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세이

<숲속의 자본주의자>, 박혜윤

비상하는 새 2022. 6. 24.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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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의 자본주의자>

(271)

 

 

프롤로그 골수를 맛보는 삶

 


 

1장 제철에 블랙베리를 따는 삶

 

시골에서 자본주의 활용하기

남편이 기자를 할 때는 그렇게 쉽게 그만두라고 말하지 못했다. 지금보다 돈을 훨씬 더 많이 벌었으니까. 대신 노는 것, 소비하는 것은 별개였다. 이메일 구독 서비스나 남편의 기고 활동을 쉽게 그만둘 수 있는 것은 돈을 적게 벌기 때문인데, 대신 따로 놀 거리를 찾아서 시간과 돈을 쓸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일상은 인내하며 생산하는 것과 소비하는 즐거움으로 나뉘지 않는다. 생산을 하면서 즐거울 수 있는 일을 한다. 우리 가족의 경제 활동의 기준을 생각해봤다. 동물적인 생존을 해결한 후에는 무엇을 하고 싶을까? 생산 과정에서 부품이 되거나 소모되는 게 아니라, 생산 과정을 놀이로 만들 수 있을까? 돈을 버는 과정이 나를 나답게 하는 창조의 행위가 될 수 있을까? 우리가 이 답을 찾으리라고 기대하지는 않는다. 이런 질문을 던지며 살아가는 것뿐이다. (21)

 

세상에서 제일 게으른 농사꾼

 

생활비 100만 원

내 소유의 돈이 작아서 오는 공포심을 조금만 누르면 보인다. 이 풍요로운 세상이 베풀어준 교육, 넓고 다양한 세상, 넘치는 지식, 공공의 소비 시설이. 그것들은 오로지 나의 돈으로만 즐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돈을 냈다고 그 가치를 내가 온전히 지불한 것도 아니다. 이 세상을 좀 더 인간적이고 살기 좋게 만드는 노력도 중요하지만, 과거의 세대가 만들어 현재에 도착한 풍요를 누리는 새로운 방법도 연구해야 한다. (44)

 

버릴수록 풍성해진다

그때 알았다. 밤이 되어도 우리는 이제 널브러질 필요가 없었다. 물론 필요는 이미 예전부터 없어졌는데, 행동과 마음의 습관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서 하루를 살아야 한다는 부담이 온전히 사라졌다. 그냥 하루 종일 당당하게 최선을 다하지도 않고 열심히 살지도 않는 낮 시간을 보낸다. 밤이 되어 널브러지는 게 아니라 그냥 하루 종일, 매일 널브러져 사는 것이다. ‘오늘 뭐 할까?’ 같은 생각도 안 한다. 예전에는 놀 때도 늘 무엇을 할지 고민했다. 열심히 놀아야 할 것만 같아서. 아무것도 안 하다 보면 무언가를 하게 된다. 그냥 누워 있으려고 했는데 빵도 굽고 콩만 넣은 된장도 만들고, 글도 쓰고 책도 읽고, 애들이랑 시시한 장난도 치고. (57)

 

무엇보다 기쁨으로 먹는 것

 


 

2장 어쩔 수 없이 살지 않기 위해 버렸던 것들

 

꿈이 삶을 가로막을 때

하고 싶은 것을 하라.” 자라나는 아이들과 청년들이 무수히 듣는 그런 이야기를 나도 들었지만, 그럴수록 깨달았다. 나는 이루고 싶은 꿈이 없었다. 굳이 꿈이라고 한다면, 건강과 돈 때문에 큰 불행을 겪지 않고 가족과 가까운 친구와 서로 아껴주며 적당히 오래 사는 것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욕망이 없거나 득도한 수도자와 같은 마음의 상태도 아니다. 돈을 많이 벌거나 한 분야의 대가가 된 사람들을 보면 부러운 마음이 든다. 그런데 막상 내가 무언가를 하려고 하면 높은 수준에 오르기 위해 인생에서 지불해야 하는 대가가 있는데, 그것은 내 ’, 즉 큰 불행만 겪지 않고 편안한 일상을 살고 싶다는 꿈에 위배되었다. 그래서 어느 정도 해보다가 적절한 순간에 포기했다. (70)

