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여행에게 묻습니다
245
1부 여행이란 무엇인가
1장 여행의 시작 : 왜 여행을 떠나고 싶을까
episode 베네치아에서 만난 사람들
도시와 일탈
도시는 우리에게 삶의 형식과 안전망을 제공한다. 그 속에서 우리는 삶의 모든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다. 그러나 바로 그 완벽함 때문에 우리는 도시에서, 그 도시 속에 붙박인 우리의 현실에서 떠나고 싶어진다. 그 이유는 태곳적의 자유에 대한 갈망 때문인지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인간이 언제ᅟᅡᆫ 배은망덕한 자유를 원해 왔으며 시대가 흐르고 세대가 바뀌어도 그 욕망은 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모순적이게도, 변덕스럽게도, 용납하고 싶지 않게도 자유와 안락이라는 두 가지 삶의 방식을 모두 원한다. 인류는 그 두 가지를 모두 성취하기 위해 역사를 발전시켜 왔지만, 현대 기술력의 궁극점인 도시조차도 그 두 가지를 모두 만족시키지는 못한다. 사람은 도시의 안락에 파묻혔다가도, 도시를 떠나는 자유에 몸을 맡기고 싶어 한다. 반대로 지나치게 자유에 노출되면 다시 돌아가 안락해지길 갈망한다. (22)
| 동경과 욕망의 구조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은 이러한 ‘이미지를 향한 갈망’을 인간의 중요한 특성으로 지적한다. 라캉에 의하면, 인간의 정신은 상상계와 상징계로 뒤덮여 있다. 여기에서 상상계란 이미지의 세계이며, 상징계는 언어적 질서의 세계이다. 우리 머릿속은 늘 이미지와 언어로 뒤얽혀 있으며, 영원히 그 두가지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우리는 어떤 이미지나 언어가 우리를 ‘완벽하게 만족시켜 주리라’ 믿으며 욕망하고 나아가지만, 실제로는 무한한 욕망의 연쇄만이 있을 뿐이다. 하나의 이미지를 가지게 되면, 뒤이어 다른 이미지를 욕망한다. 마찬가지로 하나의 언어(의미)를 획득하더라도, 곧 욕망해야 할 다른 언어(의미)가 생긴다. 여행을 향한 욕망은 늘 여행 이상의 것을 포함하고 있다. ‘여행은 단순히 여행이 아니다.’ 거기에는 우리가 가지지 못한 모든 것에 대한 열망들이 집약되어 있다. 여행은 완벽한 만족, 더 이상 나와 세계의 괴리가 없는 상태, 나와 내 삶이 궁극적으로 화해할 것 같은 장소를 가리킨다. 우리가 인간인 한, 이미지와 언어의 지배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인 한 그 현혹에서 벗어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만 적어도 여행에 ‘여행 이상’의 것이 언제나 들어 있다는 사실을 직시할 수는 있다. 여행을 향한 동경과 욕망이 ‘진짜 여행을 하고 싶다’는 열망뿐만 아니라, 온갖 해방과 자유와 낭만이 집약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우리에게는 진자 여행을 향한 가능성이 조금 열린다. 만약, 여행에 포함되어 있는 저 수많은 가치들 즉 자유, 성취, 열정, 행복, 사랑, 낭만 등의 일부를 이미 누리고 있다면 여행에 대한 욕망은 다소 달라질 것이다. 오히려 그럴 때 우리가 열망하는 여행은 더 ‘진짜 여행’에 가까워질 수 있다. 우리가 여행에 수많은 환상을 투사하고 있을 때, 여행은 내 삶의 문제를 모두 해소해 줄 만병통치약으로 왜곡된다. 그러나 내가 내 삶의 조건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음에도 여행을 긍정하고 사랑한다면, 그제야 여행의 진짜 가치가 제대로 발굴되기 시작한다. (26)
| 탈출과 자유
인간의 삶이란 늘 특정한 현실 속에 자기를 심어 넣으면서 만들어진다. 우리는 가장 단순하게는 생존으 ㄹ위해서, 나아가 다양한 만족들을 안정적으로 얻기 위해 현실에 복무한다. 그러나 모든 욕구의 충족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탈출을 꿈꾼다. 자유에 대한 욕망은 어떻게 보면 죽음을 향한 욕망과 닮아 있다. 이 모든 것을 끝장내고 싶다는 마음, 나를 영원히 풀어놓고 싶다는 표백의 욕망은 실제로 죽음으로 실현되기도 한다. (29)
