당한 사회적 의미와 적당한 자아 실현을 조합하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나의 최선이다. 욕망 사이의 우선 순위는 나이에 따라, 상황에 따라 변화해왔다. 그래서 내 일의 조합 역시 늘 변하고 있다. (66)
4 가면이 필요한 순간들
위선 혹은 위악
│연기해야 한다면, 대본은 내가 쓴다
내가 직장을 떠난 지도 3년이 넘었다. 이제 한 직장에 속해 있지는 않지만 가면 쓰기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것은 아니다. 나는 여전히 일을 위해 이러저런 가면을 쓴다. 상황에 맞춰, 사람에 맞춰 상냥해져야 하고, 화난 연기를 해야 하고, 쑥스러움을 숨긴 채 느물느물 굴어야 한다. 그렇지만 예전처럼 비애감을 느끼지는 않는다. 무엇이 진짜 나의 얼굴인지, 온전한 나인지 고민하지도 않는다. 그 가면들이 결국은 모두 나의 얼굴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중에 진짜인 것과 가짜인 것은 없다. 사실 모든 인간에겐 여러 역할이 있는 만큼 얼굴도 여러 개가 있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역할과 상황에 따라 적절한 얼굴을 꺼내 보이는 것이 어른스러운 일이다. (75)
돌이켜보건대, 그 시절 내가 슬픔을 느꼈던 것은 내가 보이는 얼굴이 가면에 불과해서가 아니었다. 그 가면을 써야 하는 이유를 충분히 납득하지 못했던 것이 문제였다. 이해할 수 없는 대본을 연기해야 하는 배우가 느끼는 당혹감이 아마 이런 것이리라. 자리가 어떤 얼굴을 원하는 것 같아서가 아니라 일이 되려면 필요해서라고 스스로 믿을 때 우리는 그 얼굴을 조금 더 쉽게 꺼내 보일 수 있게 된다. 여기에 더해 그 일의 목표와 가치를 스스로 믿고 있다면 가면 쓰기에 서글픔이 끼어들 여지는 별로 없다. 지나친 자기애에 빠져 있다면 적절한 가면을 쓸 수 없다. 관계 맺기에 대한 두려움으로 움츠려 있을 때도 마찬가지다. 적절한 거리를 두고 일과 환경을 바라볼 때만 우리는 기꺼이 가면을 쓸 수 있다. 더 ㅁ낳은 종류의 가면을 쓸 수 있어야 그 주체는 ‘사회적’인 주체일 것이다. (77)
2 지도를 다시 읽다: 일에서 원하는 것
5 당신의 욕망은 얼마인가
당신 숫자는 무엇인가
현실에서 일은 ‘그저 돈벌이’도 아니고, ‘감히 돈벌이’도 아니다. 사람은 다층적 존재이며 현실의 삶에는 수많은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일에도 여러 결이 존재한다. 브레튼의 일은 돈벌이의 결 하나만을 인정한다. 브레튼 앞에서 그 외의 다른 결을 이야기하는 것은 한가하거나 순진해빠진 소리다. 일을 이렇게 돈벌이의 결로 환원해버리는 것이 합당하지 못하듯이 일에 존재하는 돈벌이의 결을 무시하는 것도 똑같이 현실을 부인하는 태도다. 돈벌이가 전부라는 중독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돈벌이의 무게를 부인하지 않아야 얼마큼의 돈벌이를 감당하며 살아갈지 냉정히 판단할 수 있다. 거기서부터 시작이다. 물론 돈과 보람과 즐거움 모두를 원하는 만큼 주는 일자리는 세상에 없다. 그러나 적어도 셋 사이의 균형점을 고민해볼 수 있어야 한다. 얼마큼의 보람을 위해 얼마큼의 돈벌이를 포기할 수 있는지. 또 얼마큼의 돈벌이를 위해 얼마큼의 즐거움을 내려놓을 수 있는지. 어쩌면 일에 대해 고민한다는 것은 문제를 정교하게 구성하는 작업일지 모른다. 일을 그저 돈벌이라고, 혹은 사회적 헌신이라고, 혹은 꿈을 이루기 위한 것이라고 뭉뚱그린다면 우리가 머릿속에 그리는 일은 늘 현실에서 몇 발자국 떨어진 환상일 것이다. 덜컹거리는 현실에서 그나마 최선으로 일하려면 일을 이루는 수많은 결을 하나하나 발라내 균형을 맞춰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함으로써 우리는 일의 다른 실천으로 나아갈 가능성을 포착할 수 있을 것이다. (88)
│필요와 욕구에는 가격표가 있다
| 돈의 구속력에서 한 뼘 놓여나기
돈을 적게 쓰는 삶의 구조를 만들기 위해 욕구를 무작정 줄여야 한다면 그 구조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 나는 인간 욕구의 총량을 줄일 수 있다고는 믿지 않는다. 우리는 그저 하나의 욕구를 다른 욕구로 대체할 수 있을 뿐이다. 욕구를 대체하려면 삶의 다른 배치로 들어가야 한다. 저비용 구조로 자신의 욕구를 재편하고 싶다면 다른 장소와 다른 관계망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일상에서 무엇을 하고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듣는지, 어떤 사람과 시간을 보내는지가 우리 욕구의 많은 부분을 결정한다. 다른 종류의 활동을 하고, 다른 종류의 관계를 맺고, 다른 종류의 경험을 시도하지 않는다면 다른 종류의 욕구가 생길 리 만무하다. (99)
6 돈 되는 일만 일일까
‘잉여짓’은 왜 일이 아니란 말인가
| 시장의 가격표를 넘어서는 일하기