내가 의지력 없는 나를 미워하면서 시간을 쓰지 않고 내 인생을 나름대로 재미있게 꾸릴 수 있었던 것은 어쭙잖은 미련을 갖는 대신 완전히 포기했고, 그 포기가 불러온 깨달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첫째, 포기한 자리에는 무언가가 반드시 채워진다. 무언가를 포기한다고, 삶이 포기되는 것은 아니다. 변호사가 되고 싶었는데 결국 대학원에 가지 못하고 다른 직장에 다니고 있다면 그게 끝이 아니다. 마음속 어딘가에서 변호사가 되겠다는 그때의 목표를 계속 의식하고 있다면 당신의 일상이 부족하고 불만족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그 일말의 희망을 진심으로 내려놓는다면 일상은 본래의 모습을 회복한다. 둘째, 포기도 때가 있고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정확히 그 때가 언제인지는 각자가 결정해야 한다. 다만 내가 무엇을 위해 이러고 있는가?’라고 자문을 해보아도 도무지 떠오르는 답이 없다면 그때가 의심하기에 좋은 때다. 그 의심이 나를 찾아온 순간 회피하지 않는 것, 나에게 태연하고 냉정하게 질문을 던지는 것. 그 정도만으로도 충분하다. 셋째, 포기를 잘하면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줄어들고 결국 무엇이든 시도하게 된다. 넷째, 나만의 인생을 사랑하게 된다. (74)

 

욕망에 항복하는 습관

집에서 요리를 할 때는 레시피를 찾아보고 식당에서 먹는 것과 비슷하게 만들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집에서 음식을 자주 만들다 보니 대충 흉내만 내도 만족하게 됐다. 진짜 원하는 맛이 무엇인지를 알면 다른 부수적인 것들은 포기할 수 있다. 그냥 고기가 없으면 없는 대로, 고수가 없으면 없는 대로 해 먹을 때도 많다. 그러니까 욕망에 항복하기 위해선 자신의 욕망이 어떤 건지를 알아가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한다. (79)

결국 욕망을 줄인다, 욕망이 없다는 것은 사회적 맥락 안에 있는 인간에게는 가능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욕망이 없다는 것은 이미 사회, 문화적으로 무엇을, 얼만큼욕망해야 하는지를 전제하고 있는 거니까. 욕망과 행복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 욕구하지 않고 싶다면 그것도 나만의 욕망이다. 나는 수도자도 아니고, 철학자도 아니고, 그저 의 삶을 사는 한 인간이니까. 진실한 가 된다고 해서 행복해지거나, 인생의 깊은 의미에 접근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가 되는 것이다. 본격적으로 내 욕망대로, 욕구대로 살아보니 내가 욕망이 없는 사람으로 태어난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남들이 갖는 필통이나 번듯한 직업, 멋진 소파나 텔레비전에 대한 욕망이 없는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 이해가 가지 않는 남들의 욕망으로부터 나를 지키고자 하는 욕망이 강했다. 막상 나에게서 시작된 욕망에는 그 누구 못지않게 충실했다. 어느 해 여름에는 젤라토에 꽂혀서 두어 달 내내 매일 먹었다. 욕망을 줄이는 일이 나에게 불가능한 고행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욕망이 바로 자신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우리의 욕망을 극대화시켜 거의 무한대의 소비를 부추기는 현대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나만의 고유한 욕망과 욕구를 정확하고 정밀하게 아는 것이 오히려 소비의 피곤을 줄여준다. 내가 진짜 원하는 게 아니라면, 아무리 싸도 갖지 않는다. 아무리 사회적으로 칭송하는 가치라도 내가 원하지 않으면 추구하지 않는다. 그렇게 나의 욕망을 소중하게 탐구하다 보면 나와 다른 욕망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점점 너그러워지는 나를 발견한다. (86)

 

그것은 나의 권리가 아니다

소로의 삶이 보여주듯 나만의 바구니를 계속해서 짠다고 세상이 알아봐준다는 보장 같은 건 없다. 그러나 소로의 인생이 불행했냐고 하면 아닐 것 같다. 그는 자신에게 기쁨을 주는 방향으로 계속해서 살아나갔다. 세상이 무심하든 아니든, 주어진 자유를 누렸다. 이따금 그 섬세한 바구니를 알아보는 에머슨 같은 친구나 독자 앞에서 세상과 통하는 그만의 길을 발견했을 것이다. (94)

 

