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주의 감정수업>
(519쪽)
이미 대중철학자로 유명한 강신주 철학박사의 책
스피노자의 48개 감정에 대한 정의를 바탕으로 세계문학과 연결지어 풀어냈다
프롤로그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내 마음을 채우고 있는 감정을 표현하는 순간, 엄청난 불이익이 나의 신상에 몰려올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지 않은가. 이런 위험을 피하기 위해 감정들을 미리 교살하는 것이 좋고, 그것도 여의찮다면 감정이 얼굴빛이나 행동에 나타나지 않도록 숙련해야만 한다. 감정을 죽이는 것, 혹은 감정을 누르는 것은 불행일 수밖에 없다. 살아 있으면서 죽은 척하는 것이 어떻게 행복이겠는가. 그러니 다시 감정을 살려내야만 한다. 이것은 삶의 본능이자 삶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17)
감정은 용수철과 같다. 누르면 누를수록 더 큰 반발력을 갖기 마련이니까. 어느 순간 감정은 마치 자신이 혁명가라도 된 것처럼 자기 위에 군림하려던 이성을 자기 발아래 굴복시키게 된다. 이것이 비극의 순간일까? 아니다. 모든 사회적 통념에 맞서 당당하게 자신의 감정을 지키겠다는 결단은, 주인공을 통념의 노예가 아니라 삶의 주체로 만드는 것이니까. (19)
1부. 땅의 속삭임
비루함 - 비루함이란 슬픔 때문에 자기에 대해 정당한 것 이하로 느끼는 것이다. ‘슬픔’은 어떤 타자가 나의 삶의 의지를 꺾으려고 할 때 발생하는 감정이다. 이런 슬픔이 반복되면 누구나 비루함에 빠져들게 될 것이다. (33)
경탄 – 평범하고, 심지어는 권태롭기까지 하던 잿빛 삶이 핑크빛을 띠게 되는 기적을 그 누가 바라지 않겠는가? 이런 기적과도 같은 기쁨을 선사하는 사람이 여신 혹은 신처럼 느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그, 혹은 그녀가 아니었다면 결코 나에게 찾아오리라고는 기대할 수 없었던 감정이기 때문이다. 결국 내 마음속에 애인에 대한 경탄이 없어졌다면, 사랑은 이미 덧없는 옛이야기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48)
경쟁심 – 내가 저 사람을 얼마만큼 사랑하는지 알고 싶다면, 그와 헤어져 있을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해서, 헤어져 있다는 게 생각만 해도 힘들다면 나는 그만큼 그 사랑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숲 안에서는 숲의 전체 모양을 제대로 파악하기 힘든 것과 마찬가지다. (60)
우정과 사랑의 감정을 우리는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우정과 사랑은 모두 어떤 타인과의 만남에서 기쁨을 느끼는 감정, 그러니까 자신이 과거보다 더 완전해졌다는 뿌듯함이 드는 감정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기쁨을 주던 사람과 헤어지게 될 때, 우리는 그제야 우정과 사랑을 구분할 수 있다. 헤어져 있을 때, 우리의 슬픔이 어떤 강도로 발생하는지에 따라 우정과 사랑은 구분된다. 슬픔이 너무나 크다면, 아무리 우정이라고 우겨도 그것은 사랑이다. 반면 슬픔이 생각보다 작다면, 표면적으로는 사랑의 관계라 해도 그것은 우정에 불과한 것이다. 결국 우정과 사랑은 질적인 차이가 있는 감정이 아니라, 양적인 차이 혹은 정도상의 차이만 있는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우정이든 사랑이든, 경쟁심은 반드시 개입되기 마련이다. 우정이나 사랑의 감정에 빠지면 우리는 상대방이 욕망하는 것을 나도 욕망하는 과정을 꼭 겪을 수밖에 없으니까. 그러니 이렇게 자신의 감정을 점검하면 좋을 것 같다. 싫어하지 않는 어떤 사람과 묘한 경쟁 관계에 들어갈 때, 여러분들을 우정, 혹은 심하면 사랑의 관계에 들어서고 있는 건 아닐까. 여기서 ‘싫어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단서가 중요하다. 하긴 미워하는 사람과 경쟁 관계에 들어간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지만. (66)
야심 – 스피노자의 말대로 야심은 모든 감정을 키우며 강화하는 욕망이다. 그러니까 야심이란 둘 사이의 관계 혹은 나와 사물이나 사건 사이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자연스러운 감정이나 욕망과는 다른 것이다. 이 양자의 관계 바깥에 있는 제3자로부터 관심과 존경을 받으려는 것이 야심이기 때문이다. (71)