흔히 ‘자유’는 모든 조건과 억압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어떤 ‘순수한 상태’라고 오해되곤 한다. 그러나 인간이라는 한계 속에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그런 자유를 누리는 건 불가능하다. 오히려 자유는 자기가 어떤 현실에 속해 있는지를 아는 것이며, 그러한 현실적 조건들을 어떻게 수정할 수 있는지에 관여하는 것이다. 인간은 항상 어떤 조건 안에 속해 있을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 조건에서 다른 조건으로 옮겨가거나, 자신이 속한 조건을 조금씩 고쳐 내는 것밖에 할 수 없다. 그것이 인간 자유의 속성이자 한계다. (31)
| 현실해방의 효과
때론 여행이 우리의 인생을 더 강화시켜줄 것처럼 이야기하기도 한다. 여행을 다녀옴으로써, 우리는 더 건강하고 활기차게 이 현실에서 살아갈 힘을 얻게 된다고 말이다. 여행의 자기계발적 힘, 혹은 현실에 대한 적응력을 증진시키는 수단으로서 여행을 강조하는 것이다. 나는 다른 방식으로 여행을 말해 보려 한다. 조금 과장한다면, 그것은 ‘삶의 혁명’으로서의 여행이다. 여행을 통해 우리는 현실에 적응하는 힘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에 맞설 수 있는 힘을 얻을 수도 있다. 그런 방식으로 여행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한, 자기 삶에 대한 주인이 되는 과정을 걷게 된다. (34)
2장 여행의 배반 : 남는 건 사진뿐
episode. 프랑스로 떠났던 예술기행
여행의 획일화
여행을 촉발하는 애초의 마음에는 이 현실에서 벗어나 다른 논리의 삶을 살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 조금 더 내가 나다울 수 있는 시간, 보다 주체적이 되고 자유로울 수 있는 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 여행을 향하게 한다. 그러나 그런 ‘믿음’과는 별개로, 여행은 우리가 현실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키워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현실에 적응하는 형식을 키워주게 된다. 이미 인터넷상에 떠돌고 있는 수십만 장 아니 그 이상의 에펠탑, 런던아이, 콜로세움의 사진을 그 앞에 있는 ‘얼굴’만 바꾼 채로 그대로 찍어 온다. (41)
| 여행에 가면 무엇을 하나요?
여행에서 남는 게 사진밖에 없다는 건 아무것도 안 남는다는 말과 같다. 돈을 쓰기 위해 떠난 소비-쾌락 행위로서 여행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다. 그저 돈을 신나게 썼다는 사실 하나, 그리고 돌아오면 그대로 존재하는 현실에 다시 복무하는 일밖에 남지 않는다. 그런 여행은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고, 자아를 성장시키지도 않고, 중요한 의미를 남기지도 않는다. (46)
| 우연과 현실의 형식
3장 여행의 불가능성 : 여행의 역사와 더불어
episode 무언가를 찾아 떠났던 동해
여행의 두 가지 전통 : 그랜드투어와 순례
| 교양과 자아의 불가능성
과거 근대인들은 그랜드투어를 상류사회에 진입하기 위한 통과의례로 여겼으며, 오랜 유럽여행을 해낸 사람에게 훌륭한 교양인이라는 자리를 내주었다. 그들에게는 그런 분위기와 관습이 있었기에 여행을 통한 교양 역시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현대인에게 교수나 작가처럼 지식을 통해 돈을 버는 전문가가 아닌 한, 역사와 철학을 아는 ‘교양인의 자리’는 사실상 무용지물이 되었다. 뿌리 깊은 실용주의 정신, 물질 중심 사회에서 추상적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교양이란 기껏해야 취미의 영역 정도로 떨어진 것이다. (62)