오늘날의 일반적인 가족 구조는 돈벌이 노동과 가사 노동 그리고 돈벌이의 예비 과정을 한 세트로 묶어내는 단위나 다름없다. 급진적 사상가 이반 일리치는 이렇게 “상보적이면서도 서로 배타적인 두 종료의 노동ㅡ하나는 주로 남성에게, 또 하나는 여성에게 부과된ㅡ을 연결하는 매개로 존재”하는 가족의 개념은 역사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노라고 이야기한다. 가족은 언제나 경제의 단위로서 기능해왔지만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노동 사이에 이렇게 뚜렷한 위계가 생겨난 것은 산업화의 산물이다. 일에서만 위계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비슷한 방식으로 ‘놀이’에도 위계가 생긴다. 돈 잘 버는 사업가가 휴가를 내 만화를 본다면 그 모습에 잉여라는 단어를 떠올릴 사람은 드물 것이다. 사업가의 만화 보기는 나중에 열띤 돈벌이를 위한 재충전인 셈이다. 그에 반해 직업 없는 백수가 방바닥과 합체되어 만화를 보는 모습은 그야말로 완벽한 잉여의 그림이다. 재충전으로서의 놀이는 돈벌이 노동을 보조한다는 의미에서 일의 연장선상에 놓인다. 돈 버는 사람에게만 허락되는 종류의 놀이인 셈이다. 놀이를 포함한 인간의 모든 활동에 ‘생산성’이라는 잣대가 드리워진다. (109)
오늘날 사회가 따르는 일의 규정은 산업사회의 것이다. 브루니와 자마니는 현대사회가 골머리를 썩고 있는 실업 문제를 해결하려면 ‘일자리 활동job activity’의 개념과 그보다 훨씬 큰 ‘일work activity’의 개념을 나누어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실업이라는 용어는 일자리 활동의 범주에서만 의미를 얻는다. 두 학자의 주장에 따르면 탈산업화사회는 일에 대한 수요가 충족되지 않은 채 넘쳐나는데도 동시에 일자리 부족, 즉 실업의 문제로 고통받는다. 풀어 쓰자면 일자리 활동, 즉 돈벌이 노동의 수요는 줄어 실업률은 점점 높아지지만 일 자체의 수요는 줄지 않고 오히려 늘어난다는 것이다. 일자리 활동이 아닌 일에는 우리가 이른바 잉여짓이라고 칭하는 각종 문화 활동이나 이른바 ‘관계재relational goods’를 생산하는 사회적 돌봄 활동이 포함될 수 있다. 일을 고용 중심으로 규정하는 산업 시대의 사고방식에서 이제 벗어나야 한다. 일의 규정을 고용시장 바깥에서 벌어지는 활동까지 아우를 만큼 넓히지 않는다면 ‘고용 없는 성장’ 시대를 극복할 방법은 없다. 이를 위해서는 복지에 대한 새로운 정의, 일에 대한 새로운 보상 체계가 필요할 것이다. (110)
돈벌이라는 목적에 딱 필요한 만큼만 일을 추구한다면 우리의 일은 점점 더 빛을 잃어갈 것이 뻔하다. 일은 즐거운 활동이 될 수도, 스스로 뿌듯함을 느낄 정체성이 될 수도 없다. 역량을 키울 수 있는 배움의 장이 될 수도, 사회에 의미를 보태는 공헌이 될 수도 없다. 그러면 이런 무수한 다른 욕구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 일이 돈벌이로 전락한 사회에서 그 모든 다른 욕구가 돈 쓰기에 쓸어 담기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돈을 벌지 못한다면 돈을 쓸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리하여 결국 돈벌이를 하지 못하면 다른 욕구도 채울 수 없게 된다. 이런 구도에서 자유로워지는 방법이 없는 것 같지는 않다. 자신의 욕구를 이해하고 그 욕구를 담아내는 일을 스스로 시작하면 그것이 자신을 설명하는 하나의 스토리가 되어준다. 그 일이 언젠가 그들에게 진짜 그럴듯한 돈벌이까지(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나) 되어줄지는 모르지만, 그걸 원한다면 그럴 가능성도 적지 않을 것이다. (112)
시장이 나의 활동에 금전적 대가를 지불하느냐 아니냐는 물론 중요한 문제다. 시장을 경유하여 의식주를 해결할 수밖에 없는 사회에서 시장으로부터 완벽히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그러나 자신이 일하는 자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고 그 조건과 자격을 규정하기 위해 시장의 가격표를 참조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어느 정도 카지노에 발을 걸치고 살 수밖에 없다. 카지노에 발을 걸쳤다면 “내게 칩은 필요 없어”라는 말은 허락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칩을 늘리는 것만을 목표로 삼으라는 명령에 따를지, 스스로 ‘일하는 자ㅡ됨’을 규정할 자유를 택할지,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우리에겐 더 많은 ‘쓸데없는 일’, 잉여짓이 필요하다. 그것이야말로 돈과 시장을 경유하지 않고도 즐거울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 쓸데없는 일이 늘 재미있기만 하라는 법은 없다. 그 쓸데없는 일도 역시 우리에게 좌절을 안기기도 하고 피로함을 일으키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규정한 일에서만 우리는 그러한 좌절과 피로를 즐거움의 일부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일하는 자ㅡ됨’의 윤리란 그런 것이 아닐까. (115)