일단, 감사와 이해를 멈추다

. 엄마가 시키는 대로 한 건 맞아. 그런데 생각해보면 엄마가 뭘 시킨 적이 없어. 그게 이상한 거지.” 바로 이 지점이 변화를 위한 첫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변화시키겠다는 목표와 의지를 버리는 것. 변화가 필요 없게 되어야 그 때 변화가 제 발로 찾아온다. 변화는 어렵다. 아니, 거의 불가능한 것 같다. 남편이나 아이들은 고사하고, 내게서 바꾸고 싶은 것들을 나의 의지대로 변화시킨 적이 거의 없다. 그런데 일시적이지 않은 진짜 변화들은 오히려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마음이 됐을 때 나도 모르게 찾아왔다. (96)

성인이 된 다음 어릴 때 부모에게서 말로 상처를 받고 가정불화를 겪으면 성인이 되어서 다양한 문제를 겪는다는 심리학 이론에 심취했다. 내 안에 상처받은 아이를 치유해야 한다는 조언에도 솔깃했다. 공부해보니 엄마 역시 나보다도 많은 상처를 받은 아이였고 그것을 대물림했을 뿐이라는 것까지도 이해가 됐다. 그런데 도대체 바뀌는 것이 없었다. 변화까지는 바라지도 않고 치유라도 되나 했는데, 분노가 더 치밀어 올랐다. 이론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전문 학자로서가 아니라 오로지 나 자신의 변화를 위해 공부한 것이니, 이 이론은 쓸모가 없었다. 어린 시절의 상처라는 개념 자체를 버렸다. 그리고 어린 시절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봤다. 어린 시절에 매일같이 혼나고, 부모님이 매일 싸워서 정서가 불안정하다고 믿었다. 그런데 그때 나를 되돌아보니 그렇지 않았다. 강철 심장에 얼굴이 뻔뻔하도록 두껍다. 보통 사람들이 주위 눈치 때문에 차마 못하는 행동들도 그냥 해버리곤 한다. 힘든 일이 있을 때면 생각한다. ‘어려서 아무런 힘이 없을 때, 엄마의 비난이나 부모님의 불화도 견뎠는데, 이 정도 가지고 뭐.’ 실제로 지금까지 엄마보다 더 심하게 나를 대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정말이지, 세상 사람들은 하나같이 내게 너무나 친절하다. (98)

어린 시절을 상처라고 해석했을 때는 내가 상처받지 않기 위해 도망가는 사람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어린 시절에 독특한 조기 훈련을 받았다고 생각하니 내가 굉장히 자유로운 사람이라고 느껴지기 시작했다. 겨우 20년 훈련받고 평생 자유라는 티켓을 얻었으니. 엄마에 대한 감정 역시 변했다. 엄마도 상처받은 가엾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때는 막상 만나면 분노를 참을 수가 없어서 좋은 시간을 보낼 수도 없고, 때로는 엄마에 대한 죄책감에 괴롭기도 했다. 그런데 엄마는 현재의 나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 없다는 사실이 보였다. 지금도 예전처럼 내게 악담을 하지만 과거에서 오는 소리로 들린다. SF영화에 등장하는 시간 이동처럼. 돌이켜보면 엄마를 이해하려고 했던 것 역시 엄마를 변화시키려는 나의 의도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99)

엄마로서 느끼는 죄책감이나 불안도 마찬가지다. 세상이 나를 부족한 엄마로 보거나 언젠가 내 아이들이 나를 원망하는 날이 올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날을 걱정하며 죄책감이나 미안한 마음으로 아이들을 기르고 싶지 않다. 좋은 엄마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생각한 좋은 엄마가 아이들에게도 좋을지 모르겠기 때문이다. 내 방식대로 엄마이면 그만이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 (100)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힘보다 더 상위의 강력한 힘은 변화가 필요 없는 맥락과 상황을 만드는 것이다. 그 정도의 힘이 생기면, 변화가 드디어 저절로 찾아온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변화가 아니라 변화가 필요 없는 맥락에 모든 것이 적절하게 들어맞는다. 맥락을 만들 때의 장점은 주인 되기를 나 혼자만 독점할 필요가 없다는 데에 있다. 내가 바꾸고 싶은 상대도 그 나름으로 자기중심이 있다. 그들이 변했다면 그들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성급하게 고마워하지도, 미안해하지도 않는다. 그들이 변화하기를 기대하지 않는 것처럼. (103)