사랑 – 사랑에 빠진 사람의 표어가 ‘당신 뜻대로’인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상대방을 붙잡아 두기 위해 우리는 그가 원하는 것을 가급적 해 주려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랑은 헌신적인 것이라고 섣부른 오해는 하지 말자. 상대방의 뜻을 존중하는 것은 상대방을 내 곁에 머물도록 하기 위함이다. 상대방이 내 곁에 있어야 행복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당신 뜻대로’는 일종의 유혹, 내 곁에 있으면 당신은 나라는 사람을 노예로 두고 영원히 존중받을 수 있다는 치명적인 유혹인 셈이다. 어느 누가 이런 매력적인 유혹을 거부할 수 있을까. (80)
대담함 – 스피노자의 정의는 지나치게 평범하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맞서기 두려워하는 위험을 기꺼이 무릅쓰는 것이 대담함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그렇지만 대담함을 일종의 욕망이라고 이야기하는 대목에서 우리는 스피노자의 비범함에 다시 한번 탄복하게 된다. 스피노자에게 욕망이란 기본적으로 기쁨의 증진을 도모하는 작용이기 때문이다. (89)
연민 – 연민이라는 감정은 “타인의 불행에서 생기는 슬픔”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슬픔을 극복하고 기쁨은 회복하려고 한다. “타인의 불행에서 생기는 슬픔”도 슬픔은 슬픔이다. 그러니 어떻게 극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불행히도 연민은 결코 사랑으로 바뀔 수 없다. 왜 그럴까? 타자의 불행을 감지했을 때 출현하는 감정이기에, 연민의 밑바닥에는 다행히 자기는 그런 불행을 겪지 않았다는 것, 나아가 불행한 타자를 도울 수 있는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131)
회한 – 회한이라는 슬픈 감정을 떨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나중에 회한이 없도록 지금 과감하게 선택하고 당당하게 실천하는 것이다. “10년 뒤에도 나는 이렇게 할 것이다. 그리고 다시 태어나도 나는 이렇게 할 것이다.” 이런 마음으로 지금의 무기력과 비겁에 맞서 싸운다면, 어느 사이엔가 과거의 회한은 밝은 태양에 녹아내리는 눈처럼 사라지게 될 것이다. (146) ≒ 니체의 ‘영원 회귀’, 불교의 ‘윤회’, ‘업’ 이랑 비슷한 생각들?
2부. 물의 노래
경멸 – 이사벨은 “지식과 자유가 결합된” 삶, 그러니까 자신만의 스타일대로 살아내는 삶을 꿈꾸었다. 그렇지만 이런 꿈도 사실 일조의 허영이었덤 셈이다. 이사벨은 그렇게 사는 것이 남들이 보기에 가장 멋진 삶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자유롭게 산다는 것과 자유롭게 살고 있는 것으로 보이고 싶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다. (164) 남편을 경멸한다면, 이사벨은 자신도 경멸해야 한다는 사실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자신만의 고유한 삶, 그러니까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충만한 삶을 영위하려면, 이사벨은 경멸하는 과거 자신과 철저히 단절해야 할 뿐만 아니라 경멸하는 대상과도 단절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했던 것이다. (165)
멸시 –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자기들 두 사람을 제외하고 다른 모든 것들은 배경으로 물러나는 특이한 경험을 겪는다. 프로이트가 말했던 것처럼 사랑은 상대방에 대한 일종의 과대평가의 감정을 수반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랑이 언제 우리를 떠나는지 확인할 수 있는 시금석 하나를 얻게 된다. 상대방이 더 이상 내 삶에서 주인공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비교 가능한 사람이 되는 순간이다. (200)
환희 – 매사에 환희를 느끼고 쉽게 감격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해야 할 일에 소극적인 경우가 대부분이고 타인의 결정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경향도 강하다. (256)