7 놀듯이 일하거나 일하듯이 놀거나
일과 놀이가 분리된 세상
요한 하위징아는 ‘놀이’야말로 인간을 규정하는 중요한 특징이라고 보았던 역사학자다. 하위징아가 꼽는 놀이의 중요한 특징은 바로 ‘~인 체하기only pretending’다. 놀이를 가리키는 영어 단어 ‘플레이play’에는 ‘연극’이나 ‘연기’라는 의미도 있다. 현실과는 다르게 작동하는 무대를 갖는다는 점에서 연극과 놀이는 같은 것이 될 수 있다. 다시 말해 놀이가 ‘체하기’의 특성을 갖는다는 것은 놀이가 현실과는 별개로 작동하는 고유의 층위를 갖는다는 뜻이다. 아이들의 인형놀이나 소꿉놀이, 모든 종류의 스포츠나 게임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골대에 공을 집어넣는 것은 축구라는 스포츠의 층위에서만 의미 있는 일일 뿐이다. 놀이는 현실 위에 고유한 가상의 세계를 드리운다. 놀이에 열중하다 보면 어느 순간 그 고유의 층위가 유일한 층위처럼 느껴진다. ‘체하기’의 감각이 사라져버린다. 그 순간 놀이하는 사람에게 놀이와 현실의 구분은 존재하지 않는다. (120)
‘놀 듯이 일하고 일하듯이 논다’는 것이 ‘열정을 갖고 일하라’는 말과 꼭 같은 것은 아니다. 하위징아가 이야기한 놀이의 특성을 다시 생각해보자. 그에 따르면 일을 놀이처럼 한다는 것은, 첫째로는 일에 새로운 층위를 창조한다는 의미다. 둘째로는 그 층위 밖의 것을 잊을 만큼 몰입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열정 자체가 그 일을 놀이로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열정의 대상은 일 자체일 수도, 일의 성과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성과에 열정을 품는 사람은 마지막에야 일이 주는 기쁨을 누린다. 그런 사람에게 일의 과정은 마지막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성과가 나오지 않으면 과정은 무의미해진다. 아무리 열정을 쏟아도 그런 과정은 놀이가 될 수 없다. 돈을 버는 재미나 인정받는 재미는 놀이의 재미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놀 듯이’ 일할 때 열정의 대상이 되는 것은 스스로 부여한 층위에서 일어나는 활동 그 자체다. 놀이가 되는 일에서 일하는 이는 자신만의 기준을 가진다. 현실에서 작동하는 성과 평가의 기준은 더 이상 그의 일을 한계 짓지 않는다. 상사의 인정, 그 덕에 주어지는 승진이나 급여 인상을 마다할 이유야 없겠지만 오직 그 때문에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 인정이나 승진, 보너스가 주어지기 ‘전에’ 그는 이미 일을 즐기고 있다. (122)
│놀이 같은 일의 함정
8 자발성 없이는 재미도 없다
“어떤 재미가 지속 가능하려면 자발성이 깔려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모든 놀이가 사실 그러하다. 자발적이지 않은 것은 본질적으로 놀이가 될 수 없다. |
일의 네 가지 재미
국어사전에 ‘재미’가 어떻게 정의되어 있는지는 몰라도 나에게 재미란 여러 종류가 있다. 첫째, 그 활동 자체가 주는 재미다. 이런 재미는 심리학자 미하이 칙센트미하이가 말한, 이른바 ‘몰입’의 재미와 가까울 것이다. 한 번 몰입의 재미를 느꼈다고 해서 그 일이 언제나 재미있는 것은 아니다. 똑같은 상황, 똑같은 자극이 반복될 대 그 활동에 매번 몰입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래서 대체로 많은 사람이 재미있다고 여기는 것은 숙련도에 따라 자극의 종류가 달라지거나 날씨처럼 매번 다른 환경 변수가 주어지는 활동이다. 그밖에도 몰입의 재미를 방해하는 요소는 아무리 일이 재미있더라도 공정한 보상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 계속되는 것이다. 두 번째 재미는 원하는 판을 짜서 일하는 재미다. 이것은 자기 결정권의 문제다. 세 번째는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재미다. 재미를 좇아도 생산성을 낼 수 있는 이유다. 여기서 말하는 결과물이란 ‘성과’와 같은 말이 아니다. 결과물이 좋다고 성과가 늘 좋은 것도 아니다. 글 쓰는 일을 예로 들면 결과물이란 글 자체다. 네 번째는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재미다. 혼자 하거나 잘 맞지 않는 사람과 할 때는 재미없던 일도 맘이 맞는 사람과 합을 맞추면 재미있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네 가지 재미를 모두 주는 단 하나의 일은 애석하게도 아직 만나보지 못했다. 사실 그런 일이 있을 거라고 기대하지도 않는다. 완벽하게 재미 있는 일은 없을 것이고 일에는 늘 괴로운 구석이 있기 마련이다. 문제는 그 일이 주는 어떤 종류의 재미가 그 괴로움을 뛰어넘느냐다. (135)