현대의 사람들은 옛날처럼 ‘직접적 관계’를 통해서 공동체를 형성하고, 그 속에서 자기의 자리를 부여받고, 한평생 그 집단 속에서 ‘외면의 삶’을 살아가지 않는다. 대신 저마다 각자의 공간에서 하나뿐인 인생을 살아가며, 내면의 압박, 강박, 자기학대와 자기착취를 통해서 현실의 지배를 받는다. 현실은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추상적 차원에서의 세뇌를 통해 획일화된 인생 형태를 강요한다. 사람들은 그 현실에 지배당해 타자와의 비교, 우월감과 열등감, 모방 본능(유행에 대한 집착) 등에 사로잡혀 빠져나오질 못한 채 인생을 신경증적 상태로 몰아넣는다. 이런 상황 속에서 내면에 관한 성찰이란 그저 쓸모없는 낭비, 이유 없는 몰입, 사회부적응자의 허영 정도로 취급된다. 중요한 것은 최선을 다해 현실의 기준, 즉 타자의 기준에 복무하는 일뿐이다. 남들처럼 사회적 성취를 얻고, 돈을 벌고, 소비를 해야 할 분, 내면이나 자아에 몰입하는 것은 한심하고 어리석은 일이다. 여행의 지위라는 것 역시 타인들이 누리는 소비생활을 따라 누리는 데서 오는 만족감, 그들에게 뒤처지지 않기 위한 강박, 주위 사람들에게 내보이고 떠벌리기 위한 것으로 전락한다. 그런 여행에서 내면의 발견은 존재할 수 없다. 설령, 내면이나 자아를 발견했다 하더라도 돌아오면 원래 그대로의 현실이, 그리고 그러한 현실로 다시 가득 찬 ‘나’가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67)
4장 여행의 재발견 : 배낭여행을 위한 옹호
episode. 처음 떠난 일본으로의 배낭여행
배낭여행의 물음
| 배낭여행의 대답
- 나는 언제나 한국에서건 외국에서건 조금 다른 방식으로 삶을 살아가려는 사람들을 찾으려 애써 왔다. 오랫동안 사람들을 찾고, 만나고, 생각해본 결과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이 세계에는, 이 사회에는 다른 꿈을 꾸고, 다른 삶을 살고, 다른 방식으로 길을 걷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제각기 다른 방법으로 삶을 일구어 나가는 법을 익히고 있었다. 특히 그런 확신을 얻게 된 건 배낭여행의 도움이 컸다. 한국 사람이건 외국 사람이건, 배낭여행 중에 만난 여러 사람들은 내가 사로잡혀 있던 현실을 생각보다 손쉽게 날려 주었다. 물론, 현실을 완전히 무시하고 제멋대로 살겠다고 생각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언제나 우리는 현실을 고려하며 자기 삶을 추구해야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방점은 ‘자기 삶의 추구’에 찍혀야 한다. 자기 삶을 중심에 두고 살아가는 사람은 현실을 고려하면서도, 현실에 장악되지 않을 만큼 자유롭다. 자유는 ‘자기만의 삶’과 ‘이미 정해진 현실’의 중간쯤에서 그 두가지를 조윻라는 힘이다. (80)
| 배낭여행의 반란
결국 여행은 돌아와서 우리가 어떻게 변화하고 성장하느냐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진다. 그 훌륭한 돌아옴을 위해 여행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성찰해야 한다. 우리의 삶에는 변화할 수 있는 기회가 그리 많지 않다. 대다수의 인생은 그저 환경에 따라, 살아온 대로, 남들 살아가는 대로 흘러가며 현실을 강요받는 방식으로 고착화된다. 여행이 만약 삶을 바꿀 수 있는 아주 작은 가능성이라도 품고 있다면, 우리가 여행을 사랑하는 한, 그 여행의 가능성에 매달려 볼 수 있다. 나는 여전히 여행을 사랑하는 사람은 삶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 (85)
2부 여행과 신체
1장 여행자의 신체 : 날것의 몸과 봄
episode. 끊임없이 걸었던 유럽에서의 날들
본다는 것
| 몸과 의식
| 여행에서의 봄
도시의 다른 사람들은 모두 이 도시의 물리적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동시에, 현실에서의 위치라는 추상적 공간 또한 차지하고 있다. 그들은 각기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회사원, 공무원, 법조원이면서 그 사회의 최소 집단 단위인 가족의 구성원이다. 그러나 여행자에게는 그저 몸뚱이 하나만 있을 뿐이다. 물론, 여행자도 사람이고 그들과 말이 통하고 돈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현실 속 존재성이 없다는 점으로 보면 헐벗은 동물, 그저 인간이라는 생물학적 공통점만을 가진 존재가 된다. 그래서 외국의 땅에서는 나와 저 외국인들은 현실로 비교하는 일도 좀처럼 없다. 왜냐하면 진지한 배낭여행객은 그 어느 때보다도 오직 경험과 봄이라는 목적만을 순수하게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배낭여행객의 그런 순수한 목적의식은 낯선 타향에 그를 ‘최초의’ 신체로 던져 놓는다. (98)