영광 – 영광을 추구하는 이면에는 다른 사람에게 당할 멸시나 경멸에 대한 원초적인 두려움이 전제되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 권력과 자본은 진정한 영광의 자리를 오직 한 사람만이 차지할 수 있도록 세팅해 놓았다. 다수를 지배하기 위해서, 소수는 반드시 다수를 깨알처럼 분리시키고 분열시켜야만 한다. 어쨌든 지나치게 영광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기꺼이 고독을 감내해야만 한다. 영광에 집착하는 사람은 사랑과 유대의 가치를 망각하고 타인을 경쟁 상대로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간적인 유대와 사랑을 원하는가? 공존과 공생을 원하는가? 그렇다면 영광을 멀리하고 치욕을 기꺼이 감내할 일이다. 이럴 때 우리에게는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지게 된다. (266)
3부. 불꽃처럼
겸손 – 스피노자의 말처럼 자신의 무능력과 약함을 인정할 때, 누구나 겸손해진다. 그렇다고 겸손에서 무엇인가 비극적인 느낌을 찾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 겸손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자신을 지배하던 해묵은 편견, 허영, 그리고 자만심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자신의 무능력과 약함을 직시할 때, 우리는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지를 정확히 알게 된다. 과거에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제 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안 것이다. 따라서 겸손해진 사람은 이 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무능력과 약함을 느꼈을 뿐이다. 이것은 반대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더 진지하고 성숙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성숙해진 것이다. 그렇지만 지나친 겸손은 우리에게 청년기의 자만심보다 더 심한 해악을 줄 수도 있다. 지나친 겸손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마저도 할 수 없다고 절망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절망은 불가피한 것인지도 모른다. 자만심에서 절망으로 왔다 갔다 해야만 우리는 균형 잡힌 겸손에 이를 수 있는 법이다. 그럴 때 비로소 어른이 된다. 자신의 무능력과 약함도 알지만, 동시에 자신의 능력과 강함도 알게 될 테니까 말이다. (288)
욕정 – 스피노자에 따르면 이성과 성교하고 싶은 욕망 혹은 성교하기를 좋아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욕정이다. 인간의 성교, 그러니까 섹스를 동물적인 것으로 폄하하지는 말자. 그것은 발정기에 종족 보존을 위해 하는 동물의 행동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에게 욕망이나 사랑은 삶의 힘을 유지하거나 증진시킨다고 생각되는 대상을 향하는 법이다. 그렇다면 섹스는 분명 우리 자신의 삶의 힘을 유지하거나 증진시키는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이유에서 인간의 섹스는 종족 보존의 차원에 머물러 있는 동물의 교미와는 다르다고 말할 수 있다. (332) 우리는 섹스를 금기시하면서 동시에 섹스를 신성시하는 이율배반에 빠져 있다. 말을 걸어 보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그렇게 하라! 그 순간 우리는 그 사람이 함께 이야기할 만한 사람인지 확인하게 된다. 다행스럽게도 대화를 할 만한 사람이면 계속 이야기하면 되고, 불행히도 그렇지 않다면 그 사람과 헤어지면 된다. 식사도, 운동도, 여행도, 영화 관람도 모두 마찬가지다.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실제로 좋은 것은 다른 것이다. (338)