│치열할 자유가 곧 느슨할 자유
3 시대의 사막을 건너는 법: 내리막 세상의 일하기
9 하나의 직업이 나를 설명할 수 없다면
이력서가 내 삶의 역사
삶의 역사가 일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것은 일이 세상과의 접점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행위가 일로서 인정받는 기준은 그 행위의 결과가 세상에 내놓아지느냐 아니냐에 있다. (그리고 자본주의 세계에서 그 ‘내놓아지는’ 장은 99퍼센트의 경우 시장이다) 아무리 공을 들인다해도 혼자 골방에서 시작해 골방에서 끝내는 일이라면 일이라 불릴 수 없다. 고로 일을 하면서 세상에 성과를 내놓지 못하고 실패를 거듭한다면 사람은 자신을 못난 존재로 여기기 쉽다. 순전한 놀이와는 다르다. 놀이를 하면서 실패를 거듭한다고 자신을 쓸모없는 존재라 여길 사람은 없다. 애초에 놀이에서 뭘 못한다고 해서 거기에 성공이니 실패니 이름 붙이지도 않는다. 비슷한 이유로 일자리를 빼앗긴 사람, 다시 말해 회사에서 ‘필요 없는 존재’라고 규정당한 사람은 자존감에 큰 상처를 받으며 자기 비하에 빠지기 쉽다. 한 회사에서 필요 없는 존재라는 규정이 ‘어디서나’ 무능력하고 쓸모없는 존재라는 의미가 아님에도 그렇다. 여태껏 성공 가도를 달려왔고, 객관적으로 보아도 유능한 인재이며, 얼마 안 가 다시 일자리를 갖게 될 것이 뻔한 사람인데도 그렇다. 갑작스레 일을 빼앗긴 사람은 본능적으로, 감정적으로 그렇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좋았든 싫었든,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일이 곧 외부에 드러난 자신의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갑작스레 자신의 얼굴을 강탈당한 셈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직종으로나 지위로나 큰 차이가 있는 여러 직업을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내가 커피숍 알바일 때와 대기업의 직원일 때, 대학의 교수일 때와 연구실 조교일 때 사람들이 나를 대하는 방식은 천양지차다. 직업이 곧 내 정체성은 아니라고 믿는 것이 무의미해지는 순간들이다. 정체성이란 내가 생각하는 나를 가리키는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정체성은 스스로 만드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세상이 부여하는 것이기도 하다. (157)
| 직업이 정체성이 되어줄 수 있을까
사정이 이러니 ‘직업’과 ‘직위’라는, 세상이 딱지 붙인 정체성을 기꺼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은 사회와 끝내 불화하는 기분을 떨쳐버리기 어렵다. 얻어 쓴 가면을 얼굴에 붙이고 사는 듯한 느낌에 시달리기도 한다. 문제는 마음만 다잡는다고 일을 정체성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일이 정체성이 되려면 세 가지 조건 중 최소한 하나는 만족시켜야 한다. 1) 역량의 확장을 가져다주는 적당히 도전적인 일. 일을 하는 자신을 스스로 멋지다고 여길 수 있으면 자연스럽게 일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게 된다. 사람은 자기가 하는 일들 중에 가장 어렵고 도전적인 일과 자신을 동일시하기 마련이다. 자신의 역량의 20퍼센트만 써도 되는 일을 사랑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럼에도 그 일이 좋다고 말한다면 그 일이 아니라 그 일이 주는 대가가 좋은 것이다. 2) 경제적 안정을 주는 일. 그 일을 기반 삼아 미래를 설계할 수 있다면 나를 이루는 일부로 그 일을 받아들이려 최소한 애쓰게 될 것이다. 그 일이 오래도록 가족을 먹이고 즐거운 노후의 기반을 선사할 것이라고 믿어도 좋다면 일상의 고단함과 비천함도 어느 정도 인내할 수 있다. 3) 공동체적 결속을 주는 일. 일을 통해 맺는 관계망 안에서 환영받고 보호받는다는 느낌을 받는다면 나는 오래도록 그 공동체의 일원이길 소망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일을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고자 애쓸 것이 틀림없다. 일터를 하나의 공동체로 표방하는 많은 대안 조직에서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하다. |
