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결혼하지 않는 도시>
소설 제목에 끌려 읽게 된 책
20세기 한국 사회의 부동산 개발, 민주주의를 쟁취해낸 근현대사에서부터
그들의 2,3세가 살아내고 있는 21세기 결혼의 의미에 대한 탐구까지
객관적 사건과 통계 데이터로 접하는 현실들을 소설의 캐릭터로 접했을 때 또다른 감동으로 다가왔다.
제도적인 틀로서의 '결혼'에 들어가지 않아도 다양한 형태의 사랑이 이미 존재하고 있고
그들의 사랑을 폄하해선 안된다는 것.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는 이러한 인간들이 뉴-노멀이 될 것임이 자명하다.
우리 사회의 그릇도 폭이 넓어지길 기대해본다.
1부. 타인의 침범
영임은 사랑을 믿지 않았다. 오직 어리석은 여자들만이 사랑이라는 몹쓸 전염병에 걸려 순결을 잃는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고향 청도에서 이름 높았던 언니의 아름다움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며 탈출을 꿈꾸었다. 과수원집 순이 언니는 온양온천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다음날부터 열 살이나 많은 남편에게 매를 맞았다. 남편이 몽둥이를 들면 시어머니와 시누이가 며느리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매를 맞아 온몸이 퉁퉁 부어오른 여자는 어둠을 틈타 친정으로 피신했다. 하지만 출가외인이 돌아오는 것을 반기는 친정 식구는 없었다. (14)
남자들은 성욕과 사랑을 혼동했다. 그들은 여자를 소유했다는 기쁨은 느끼는 순간, 아름다움이 소멸되었음을 알고 권태로 몸을 떨었다. 권태는 분노로, 분노는 폭력으로, 여자에게 재앙이 되어 돌아왔다. (14)
2부. 신기루와 오아시스
우연히 조선의 이름난 기생이었던 황진이의 일화를 발견했다. 한나는 에전 자신의 엉덩이를 만지며 추행을 일삼던 중년 남자가 '황진이'라는 유행가를 부르던 기억을 떠올렸다. 황진이라는 여자의 값싼 이미지는 노래 탓이 컸다. 그녀가 남자들의 영혼을 빼앗는 팜므파탈일지는 몰라도 한나에게는 그저 오래전에 살았던 요부나 창기에 불과했다. 그러나 문헌에 기록된 그녀의 실제 모습은 대중 문화 속 이미지와 달랐다. <어우야담>의 저자 유몽인은 황진이의 용모와 미색에 대해 미사여구를 늘어놓지 않았다. 다만 그녀를 두고 "여성 가운데 뜻이 크고 호협한 사람이었다"라는 한 문장으로 묘사했다. 그녀는 금강산이 천하 명산이라는 말을 듣고 재상집 자제 이생원을 회유해 김 유람을 떠난다. 일용할 양식은 흩어진 절집들에 구걸하거나 승려들에게 몸을 팔아 해결했다. 책을 덮고 나니 눈앞이 캄캄해졌다. 단지 수백 년 전 살았던 여자의 특이한 행적으로 치부하기에는 과감한 결단력과 실행력이 충격이었다. 그녀가 원했던 것은 금강산의 아름다움을 제 눈으로 확인하는 일이었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 승려에게 몸을 파는 것조차 꺼리지 않았다. 아니라고 하지만 한나는 자신의 몸을 소중하게 여겼다. 소중하게? 그녀는 쓴웃음을 지었다. 정결과 순결을 봉건시대의 유물이라 업신여기면서 실상은 이성과의 성적 접촉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남자들은 왜 여자들의 몸을 소중하게 여길까. 해답은 단순했다. 여자는 남성의 재산이었다. 그러나 황진이는 한 남자의 독점적 재산이 아니었다. 이러한 연유로 그녀는 자신의 몸을 두고 흥정을 벌일 수 있었다. 결혼을 매매춘의 형태로 이해하는 것은 지나친 확대해석일 수 있지만 결혼 제도는 분명 기형적인 모습으로 진화했다. 여자들은 왜 이런 불합리한 제도를 기꺼이 받아들인 것일가. 결혼이 일부일처제를 지키는 방패막이라는 구태의연한 논리만으로는 부족하다. (143)
그들이 사는 20층 아파트에는 다양한 커플들이 모여 살았다. 법적인 결혼보다는 사랑해서 함께 사는 것에 만족하는 이들이 더 많았다. 동성 커플, 비혼남과 비혼모, 서로 다른 인종과 나이 차를 극복한 커플, 정확하지는 않아도 다수의 파트너와 교제하는 커플도 있었다. 한나는 이웃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 배가 불러오기 시작했지만 강의를 듣고 과제를 준비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누구도 그녀를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결혼은 했는지, 아이 아버지는 누구인지, 앞으로 어떻게 살 계획인지 묻는 사람은 없었다. (185)
3부. 이곳이 평행세계라면
"내가 그 친구와 실패한 이유는 표면적으로는 질투심 때문이었어요. 하지만 실제로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 탓이었습니다. 사랑하면 결혼해야 되고, 결혼하면 소유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알게 모르게 이 강박적인 도식에 사로잡혀 있었던 거죠. 그렇지 않다면 그처럼 비정상적인 감정에 빠져 관계를 망쳐버리지도 않았을 거예요. 이런 서로의 불안까지도 포용하는 일이 진짜 사랑인 건데 전 그렇게 하지 못했죠." (263)
"사랑 없는 결혼생활을 경험한 사람보다 결혼 없이 사랑을 느낀 사람들이 더 많잖아요. 우린 결혼하기 위해 태어난 게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 태어난 거예요." (264)
"문명사회에서 행복한 결혼생활을 이루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들이 충족돼야만 해요. 우선 부부가 완벽한 평등 상태를 이뤄야 되고, 서로의 자유에 간섭하지 말아야 하죠. 자유란, 결혼 이후에 벌어질 자유로운 연애까지도 포함하니까요. 이건 사실 100년 전 러셀이 <결혼과 도덕>에서 한 말이에요." (265)
그의 제안은 결혼이 행복의 원천이라고 믿는 사람들의 고정관념에도 충격을 던졌다. 결혼은 법률이라는 테두리에서 벗어나 다양성으로 진화해야만 했다. 그러나 늘 그러했듯 역사의 진보는 더디게 흘러갔다. 한쪽이 밀면 다른 한쪽은 당기며 균형을 맞추려고 했다.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보수적인 주장은 소멸되지 않았다. 결혼 이후의 자유로운 연애는 여전히 불륜이라는 이름으로 공격받았다. 결혼을 거부한 채 선택적 결합을 이어가는 커플에 대한 불만과 의심 역시 종식되지 않았다. (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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