공손함 – 자신의 말을 잘 듣는 아이, 즉 투정을 부지리 않고 너무나 의젓한 아이를 보면 어른들은 미소를 띠며 말하곤 한다. “아이가 정말 공손하네요.” 혹은 “참 착하고 순한 아이야.” 그렇지만 이걸 아는가? 아이는 그런 평판을 듣기 위해 얼마나 당신의 욕망에 순종하는지를. 그리고 그만큼 아이는 또 얼마나 자신의 욕망을 부정하고 있는지를. 스피노자의 말대로 공손함이나 온건함은 “사람들의 마음에 드는 일은 하고 그렇지 않은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할 때”의 감정이다. 표면적으로 타인을 배려하는 공동체 의식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타인들, 혹은 공동체에 대한 공포가 드리우고 있는 짙은 그늘을 보아야만 한다. 그러니까 공손한 아이나 온건한 아이는 타인이 화를 폭발할까 봐 자신의 욕망, 그러니까 자신이 마음에 드는 일과 마음에 들지 않은 일을 주장하지 않는 것뿐이다. (373)
미움 – 구멍으로 상징되는 자신의 성기는 에리카의 몸, 그러니까 그녀의 실존을 상징한다. 그렇지만 에리카의 성기는 건강하고 젊은 남자 앞에서 전혀 기능하지 못한다. 이런 무감각이 온몸으로 확산된다는 두려움에 에리카는 처음으로 자신의 삶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깊게 자각하게 된다. 그렇지만 이미 그녀의 아랫도리는 부패하였고, 아랫도리의 부패는 온몸에 퍼져 회복하기 어려운 상태에 이르렀다. 온몸에 만연되어 있는 불감증으로 어떻게 다른 남자를 사랑하고, 또 사랑받을 수 있다는 말인가. (381) 자신은 사실 음악을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어머니는 자기 자식을 음악의 틀 속에 억지로 집어넣는다. 자신은 어머니의 우상이고, 어머니는 자식에게서 그저 약소한 대가를 요구할 뿐인데, 그것은 다름 아닌 자식의 삶 전체인 것이다. (382) 결국 에리카가 할 수 있는 것은 어머니에게 더 이상 자신이 그녀의 소유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는 일밖에 없다. 어머니의 소유물이 되지 않으려고 에리카가 선택한 것은 다른 사람의 소유물이 되는 현장을 어머니가 목격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에리카가 클레머를 선동하여 자기 집에 난입하고 자신을 감금하고 구타하도록 유도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감금과 폭력 앞에 있다는 것은 누군가가 자신을 통제하고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383) 어머니를 죽이는 것으로 에리카는 빼앗긴 자유를 되찾을 수 있을까? 아마도 힘들 것이다. 이미 어머니는 어린 시절부터 딸을 사육함으로써 에리카를 내적으로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현실의 어머니가 아니라 내면에 군림하는 초자아로서의 어머니를 죽이지 않는다면, 에리카는 결코 자유를 회복할 수 없다. 어머니를 죽인다고 하더라도, 에리카는 아무것도 좋아진 것이 없다는 현실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이 진정으로 죽여야 하는 것은 자기 내면의 어머니였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에리카는 절망할 것이다. 결국 자신이 죽어야 모든 것이 끝난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384) 미움의 관계는 반드시 서로 헤어져야만 하는, 그래서 둘 중 하나가 이 세상을 떠나야 끝날 수 있는, 한마디로 저주받은 관계다. 불행히도 함께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있다면, 미움이라는 감정은 상대방을 죽이거나 혹은 자살하는 것으로 우리를 내몰게 된다. (386)
4부. 바람의 흔적
끌림 – 사랑과 끌림을 구분하는 결정적인 계기는 ‘우연’이라는 말이다. 타자와의 마주침에서 발생하는 기쁨이 필연적일 때, 우리는 이 기쁨을 사랑이라고 한다. 반면 그런 기쁨이 우연적일 때, 우리는 그것을 끌림이라고 말해야 한다. 우연적인 기쁨에서 연유하는 끌림은 반드시 그 사람이 아니어도 상관이 없다. 오히려 그가 가진 유머감각, 혹은 부유함 등이 결정적인 작용을 할 수도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상대방이 가진 것이 나에게 매력적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지금 나의 현재 상태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이다. (402)
치욕 – 사회적인 영향력이 없는 남자들이 자랑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짐승과도 같은 야수성과 과감성 아닌가. 지적이라고 확신하는 사람은 자신의 무지가 폭로되었을 때 치욕을 느끼는 것처럼, 거친 야수성을 자랑하는 건달은 자신의 허약성이 폭로될 때 치욕을 느끼기 마련이다. (415)