아프게도 오늘날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직장은 대개 저 중에 하나도 담보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더구나 이 셋은 보통 긴밀하게 얽혀있다. 이런 일자리는 열에 하나도 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고, 여기에는 어떤 경제 문화적 계층에서 태어났느냐가 중요한 변수로 작용한다. 현실은 모두 같은 선상에서 출발하는 공평한 게임이 아니다. 나를 사회 속에 정박시켜줄 지속 가능한 준거점도, 리스크를 공유할 장기적 공동체도 없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 더욱 중요한 진실은 우리 스스로 고정된 준거점도 속박하는 공동체도 원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하여 어찌할 바 없이 요구되는 것은 기꺼이 변화를 껴안으며, 스스로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도 괜찮아라는 자신감만이 비빌 언덕이다. 준거점 없음을 준거점으로, 정박지 없음을 정박지로 삼아야 하는 아이러니. 그 아이러니를 감싸 안지 않고서는 살아갈 도리가 없다. 여러 가능성을 동시에 상상하고 그것에 몸과 마음을 대비시키는 것. 변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며 그것을 자신의 과거와 연결되는 하나의 서사 속에 통합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오늘날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선택지다. 분열에 고통받는대신 분열을 껴안는 것. 그리하여 나는 누구인가를 물을 것이 아니라 나는 이 모든 일을 통해 어떤 ‘이야기’를 발견할 것인가를 물어야 할지도. (160)
10 몇 시에 퇴근할지도 모르는 세상인데
예측성과 통제력의 상실
| 시시포스는 어떻게 돌 굴리기를 견딜까
우리의 일이 시시포스의 돌 굴리기가 될 때 일은 견뎌야 하는 노동으로 환원된다. 노동labor은 일work과 동의어가 아니다. 우리의 일에 노동인 구석이 전혀 없을 수는 없는 것이 현실이다.
고되기 짝이 없는 시시포스의 노동을 견디게 하는 동력은 무엇일까? 크게 넷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1) 말할 것도 없이 생계유지에 대한 공포다. 산업화가 시작되었을 때 사람들이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에서 통제를 받으며 일하는 상황을 받아들이게 하는 것은 쉽지 않은 싸움이었다. 자본주의가 도래하기 이전에 시간과 장소를 통제받으며 일해야 했던 것은 노예뿐이었다. 먹고사는 일이야 그때도 쉽지 않았겠지만 몇 시부터 몇 시까지 한데 모여 일하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 강제된 의무는 아니었다. 공장제 노동이 도입되면서부터 자본은 사람들을 고용해 한곳에서 정해진 만큼 일하도록 강제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그런 강제를 달갑지 않게 여겼음은 당연하다. 그래서 “자신들이 바라지도 않았고 이해하지도 못한, 그리고 대부분이 자신의 의지로 선택하지도 않았을 노동 방식의 불편함과 당혹스러움을 감수”하도록 동원된 가장 효과적이면서도 강력한 비법은 선택의 여지를 없애버리는 것이었다. 사회는 고용 밖의 일자리를 체계적으로 없애갔고 고용되지 않은 이들에게 닥친 운명은 절대적 빈곤이었다. 이제 일터에 매인 노동은 모두에게 좋든 싫든 피할 수 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둘째, 윤리적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돌 굴리기를 견뎌낸다. 윤리적 의미는 공포라는 동력보다 분명히 나은 면이 있다. 보람이라는 부산물을 챙길 수 있기 때문이다. 돌 굴리기에 부여하는 윤리적 의미는 여러 가지 일 수 있다. 가장 전통적으로는 성실성을 찬양하는 노동 윤리의 관점이 있고 ‘활동’에 몸담은 이들의 윤리적 의미는 훨씬 사회적이다. 소명의식과 윤리적 자부심은 폄하할 것이 아니다. 그러나 활동가에게 돌 굴리기의 노고는 일상이다. 의식과 윤리적 의무감만으로 기꺼이 일상을 견뎌낼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다. 셋째, 언젠가는 돌 굴리기를 멈출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다. 이게 바로 자기 계발의 신화가 우리에게 선물하는 동력이다. 열정을 다해 일한다면 고단한 노동에서 해방되어 부와 성공을 거머쥘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돌 굴리기를 견디게 한다는 이야기다. 넷째, 역량의 성장이 주는 기쁨 그 자체다. 이때 돌 굴리기는 무엇을 위한 수단이 아닌, 그 자체가 목적인 활동이 된다. |
