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을 까는 여자들>
1부. 이대녀로 산다는 것
국회 보좌관은 왜 다 중년 남성일까 _신민주
2명의 4급 보좌관은 50대 남성, 2명의 5급 비서관은 30~40대 남성, 1명의 6급 비서는 40대 남성. 나는 8급 비서였다. 1명의 비서가 퇴사 예정이었기 때문에 사무실에 있는 9명의 직원 중 여성은 나 포함 딱 2명이었다. 내가 틀렸고, 항의 전화를 한 사람이 맞았다. 그가 말한 대로 나는 정책을 담당하는 의원실 직원 중 가장 어렸고, 가장 직급이 낮았으며, 유일한 여성이었고, 그래서 결정권도 발언권도 작았다. “더 높은 사람”은 실제로 나이 많은 남성이었다. (19)
정치는 젊은 여성에게 기회를 주지 않으면서 젊은 여성들의 능력을 탓하기 바빴다. 구색 맞추기로 딱 한 명, 아주 소수의 여성이 정치에 진입하는 것을 허가하고 그들이 여성혐오와 외롭게 싸우는 동안에는 방관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이 마침내 나가떨어졌을 때 “거봐, 여자들은 멘탈이 약해서 안된다니까”라는 말을 뒤에서 했다. (24)
남초 사이트에서 ‘공정한 여론’ 찾기 _로라
페미니즘의 언어는 어떤 목소리가 사회적으로 더 중요하게 여겨지고, 어떤 목소리가 사회적으로 덜 중요하게 여겨지는지에 관한 사유를 제공해주었다. 그리고 여성들의 목소리는 다른 어떤 목소리들보다 특히 중요하지 않게 여겨지는 현실이 있었다. 여성들이 겪는 문제들은 사회적으로 잘 다루어지지 않았고, 쉽게 개인적인 것으로 축소되거나, 그들의 결함에 의한 것으로 비난받았다. 이러한 페미니즘적 인식이 대중적으로 가시화되면서, ‘여성’들의 문제를 사회적이고 구조적인 것으로 해석하고, 그런 관점에서 해결책을 모색하려는 여러 운동들이 생겼다. (55)
남초 사이트를 언급하는 정치인들의 발언에는 어떤 전제가 있다. 여자-페미들의 목소리를 너무 많이 들어주었고, 상대적으로 무시되고 있는 남자들의 목소리도 들어봐야 한다는 인식이 그것이다. 정치권에서는 남초 사이트의 여론을 의식하고, 그것을 의식하고 있다고 당당하게 선언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편파적인 게 아니라 오히려 공정하다는 인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 공정할까? 남초 사이트에도 다양한 갈래들이 있고, ‘남초’라는 지칭만으로 그들이 공유하고 있는 어떤 문화나 합의를 찾아내려는 노력은 가끔 난망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적어도 정치권이 인지하는 ‘남초’라는 합의에는 어떤 일관성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페미니즘과 페미니스트들에게 적대적이며, 사회적 소수자 혹은 차별이라는 개념에 회의적이고, (마치 그들의 말을 들으려는 정치인들이 그러한 것처럼) ‘공정’이라는 가치를 수호하고자 한다. 정치권이 번역하고자 하는 ‘남초’의 합의란 ‘평등은 불공정하다’는 믿음, ‘차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믿음, 그리고 차별을 시정하기 위한 노력은 ‘역차별’이라는 믿음에 크게 기대고 있다. (57)
3부. 우리가 가진 이름으로
원피스와 탈코르셋 _신민주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 여성은 꾸미지 않으면 ‘꼬질이 벌점’을 받고, 꾸미고 오면 ‘직장의 꽃’ 취급을 받고, 노력과 능력에 상관없이 ‘젊은 여자’라는 신분이 한 개인을 앞지른다. (174)
가해자의 죽음을 추모한 사람들 _로라
페미니즘 운동이 가해자를 나락에 빠뜨리는 데 집중해왔다는 사실부터가 오해지만(페미니즘 운동이 가해자에 대해 달성하고 싶은 목표가 있었다면 그건 적절한 처벌과 재발 방지 대책일 것이다), 고발만으로 정말 나락에 빠지는 것인지도 의문이다. 공인에 대한 성폭력 고발이 있은 후에 피해자를 적극적으로 공격해서 피해자를 ‘믿을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온 전사가 이미 많이 있었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성폭력 사건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들은 가해자를 완전한 무죄로 추정하고자 할 때 자연스럽게 피해자는 ‘무고죄의 가해자’로 상정하게 된다는 사실은 외면한다. 무죄 추정의 원칙이 그토록 중요한 것이라면, 왜 피해자는 그 대상이 될 수 없을까? 왜 피해자는 폭로와 고발의 순간부터 거짓말쟁이라는 인식과 싸워야 하는 것일까? (199)
기성세대 정치인들은 여전히 정치를 진보와 보수의 이분법으로 바라본다. 보수 성향의 정당을 경계하기 위해서는 진보 성향의 정당에 지지율을 모아줘야 한다고 너무 쉽게 생각한다. 거대 진보 정당을 민주주의의 마지막 보루라고 이야기하면서 그 외의 사안은 ‘나중에’ 생각해도 된다고, 정치가 대의를 위해 무언가를 포기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정치가 포기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삶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그 정치를 신뢰할 수 있을까? 어떻게 그 정치의 일원이 될 수 있을까? 이대녀는 어떻게 정치의 주체가 될 수 있을까? 이대녀들의 삶은 정치 의안에서 충분히 고려되고 있는 것일까? 정치가 가장 고통받고 있는 가장 약한 개인을 외면한다면 진보고 보수고 무슨 소용일까? (201)
정치판에도 송은이가 필요하다 _신민주
좋아했던 소수의 페미니스트 정치인들이 내가 도저히 지지할 수 없는 안티페미 공약을 들고 온 후보들의 선거 캠프에 들어가는 것이 예전에는 너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선택들을 왜 하는지 이해가 될 것도 같았다. 여자들이 깐 판이 없는 한, 다른 게임판의 말이 되는 것은 필연적인 선택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비슷한 선택지를 택하고 싶지는 않았다. 적당히 타협해서 높은 자리에 오른 후에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면 된다는 말이 쉽게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말 그렇게 성공하고 나면 우리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순간이 오는 것일까. 그때까지 기다리느라 우리가 침묵하게 된다면, 후대의 이대녀들은 지원군 없는 세상에서 또다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우리는 그들에게 어떤 의미로 남게 될 것인가. (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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