겁 – 겁이 많은 사람은 실패를 두려워하는 사람이다. 결국 겁이라는 감정에서 빠져나오는 유일한 방법은 현재 자신의 욕망에 몰입하고 그것을 관철시키려는 자세 이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 그러니 더 강한 욕망의 대상을 만나려고 노력해야 한다. 웬만한 욕망의 대상으로는 항상 미래의 실패가 떠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래의 모든 희망과 절망을 염두에 둘 수 없을 정도로, 우리는 아주 매력적인 그리고 강렬한 대상을 만나야만 한다. 너무나 환상적인 공연이어서 현장에 있는 것 자체만으로 지상의 행복을 느낀다면, 내일 시험이 중요하겠는가. 그러니 이런 매혹적인 대상과의 우연적인 마주침을 위해서라도 우리는 움츠러들지 말고 바깥으로 자주 나가야만 한다. 기적과도 같은 우연을 기다리면서 말이다. (428)
희망 – 희망은 어른보다는 아이들이 더 많이 품고 있다. 무슨 이유에서일까? 아이들은 희망이 가진 불확실성보다 그것이 이루어졌을 때 갖게 되는 기쁨에 더 주목하기 때문이다. 어른들은 삶과 미래의 불확실성을 제거하기 위해 기꺼이 희망을 현실이라는 제단에 바치고 만다. 그런데 이걸 알고 있는가? 희망을 낮추거나 아예 없애 버리는 순간, 우리에게는 설레는 미래도 사라진다는 사실을. 이럴 때 그냥 하루하루 매너리즘에 빠진 삶만이 우리에게 남을 뿐이다. 커다란 나무도 작은 씨앗에서부터 시작되는 법이다. 조그만 희망들을 품어 보도록 하자. 그러면 내 마음에 희망은 더욱더 많아질 것이고, 그만큼 기쁨과 행복도 내 곁에 더 머물 테니까. (448)
소심함 – 소심함과 대담함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양극단의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결과가 뜻대로 되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순간, 우리는 매사에 소심하게 된다. 반대로 결과가 항상 자신의 뜻대로 될 것이라고 확신하는 순간, 우리는 모든 일에 대담하게 된다. 그렇지만 소심함에는 미덕이 한 가지 있다. 미래가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소심한 사람은 그다지 충격을 받지 않을 것이다. 항상 실패를 예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대담함에도 예상하기 힘든 후유증이 있긴 하다. 미래를 너무나 낙관적으로 보고 있었기에 대담한 사람은 비관적인 결과가 발생했을 때 심각한 타격을 받을 것이다. 그렇지만 미래란 항상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다. 미래는 나 자신과 타자가 씨줄과 날줄처럼 엮이면서 도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바라는 대로 되었다고 해도 혹은 되지 않았다고 해도 그 원인을 완전히 우리 자신에게만 돌릴 일이 아니다. 여기서 소심한 사람을 대담하게 만드는 하나의 행동 강력을 추천하고 싶다. ‘아님 말고!’ 최선을 다하는 것으로 만족하자는 것이다. 소심함을 극복하려면 그 결과가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아님 말고!’라는 쿨한 자세를 갖는 반복적인 연습이 필요하다. 처음에는 실천하는 것마저 힘들 것이다. 그렇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소심한 자신과는 다른 모습을 조금씩 갖추게 될 것이다. (468)
슬픔 – 절대적인 기쁨이나 절대적인 슬픔 따위는 존재할 수 없다. 우리에게 모든 것은 상대적이거나 조건적일 수밖에 없는 법이다. 새로운 타자가 기쁨의 대상이 되는 만큼, 과거 기쁨을 주었던 타자는 자연스럽게 슬픔의 대상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다. 이건 슬픔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해서 회의주의에 빠질 필요는 없다. 그저 기쁨을 주는 대상이 있다면 그것을 결코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슬픔을 주는 대상이라면 단연코 그것을 제거하거나 아니면 그것으로부터 떠나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다. 여기서 ‘변덕’이나 ‘변심’을 이야기하는 사회적 평판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쿨’해질 필요가 있다. 선택의 결과를 스스로 책임지겠다는 단호한 의지가 아니라면, 우리는 결코 자기 감정의 주인이 될 수 없으니까. 그냥 지금 내 앞에 있는 타자가 기쁨을 주는지, 그렇지 않는지에만 집중하자. (488)