시시포스의 노동을 완전히 피할 수 없다면 공포는 최대한 줄이면서 나머지 셋을 적절히 조합하는 것이 현실적인 선택이다. 윤리적 의미만으로는 바짝 당겨지기만 하던 활시위가 끊어져버릴지 모른다. 성공의 희망만으로 산다면 자신의 믿음에 배신당할 위험이 있다. 성장의 기쁨만으로 산다면 어느 순간 허무함에 빠질 수도, 손쉽게 회사에 이용당할 수도 있다. 우리에겐 의미도 희망도 필요하며, 하루하루를 채우는 순전한 즐거움도 필요하다. 어느 하나에만 의지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지속 가능하지 않은 이유다. 이 세가지 요소를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바로 ‘동료’의 존재다. 함께 돌을 굴리는 사람들을 인식하면 끝나지 않는 고된 돌 굴리기를 잠시 멈출 수도, 또는 전혀 다른 종류의 활동으로 만들 수도 있게 된다. (176)
11 개미도 베짱이도 될 수 없다
버림받는 개미
지그문트 바우만은 <새로운 빈곤>에서 산업화가 시작되던 시기에 노동 윤리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을 공장에 끌어다 앉히려던 시도에 대해 이야기한다. 당시의 ‘새로운’ 노동 윤리는 장인의 성실성을 요구하면서도 장인을 장인답게 만드는 자긍심과 주체성을 원하지는 않았다. “의미나 목표 따위는 잊어라. 날마다, 한 시간 한 시간을 온힘을 다해 일하라. 노력해야 할 이유를 전혀 모르겠더라도, 노력의 의미를 알 수 없더라도.” 그리하여 바우만의 지적대로 노동 윤리를 전파하려는 노력은 다름 아닌 권력투쟁이었다. 자본은 노동이 무조건 가치 있는 것이라고 사람들을 설득해야 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사람들이 공장의 질서 안에 갇혀 파편화된 활동만 거듭하는 일상을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그 결과 일에 대한 새로운 정의가 탄생했다. 내 멋대로 일을 ‘일’이라고 부를 수 있는 시대는 끝났다. 사회가, 보다 정확히는 시장이 가치 있다고 인정하는 활동, 한마디로 돈으로 대가를 받을 수 있는 활동, 팔릴 수 있고 구매될 수 있는 활동만이 일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브루니와 자마니의 표현을 다시 가져오면 일은 ‘일자리 활동’으로 축소되어버렸다. 그러나 실제로 사람들을 공장으로 몰아붙였던 것은 노동 윤리라기보다는 빈곤에의 공포였다. 윤리는 언제나 그렇듯, 현상 뒤에 온다. 성실성을 찬양하던 노동 윤리는 산업화 초창기의 빛을 잃었지만 현실은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대량생산 체제 밖에서 살아가는 일은 그때보다 오히려 더 상상하기 어렵다. 여기에 빈곤의 공포에 맞먹게 우리를 노동의 장으로 몰아붙이는 공포가 하나 더 있다. 바로 사회로부터의 배제다. 일은 생계 수단이 되어줄 뿐만 아니라 사회 관계망 속에 자리를 마련해준다. 어디에서 어떤 일을 하는가가 사회 속 그의 자리를 결정짓고 그의 성취를 말해준다. 상황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것은 일이 의무락 아니라 권리라고 부르짖어야 하는 세태다. (185)
│즐거움이 강박이 된 베짱이
베짱이는 개미 못지않게 성실하지만 그의 성실함은 의무를 이행하는 성실함이 아니다. 개미가 성실하기 때문에 오늘을 견뎠다면 베짱이는 즐기므로 그 결과로서 성실한 자다. 베짱이는 의무감 때문이 아니라 너무 즐거워 끊임없이 일해야 한다. 즐기지 못한다면 ‘아름답지’ 못하며, 고로 오늘의 기준으로 치자면 무능력하다. 과거의 노동 윤리는 그나마 모두에게 허락된 것이었다. 성실성은 누구나 갖출 수 있는 덕목이었으며, 성실한 것만으로도 의무를 다했다는 만족감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 단순히 시간을 들인다고 자신의 가치를 증명할 수는 없다. 이제 우리는 일을 ‘즐겨야’ 한다. 일자리는 더 이상 우리를 억압해선 안 된다. 억압받고 있다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바로 즐기지 못하는 루저가 된다. (188)
| 나를 위한 일의 윤리
나는 내 일을 잘하고 싶지만 일을 향한 동기가 생존을 위한 처절한 위기의식이거나 경쟁에서 승리하려는 승부욕만이길 바라지 않는다. 나는 내일을 사랑하고 싶지만 그 결과가 ‘남 좋은 일’이길 바라지 않는다. 나는 지는 것을 싫어하지만 이기지 않으면 내 일의 의막 없어지는 식으로 일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좋은 성과를 내놓고 싶지만 그 성과에 대한 평가를 외부의 판관에게 온전히 맡기고 싶지 않다.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지만 “좋아하는 이릉ㄹ 하면 돈은 따라올 것이다”라는 말이 사기라는 것은 안다. <K팝 스타>에서처럼 ‘열정적으로’ 일하고 싶지만 <K팝 스타>에서와 같은 취급을 받고 싶지는 않다는 이야기다. (191)