 

가르칠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다림질의 미니멀리즘

왜 아줌마를 못 오게 하는 거야? 우리 돈 드는 것도 아닌데.” “누구 돈이건 옳지 않은 것 같아. 이건 우리의 삶이잖아. 외주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해. 직접 해야 하는 일이야. 우리 옷이고, 우리 책임이야. 남한테 이걸 빼앗기는 거야. 일을 하기 위해 우리가 사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 우리가 하지 않으면 절대 안 되는 중요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니야. 우리만의 삶은 우리가 살아야 하잖아. 우리에게 돈이 무한정 있다고 해도, 아이 키우는 것도 남한테 맡기고, 청소도, 빨래도, 요리도 맡기고, 생각하는 것도 맡기고, 그러면 우리가 왜 사는 건데?” (113)

 


 

3장 돈 벌지 않는 나와 살아가는 법

 

스콘 대 발효 빵

돈을 벌기 위해 내가 하는 일이나 하고 싶은 일 대신에, 돈을 지불하는 사람의 마음을 생각하면, 나에게 선택권이 생긴다. 막연히 돈 벌기 힘들다가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일을 고집하는 대가로 돈을 적게 벌거나, 돈을 쓰는 사람에게 맞춰 많이 벌고자 하거나, 내가 선택하는 것이다. 무엇을 선택하든 내가 결정하는 순간 이미 능동의 세계로 넘어간다. (127)

 

참을 수 있는 가난

주목해야 할 문장은 물려받는 것이 없는 이들도 자기 몸 하나 건사하기가 힘들다는 대목이다. 소로는 돈이 많으면 불행하다거나 돈이 없는 소박한 삶이 좋다고 말하지 않는다. ‘어차피 인간으로 태어나 자기 한 몸이라도 간수하기 위해 먹고사는 일은 누구나 힘들다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 문장이 중요한 이유는, 부자가 아닌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노동과 노고를 물질적으로 부족한 탓이라고 여기는 성급함에 대해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돈만 더 있다면 수고로움이 사라질 거라는 믿음, 혹은 지금 가지고 있는 돈이나마 없어진다면 더 혹독한 고생을 할 것이라는 불안과 공포가 여기에서 온다. 그러나 부자와 가난한 자를 나누듯이 돈이 많은 나와 돈이 없는 내가 구분되는 건 아니다. 내 현재의 고민과 질문은 돈의 유무에 따라 형태는 달라지겠지만 근본적으로 비슷할 것이다. 진짜 질문은 하나.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 갖기 원하는 것, 혹은 잃기 두려워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한가? 중요한 건 나를 부유하거나 가난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필요에 대해 착각하거나 착각하지 않는 것이다. (131)

카뮈의 유명한 에세이 [시시포스의 신화]에는 가난을 참을 수 있는, 우리 삶에 필요한 고통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이 나온다. 시시포스가 이 형벌에서 풀려나는 방법으로 카뮈가 제시한 건 형벌 자체에 있지 않았다. 지금보다 더 많은 돈을 버는 것이 가난의 해결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카뮈는 시시포스가 이 형벌을 자신의 운명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이것은 나의 운명이다라고 스스로 선택하고 선언함으로써 그는 신이 부여한 형벌에 억지로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의 창조자로서 돌을 밀어 올리게 된다.

인간은 언제나 자신만의 무거운 짐을 반복해서 지게 되어 있다. 시시포스가 밀어 올린 돌의 원자 하나, 산을 이루는 미네랄 한 조각, 이 모든 것으로 새로운 세계가 만들어진다. 시시포스의 투쟁 자체가 한 인간의 심장을 채우기에 충분하다.

돌을 밀어 올리는 행위가 단지 현재 처한 상황을 수용하는 것만은 아니다. 사람들의 돌은 다 다르다. 누군가에게는 당면한 가난을 벗기 위해 애를 쓰는 것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가난이 상대적 결핍과 빈곤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일 수도 있다. 핵심은 내 마음에 드는 돌을 고르거나 다른 사람이 돌을 치워줄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136)