| 신체와 신분
우리는 자신의 신분이 놓여 있는 ‘자기가 속한’ 사회, 일반적으로 자신의 나라라는 현실에서 늘 자기 자신을 의식한다. 끊임없는 비교는 사실 그 사람이 자신의 삶에서 충분한 행복에 정착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할 뿐이다. 지금 여기에 자기 자신으로 머물러 있는 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은 우월감이나 열등감을 생산하는 ‘신분의 저울’ 위에서 평생 흔들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그렇지는 않다. 누군가는 자신의 신분보다는 자기의 ‘신체’에 더 가깝게 사는 법을 알고 있다. 그는 나의 신분이 어떻든지 간에, 내가 지금 여기의 존재라는 것을 분명히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내 행복이나 기쁨이 언제나 무수히 이어지는 지금에 달려 있다는 걸 안다. 빼앗긴 ‘지금’을 되돌려 받는 방법은 신분 상승에 있지 않다. 오히려 신분의 층위를 거부하고, 신체의 층위로 내려앉는 데 있다. 보통 사람들의 의식은 끊임없이 더 높은 신분 상승만을 향해 있지만, 자신의 신체에 살 줄 아는 사람은 의식을 다른 곳으로 돌릴 줄 안다. 그곳은 추상적 ‘현실’의 세계가 아니라 언제나 지금 여기에 있는 자신의 ‘삶’이다. 우리가 여행에 내던져졌을 때, 몸에서 일어나는 일은 바로 삶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신분은 사라지고 자유로운 신체만이 남는다. 그런 상태가 두렵고 당황스러울 수도 있지만 그것을 이겨내고 나면, 우리는 진정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최소한의 조건을 얻을 수 있다. 그 조건이 바로 내 ‘신체의 복원’이다. (105)
2장 여행자의 몽상 : 나른한 평안 속의 세상
ep 06. 몽상에 빠져 컴플레인 받은 사연
몽상과 기억
현실에서 바쁘게 특정 목적만을 향해 살아가는 생활은 우리에게 오랜 기억들을 억누른다. 사실 우리의 몸과 마음 안에는 수없이 많은 기억들이 웅크린 채 숨어 있지만, 그런 기억들은 현실 생활에서는 방해만 될 뿐이다. 그러나 여행의 나른한 몽상 상태에서는, 그렇게 억눌려만 있던, 내 몸 곳곳에 각인되어 있던 기억들이 떠오른다. (113)
| 몽상과 이야기
| 몽상과 도시
3장 여행자의 기분 : 공감의 무대로서 분위기
episode 제주도에서 맞이한 첫날의 석양
이미지와 삶
이미지에 대한 강박적 갈망-소유욕은 내 신체를 방치하고 혹사하는 결과를 불러온다. 신체란 언제나 지금 여기에 ‘머물러 있음’으로써만 체험된다. 우리 신체를 둘러싼 풍부한 감각, 오감을 통해 이 세상과 맺는 관계, 그리고 여기 머물러 있는 자기 자신의 신체를 마주하는 ‘자기 자신과의 관계’는 모두 지금 여기에서만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내 바깥의 이미지에 끌려가고 집중할 때, 내 의식은 지금 여기의 신체에서 벗어나 그 이미지를 ‘향하게’ 된다. 그러면 내 신체는 뒷전이 되고, 나아가 그 이미지에 신체가 봉사하고 복종하는 관계가 성립된다. 일상적인 수준에서 봐도, 우리는 텔레비전이나 컴퓨터 앞에 앉아 영상에 홀려 내 신체를 혹사시킨다. 우리는 신체를 망가뜨리는 방식으로 자리에 고정되어 이미지만을 바라본다. (133)
| 이미지와 현재의 풍요
야간기차를 타고 밤새 달려 도착한 어느 바닷가의 아침, 아직 사람들이 모여들지 않은 시간에 우리는 가만히 앉아 세상의 풍요를 경험한다. 서서히 걷히는 바다안개와 반짝이기 시작하는 물결, 들려오는 갈매기 소리 속에서 이제껏 살아왔던 세상과는 전혀 다른 세상에 진입한 느낌을 받는다. 그 독특한 감각은 소비 이미지에 정신이 팔려 억눌려 있던 신체가 조심스럽게 기지개를 켜면서 생겨나는 것이다. 이미지에 속한 신체, 세상의 이미지와 풍요롭게 관계 맺는 신체의 경험 속에서 우리는 ‘현재의 신체’를 되찾는다. 평소에 우리는 좀처럼 이 현재의 신체에 집중하지 못한다. 늘 현실이나 이미지에 뒤덮여서, 그것들을 향해서, 그것들에 홀려서, 그것들에 의해서 살아간다. 그러나 그런 바깥의 관념이나 이미지를 벗겨 내고, 더 이상 무언가에 사로잡히거나, 홀리거나, 쫓기는 것을 거부하며 똑바로 현재에 서고자 할 때, 우리는 ‘날것의 신체’를 만나게 된다. (136)