돈벌이를 위한 노동임을 알면서도 시간 때우기 이상을 하게 만드는 동기는 어디서 올 수 있을까. 일과 사랑에 빠지면서도 열정 노동의 함정을 피해갈 방법은 무엇일까. 일에 헌신하되, 우리는 기꺼이 이해득실을 따져보아야 한다. 그래야 뒤늦게 일에 배신당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그 이해득실의 셈법이 세상의 방식 하나만 있으란 법은 없다. 돈벌이의 셈법과 놀이의 셈법, 공동체의 셈법 사이에서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셈법을 찾아야 한다. 그런 자기만의 셈법 위에서 이뤄지는 헌신만이 새로운 방식의 장인 정신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그 지점에서만이 비로소 씁쓸함 없이 기꺼이 달인이 되고 기꺼이 베짱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여전히 일에서 좇고 싶은 가치가 있다면, 식상할지 모르겠지만 결국은 ‘행복할 권리’일 것이다. (194)
12 연습을 허용하지 않는 사회
잠재력이라는 잣대
끊임없는 자기 계발 말고도 인재가 갖춰야 할 덕목이 또 하나 있다. 언제나 즐겁고 열정에 불타올라야 한다. 일에 대한 애정은 잠재력의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일 중독자’라 칭한다면 반성처럼 들리는 자기 자랑이기 쉽다. 많은 경우 이들이 사랑하는 것은 일 자체가 아니다. 끊임없는 자신의 존재 증명, 일을 멈춘다면 자신의 가치가 사라질지 모른다는 감각이 그들을 지배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끊임없이 일로 회귀하며, 무엇이든 일과 연결 짓는 열정가가 사랑하는 것은 사실 일이 아니라 대상화된 ‘자기’다. 그 ‘자기’를 더욱 아름답게 완성해나가려면 일이 필요한 것이다. 결국 일에 중독된 사람은 자기에 중독된 사람일지도 모른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홀린 나르키소스처럼 거울을 보는 자신의 시선은 잠재력을 요구하는 세상의 시선과 꼭 닮아 있다. (203)
│관객 없이 일하기
실제로 달성한 결과의 가치가 자신의 가치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어떤 가치를 갖는다고 인식되느냐다. 평가와 보상이 결과가 나오기 전에 이미 주어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주식시장과 다를 바 없다. 그리하여 ‘인식’이 진짜 ‘현실’이 된다. (205)
자기 계발론의 설파가 사회구조의 탓까지 개인의 탓으로 돌리게 한다는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기꺼이 잠재력을 늘리고자 애쓰면서 거리낌 없이 자기 계발에 힘써도 좋을 전제 조건은 무엇일까? 늘어난 잠재력과 자기 계발의 역량이 그저 ‘기존 구조에 부합하는 것’이 아닐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일까? 자기 계발을 설파하는 목소리들은 빠짐없이 ‘자기 주도’를 말하고, 자유롭게 꿈을 추구하여 ‘자기를 실현’하는 개인을 이상화한다. ‘내가 주인공인 인생’이라는 캐치프레이즈가 대표적이다. 이 말의 이면에는 오히려 자신을 하나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숨어 있다. 자신이 주인공이 된 하나의 드라마를 완성해야 한다는 생각, 그 드라마 속의 나는 인정받아야 하고 그럴 만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드라마는 언제나 관객을 전제로 한다. 웃거나 울거나, 박수를 보내거나 야유하거나 하는 관객이 있어야만 드라마는 성립한다. 고로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려면 늘 관객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드라마의 ‘주인공’은 사실 드라마의 ‘주인’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하는 일이 내재적으로 가치 있다고 느끼는 것”에는 관객이 필요하지 않다. 여기서의 가치는 평가받는 가치가 아니라 일 자체에 담긴 ‘내재적’ 가치다. 거기에는 탐구의 기쁨이 있다. 세넷은 첼로 연주의 기능을 익히면서 느끼는 순전한 탐구의 기쁨을 이렇게 표현한다. “정교하고 자유롭게 음을 구사함으로써 그 자체로 그것만으로 심오한 기쁨을, 타인의 승인 없이 스스로 가치 있다는 감각을 경험했다.” 바로 자존감을 주는 경험이다. 세넷은 루소를 인용하면서 자존감AMOUR DE SOI과 자존심AMOUR-PROPRE을 나누어 설명한다. 자존감이 “세상에서 자신을 스스로 지탱할 수 있다는 확신”이라면 자존심은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고 싶다는, 그래서 그들에게 높이 평가받고 싶다는 욕망”이다. 자존심은 베버가 말하는 노동 윤리의 핵심이며, 능력주의가 불러일으키는 욕망이다. 자존심보다는 자존감으로 동기를 부여받을 수 있는 사람만이 ‘관객’으로부터 자유롭게, 오히려 진짜 ‘자기 주도적으로’ 일의 기쁨을 추구할 수 있다 .(208)