여기서 반드시 덧붙이고 싶은 것은 가난이라는 고통의 특이성이다. 카뮈는 어린 시절의 가난을 말하며 가족을 언급한다. 시시포스도 홀로 고난에 맞섰고 고독 속에서 가치를 찾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이야기했지만, 그것이 무조건 나 혼자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함께 나눌 다른 존재와의 적극적인 연결이 중요하다. 가난이 불행이 아니었던 것은 함께 풍요의 의미를 읽어냈던 가족 덕분이었다고 카뮈는 말한다. 카뮈가 사르트르와 결별하면서 강조했던 개인의 주체적인 의미 찾기는 개인의 고립을 말한 것은 아니었다. 카뮈는 집단적이고 획일적인 정치 체계 안에 개인을 가두기보다는 각 개인이 가진 다른 점들을 통합할 수 있는 더 거대한 가치들로 통합되고 연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가난을 예로 들어보자. 사람마다 사치품의 정의, 물건의 의미, 소유하고 싶은 것, 재산의 액수가 모두 다를 것이다. 그러나 이 차이들이 인간의 우열을 정하는 기준이 아니라, 세상을 다채롭고 흥미롭고 다양하게 만든다고 함께 믿는다면 우리는 연결될 수 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가 짊어질 짐을 항상 찾고야 만다는 카뮈의 말을 깊이 이해한다면 우리는 돈이 더 많은 사람을 부러워하지도 않고, 지금보다 돈이 더 없어질까 두려워하며 살아가지도 않을 것이다. (137)

 

돈의 기쁨과 슬픔

쾌락주의 철학이 끈질기게 살아남은 것은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인간의 진실을 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행복이든, 즐거움이든, 쾌락이든 즐거운 기분을 느껴야 좋은 삶이라는 간단한 이치다. 그런데 잠시 즐겁고 허무해지는 대신, 이 기쁨을 지속적으로 느끼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절제였다. 하지만 수천 년간 이 철학의 진수는 외면당하고, 여전히 쾌락주의는 많은 사람들에게 무책임과 방탕을 뜻한다. (141)

돈이 우리를 배신하는 것은 아니다. 돈이야말로 확실하다. 하지만 돈이 적어도 많아도 우리는 돈처럼 완전해지지 않는다. 무지하고, 때로 비굴하고, 실수를 한다. 그 굴레가 누군가에게 부탁하고 때로는 부탁을 들어주며 해소해나가는 것이 인간의 삶이다. 다만 많은 돈은 우리를 착각하게 한다. 내 현실의 부족함을 잊게 하고, 돈의 힘을 나의 것으로 착각하고, 모든 문제를 그렇게 해결할 수 있다고 믿게 한다. 그러나 그 틈새로 의 존재가 빠져나간다. 부유하다고 반드시 그런 삶을 사는 것도 아니지만 돈이 내 존재를 대신하게 할수록 나는 돈으로 대체 가능한 인간이 되고 내 삶은 색깔을 잃는다. (146)

돈으로부터의 자유는 돈을 끝없이 가져서 나의 인간다운 특성으로부터 달아나 완벽한 권력자가 되는 것도 아니고, 돈을 아예 버려서 내가 인간으로서 소비하며 느끼는 즐거움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돈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돈을 내가 즐거움을 느끼는 다른 가치로 무한히 전환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자유로워진다. (148)

 