| 이미지와 분위기
4장 여행자의 시간 : 시간의 재발견
episode. 백일간의 유럽 일주
현실의 시간
| 여행자의 시간
여행은 우리를 측정 가능한 시간에서 측정 불가능한 시간으로 옮겨놓는다. 여행에서 경험하는, 시간이 공간에 삼투된 ‘장소적 시간’이야말로 이러한 비측량적 시간에 속한다. 현실에서 목적을 향해 꾸준히 나아가던 우리는 시간과 함께 그 목적의식적 시간을 잃어버리고, 장소적 시간에 내던져진다. 그럴 때, 우리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어지는데, 여기에서 ‘어디’란 시간 속의 위치를 가리킨다. (154)
| 반복되는 시간의 아름다움
새로운 시간이 창출하는 새로운 ‘삶의 양식’ 즉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자각이야말로 여행의 정수를 이룬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선택을 한다고 믿는다. 그 선택들은 주로 합리적 이성과 호불호를 가르는 감정에 의해 이루어진다. ‘내가 어떤 선택을 해야 더 안정적으로 살 수 있을 것인가’와 같은 질문이 이성에 속한다면, ‘나는 무슨 일을 해야 행복한가’와 같은 질문이 감정에 속한다. 그러나 이러한 선택들은 대체로 ‘진짜’ 선택이 아니다. 우리는 사회에 맞추어서 사고하며,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 감정적으로 판단한다. 오히려 더 진정한 선택은 ‘어떤 삶의 양식을 선택할 것인가’에 달려 있다. (161)
여행은 그처럼 이미 선점된 ‘하나의 라이프스타일’ 속에서 우리가 자신의 사고와 감정을 종속시켜 왔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여행에서 우리는 나를 규정해 왔던 모든 것, 종국에는 ‘시간들’ 조차 잃으면서 새로운 라이프스타일로 진입할 기회를 얻는다. 우리는 그 속에서 나 자신, 인간, 세상에 대하여 내가 알던 게 전부가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내게는 이 수많은 삶의 양식들 중 하나를 선택할 자유가 있음을 알게 되며, 그러한 선택이야말로 ‘진짜 선택’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된다. (162)
5장 여행자의 슬픔 : 이별과 끝
ep 09. 유럽에서 만난 터키인 청년
익숙한 이별
| 피로와의 조우
| 여행의 끝
우리가 여행에서 자기를 책임지듯이, 자신의 삶을 책임지는 것이 가능할까? 내가 도달한 여기의 삶, 나의 모습, 도 내가 도달한 내 삶을 과연 나 스스로 책임질 수 있을까? 여행이 끝나갈 때, 섣불리 자유를 집어 던지고 다시 원래의 현실에 돌아가려는 강박을 극복하고, 이제는 스스로 내 삶을 책임지겠노라는, 그리하여 둘도 없는 나만의 삶을 살아 내겠다는 ‘자유의 마음’을 먹을 수 있을까? 물론, 그런 식의 결단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당장 달라질 것은 없다. 내가 자유롭게 살겠다고 마음먹고, 인생을 바라보는 태도를 바꾼다고 해서 원래의 현실이 달라질 리도 없고, 삶이 갑자기 장밋빛 미래로 내달리는 것도 아니다. 설령, 획기적으로 삶이나 현실의 요소를 바꾸어낸다고 해도 그것이 꼭 진짜 자유라고 보기는 어렵다. 가령, 회사를 그만두고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난다고 해서 더 진자 삶을 책임지는 자유라 할 수 있을까? 현실에 맞추는 삶을 그만두기 위해, 취직, 결혼, 출산, 노후 등의 요소들을 무작정 저버리고 막연한 자유를 향해간다고 그게 ‘좋은 삶’을 살아낸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진 않을 것이다. 오히려 우리가 보다 자유롭게 자신의 삶을 살고 자기를 책임진다고 할 때는, 훨씬 더 ‘장기적인 관점’이 필요해진다. 그것은 오래 버티기, 오랜 신념의 지탱이라는 차원에서만 유효하다. 자신을 책임지는 자유의 삶, 주인의 삶을 살고자 할 때야말로 그저 충동적인 방종이 아닌, 가능한 한 모든 현명함이 총동원되어야 한다.