‘지극히 개인적인 동기부여’는 자신이 믿는 가치를 추구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 주인공으로서의 ‘나’에 대한 탐닉에서 벗어나 세상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자신이 믿는 가치가 무엇인지가 드러난다. 세상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지라는 것이 현실을 무시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우리는 어쨌건 현실에서 먹고살아야 하며, 현실에 두 발을 붙이고 걸어가야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삶을 꾸려나가기 위한 필요를 아는 것과 끊임없이 세상의 시선으로 자신을 점수매기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스스로 부여하는 가치, 일 자체에 대한 탐구가 주는 순수한 기쁨이야말로 자유로움의 감각을 선사한다. 타인의 승인이 있기 전에 자신이 가장 먼저 역량의 확대를 확인한다. 그 순간 우리가 느끼는 감각이 바로 자유로움이다. (210)
4 함께 가닿을 정착지: 행복한 일을 위한 플랫폼
13 누군가가 아니라‘나’를 필요로 하는 곳
등가교환의 관계
│나 없이도 잘 돌아가는 회사
등가교환의 관계는 서로의 서로에 대한 의존을 등가라는 가상 뒤에 숨겨버린다. 등가교환은 모든 것을 양적 가치로 환산함으로써 교환 가능한 것으로 만든다. 그 결과 모든 질적 차이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취급된다. 양적 차이로 환산되지 않는 질적 차이는 불편함을 자아낼 뿐이다. 모든 사람은 인력으로 셈해지고, 그리하여 대체 가능해진다. (223)
어떤 사람이 대체 불가능한 존재가 되면 기업의 평가 시스템으로 점수 매겨지는 ‘능력’ 때문일 수는 없다. 대체 불가능성은 능력의 양이 아니라 그 사람의 존재가 만들어내는 질적 차이에서 온다. 그런 대체 불가능성이 현실에서 효력을 발휘하려면 그 차이를 발견해주는 조직이, 즉 사람‘들’이 필요하다. 기업에서 우리가 언제나 대체 가능한 인력으로 소모되는 이유는 단순하다. 기업이 대체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능력을 갈고닦는다고 해서 대체 불가능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대체 불가능한 사람이 되려면 등가성을 따지지 않고 내 존재의 의미를 발견해주는 일터에서 일해야 한다. 내 존재 자체를 일의 규정에 포함해주는 일터가 필요하다. (231)
| 차이를 받아들이는 공동체
14 행복한 일터의 가능성
회사의 주인은 누구인가
│‘돈’이 어디에서 왔는가
| 주인 되는 일
직접 주인으로 나선 이의 운명이 보통 기업 직원들의 운명보다 핑크빛이라는 법은 없다. 기업의 주인이 누가 되었든 일단 시장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소유권이 있는 사람에게는 적어도 선택권이 있다. 무엇을 얼마큼 원하며, 그를 위해 얼마큼 비용을 치를지 직접 고민하고 결정한다. 스스로 주인인 사람에게 일의 선택은 객관식이 아니라 주관식이다. 그제야 우리는 일의 의미를 애써 찾아내는 대신 만들어갈 수 있다. (248)
15 내리막 세상에서‘함께’일하기
중간만 가서는‘남들만큼’살 수 없다
리프킨은 <노동의 종말>에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의 활동이 고용시장 밖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으며, 그런 활동을 공동체 서비스에 담아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의 공동체 서비스란 전통적인 고용 행위나 경제 생산 활동에서 벗어난 사회적 서비스와 봉사 활동, 각종 문화 예술 활동을 모두 아우르는 말이다. 이 책에서 예로 든 많은 사람들은 자신만의 언어로 일을 정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의 출발은 언제나 자신의 일에서 필요한 것과 원하는 것을 이해하는 데서부터였다. 일로부터 얼마큼의 돈, 어떤 의미와 재미, 어떤 관계를 원하는지, 각각에 얼마큼의 대가를 치를 준비가 되어 있는지 알지 못한다면 행복한 일은 끝끝내 우리의 몫이 되지 못할 것이다. (255)
| 새로운 일, 새로운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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