수치심 – 어떻게 해야 노숙자를 하나의 인격체로서 깨울 수 있을까? 아니, 어떤 순간에 노숙자가 자존심을 가진 인간으로 부활할 수 있을까? 제임스 조이스는 더블린 사람들의 총체적인 마비 현상을 다루고 있다. [망자]에서 조이스는 마비, 즉 진짜 감정을 느끼지 못한 채 습관적으로 살아가는 삶으로부터 깨어나기 위해 필요한 한 가지 감정에 주목한다. 그것은 바로 수치심이다. 스피노자에게 ‘치욕이란 우리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비난받는다고 생각되는 자신의 어떤 행동에 대한 관념을 동반하는 슬픔’이라고 정의했다. ‘치욕’은 슬픈 감정인 셈이다. 수치심은 앞으로 치욕을 당하면 어쩌나 하는 공포감이나 소심함으로 드러난다. 수치심을 느낄 때 우리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자신의 행동 또한 강하게 반성할 수밖에 없다. (492)
복수심 – 함무라비 법전을 관철시키려면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이 노예 도덕을 상징한다는 사실을 간파해야만 한다. 강한 자에게 핍박을 받는 약자가 어떻게 강자에게 자신이 당한 것을 되돌려줄 수 있다는 말인가. 복수를 시행할 힘조차 없는데. 약자가 복수를 포기하는 순간, 자신이 강자에게 복수할 수조차 없는 존재라는 자괴감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러나 잊지 말자. 사랑이든 복수든 그것은 오직 자유로운 자, 혹은 강자만이 누릴 수 있는 욕망이라는 사실을. 약자는 원수를 용서할 자격조차 없다. 강자가 되었을 때에만 약자는 원수를 용서할 자격을 갖게 되니까 말이다. 그러니 해악을 당했지만 복수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하다면, 아주 천천히 힘을 키워서 강해져야 한다. 5년이든 10년이든 치욕을 잊지 말고 가슴속에 새겨야 한다. 마침내 해악을 가한 사람보다 압도적인 우위에 있게 되는 날, 우리는 진정 결정할 수 있다. 계획대로 복수를 추진할 수도 있고, 아니면 용서할 수도 있다. (508)
에필로그
감정을 순간적이라고 저주하면서 현재를 부정하는 사람들, 그래서 현재에 살지만 과거나 미래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행동 준칙은 ‘선(Good)’과 ‘악(Evil)’이다. 반면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감정의 목소리에 충실한 사람들이 따르는 행동 준칙은 ‘좋음(good)’과 ‘나쁨(bad)’이다. ‘선과 악’이 대다수 공동체 성원들이 내리는 평가 기준을 의미한다면, ‘좋음과 나쁨’은 다른 누구의 판단이나 평가가 아니라 스스로 내리는 평가 기준을 의미한다. 니체가 선과 악에 ‘Good’과 ‘Evil’이란 대문자를 사용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선과 악은 사회의 안전이나 통념을 위해 어떤 개인이라도 반드시 따라야만 하는 절대적이고 유일한 규범을 상징하니까. 반면 니체는 좋음과 나쁨에 ‘good’과 ‘bad’라는 소문자를 붙인다. 사람마다 좋음과 나쁨의 기준이 다르고 동시에 좋음과 나쁨의 내용도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의 감정을 지키려는 사람들은 우선 선과 악이라는 규범을 버리고 좋음과 나쁨이라는 자기만의 기준에 따라 살아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볼 필요는 없다. 단지 지금 내가 마주하고 있는 대상이 삶을 향한 의지를 강화시켜 준다면, 다시 말해 내 삶에 경쾌함을 준다면, 그것은 ‘좋은’ 것이다. 반대로 삶을 향한 의지를 약화시켜 내 삶을 우울하고 무겁게 만든다면, 그것은 ‘나쁜’ 것이다. (514)
'책 > 심리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천재가 될 수밖에 없었던 아이들의 드라마>, 앨리스 밀러 (0) | 2022.03.23 |
---|---|
<만화로 읽는 아들러 심리학 1,2,3권>, 이와이 도시노리 (0) | 2022.03.21 |
<착한 딸 콤플렉스>, 하인즈 피터 로어 (0) | 2022.03.13 |
<자신에게 너무 가혹한 당신에게>, 일자 샌드 (0) | 2022.02.28 |
<나는 초민감자입니다>, 주디스 올로프 (0) | 2022.02.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