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잘 사는 삶이고, 내게 가장 어울리는 삶이고,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삶인지를 알아가는 데는 긴 시간과 끊임없는 고민이 필요하다. 이런 질문의 대답은 자유에 대한 막연한 충동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여행을 끝마치고 돌아갈 때 생각해야 하는 건 바로 이런 질문이다. 어떻게 빨리 현실로 돌아갈 것인지가 아니라, 어떻게 현실에 그저 맞추는 삶이 아닌 진짜 자기 삶을 살 것인지에 대한 오랜 고민을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이는 단기적인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오래 이어질, 어쩌면 평생 지속될 투쟁의 시작이다. (182)
3부 세상의 모든 여행
1장 여행과 청춘
현실의 바깥으로 탈주
크리스는 ‘문명’이라는 인간의 발명품이 ‘진실한’ 삶을 스스로 내다 버리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진실한 삶을 향한 꿈으로 탄생되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문명 속에는 꿈이 있다. 그 꿈은 거대하고 위협적인, 불확정성으로 가득 차 있는 ‘자연(야생)’이라는 존재로부터 벗어나, 평화롭고 안정적이면서도 자유로운 삶을 이루어 내는 것이다. 문명은 그러한 유토피아를 건설하는 데는 항상 실패했지만, 그렇다고 그 꿈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야생으로의 회귀는 꿈의 잘못된 방향이다. 오히려 야생은 ‘꿈이 없는’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며, 자연과의 무한한 투쟁 속에서 위협 받는 삶으로 회귀하는 것이다. 정답은 꿈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고 있는 문명 속에서, 새로운 방향을 찾아 ‘새로운 문명’을 건설하는 데 있다. 여전히 우리가 도달하지 못한 그 새로운 문명에서는 기존의 문명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는 방법을 찾을 것이다. 그것은 톨스토이가 익히 말했고, 현대에서 ‘생태주의’라는 이름으로 확산되고 있는 시골에서의 대안적 삶일 수도 있다. 혹은 우리가 상상하지 못하는, 그러나 누군가는 시도하고 있는 어떤 삶일 수도 있다. 크리스는 죽기 직전에 이르러서야 톨스토이가 쓴 문장에서 ‘이웃’이라는 글귀를 발견한다. 그 전에는 그저 자기의 고독과 독립에만 집중하느라 지나치기만 했던, 그러나 톨스토이가 강조했던 그 단어에 몰두한다. 이웃과 함께 이루는 삶이야말로 그가 그토록 부정했던 ‘사회’다. (191)
| 길 위에서
그들 역시 간과한 것이 있다. 그들은 모든 걸 삶의 극점에서 불태워 버리고자 하지만, 인간은 생각보다 쉽게 불타지 않는다. 불에 타는 순간이 지나가고 나면, 인간은 재가 되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폐허가 된다. 삶을 불태우고자 하는 청춘의 갈망에는 순진함이 있다. 그건 삶이 영원히 불탈 수 있거나, 혹은 불탄 뒤에 깔끔하게 끝나리라 믿는 ‘삶의 종결에 대한 신뢰’다. 그러나 삶을 불을 꺼 버린 뒤에 잔인하게 배반한다. 불에 타고 남은 인간은 더 이상 불타지도 못하고, 죽지도 못한 채 불구가 된다. [길 위에서]의 딘이 그렇다. 소설의 끝 무렵, 그는 몰락한다. (197)
| 청춘의 가능성
2장 여행과 사랑
환영 같은 여행과 사랑의 시간
| 해가 뜨기 전에
| 여행과 사랑의 연대
3장 여행과 치유
걷기에 대한 신뢰
| 새로운 태양 아래서
| 황혼의 여행
4장 여행과 죽음
다른 삶으로 갈 수 있는 기회
| 천국의 문에 노크하기

'책 > 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차피 내 마음 입니다>, 서늘한 여름밤 (0) | 2022.09.01 |
---|---|
<우리의 사랑은 언제 불행해질까>, 서늘한여름밤 (0) | 2022.08.29 |
<우리가 매일 차를 마신다면,> 맥파이 앤 타이거 (0) | 2022.07.06 |
<숲속의 자본주의자>, 박혜윤 (0) | 2022.06.24 |
<집 나간 의욕을 찾습니다>, 김파카 (0) | 2022.06.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