우리 모두 폐를 끼친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이 셰이를 현실에서 멀어지게 한 것일까? 남들을 행복하게 해줬는데도 왜 자신은 그렇지 못했을까? 셰이가 정말 행복하지 않았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마약과 알코올에 극단적으로 의존하고 스스로 인간의 신체적 한계에서 벗어난 것처럼 굴며 친구와 가족까지 모두 멀리하는 것은 자신의 삶에서 행복을 찾은 사람의 모습이 아니다. 나는 그 이유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주는 환상에 있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셰이의 진심이 부족했던 것이 아니라, 돈이 괴로움을 끝내고 행복을 얻기 위한 최고의 수단이라는 이 사회의 기본 전제가 문제였다. 분명히 돈으로 어느 정도의 행복을 살 수 있지만, 돈으로 채운 자리에는 사라지는 것도 있다. 바로 나 자신이다. 돈을 쓸수록 나의 고유성은 조금씩 희미해진다. 이상한 일이다. 내가 어떤 물건을 얼만큼의 돈을 써서 구매해 나의 독특함, 나의 취향을 드러낸 것도 사실인데. 하지만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자본주의에서 돈은 내 돈이니까, 청구서를 모두 지불하고 나면 내 의무를 다했다는 착각을 하게 만든다. 그러나 내게 돈이 있고, 그 돈의 위력이 아무리 크다 한들, 정작 나 자신은 초라하고 불완전하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살아 있는 것만으로 폐를 끼치며 살아간다. 내 돈 주고 산 플라스틱 용기들은 실상 모든 비용을 내가 다 치른 것이 아니다. 쓰레기 봉투를 샀다고 쓰레기에 대한 진짜 비용을 다 지불하지 않았듯 말이다.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열심히 돈을 벌어서 가족이나 친구에게 넉넉한 물질적 풍요를 제공한다고 해서 관계에서 내 역할을 다한 게 아니라는 건 명백한데, 우리는 그 사실을 쉽게 잊는다. 이렇게 내 돈으로 문제를 다 해결했다는 착각과 그 만족감은 나 자신을 소외시킨다. 셰이는 돈으로 다른 사람의 문제를 해결해주면서 중독 성향이 있고 정서적으로 불안정해 주변의 보살핌과 도움을 받아야 하는 자신의 문제는 잊어버렸다. 그는 거의 뭐든지 할 수 있을 만큼 부자였지만, 그 재산 때문에 자신의 진짜 문제가 돌이킬 수 없을 지경에 이를 때까지 외면할 수 있었다. 자신만의 단점과 불완전함을 서로에게 드러내어 폐를 끼치고, 도움을 받고, 그런 마음의 빚을 갚기 위해 자신을 내어주면서 살아가는 것이 삶의 기본 원리다. 그러나 돈이 모든 상호작용을 대신하는 사회에서 살아가다보면 종종 그 사실을 잊게 된다. 우리는 폐를 끼치기 싫다고 말한다. 타인에게 쉽게 민폐라는 말을 쓴다. 그러나 우리의 존재는 그렇게 무결할 수가 없다. (156)

 


 

4장 숲속에서 내 이야기 찾기

 

세상의 모욕 앞에서 나를 지키는 시선

세상이 무심코 던지는 평가도 우리를 아프게 할 수 있다. 그 아픔에 휘둘리기 시작하면 이유도 모른 채 남들이 달리는 방향으로 함께 달려가기 시작한다. 세상의 모욕은 그렇게 자칫 내 삶의 통제력을 가져가버릴 수도 있다. 이런 목소리 앞에서 나는 이렇게 대응한다. (167)

일단, 사실을 받아들인다. 상대방이 하는 이야기를 전부 수긍한다.
(ex. “엄마가 게을러서 아이가 불쌍하다.”, “공부를 안 시키면 나중에 후회한다.” 그 말속에는 사실도 있다. ‘그렇지. 내가 게으르지. 맞아, 공부를 안 시키고 있지.’ 그렇게 사실로서 받아들인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이런 의문이 든다. ‘불쌍한 게 뭐가 문제지? 나중에 후회하는 게 왜 문제지? 원래 인생에서 뭘 하든 후회하기도 하고 상처받기도 하고 불쌍해지기도 하는 거 아닌가?’ 사실과 의견을 분리하는 건 여러모로 공포를 줄여준다.)
그다음, 상대방을 연구한다. 내가 상대에게 들은 이야기는 명백한 모욕이다.
(‘아니, 그러는 너는?’ 그런 마음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데, 이 마음 역시 진실이다. 그 마음을 한 걸음 더 가져간다. ‘도대체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이길래, 그런 이야기를 할까?’ 나를 비난하는 사람을 연구하는 방법은 꽤나 강력한 방법이지만, 매번 이렇게 할 수는 없다. 남의 이야기를 이렇게 집중해서 정성껏 들어주는 일은 시간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부담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서 비난만 많이 들으면 그것 역시 분명히 상처가 된다. 그리고 별 쓸모도 없는 의심이 든다. ‘내가 정말 문제가 아닐까?’ 고치지 못하거나, 안 고쳐도 괜찮은 문제에 대해 불안해하는 것은 백해무익하다.)
그래서 나는 내가 뭘 해도 칭찬해주는 사람들을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긴다. 이런 사람들의 존재는 나를 지켜주는 유일한 방어막이다. 나는 스스로를 지키는 힘인 자존감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심리학자 마크 리어리의 소시오미터sociometer이론은 자존감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는 주장에 잘 들어맞는다. 소시오미터는 타인에게 내가 어떻게 보이는지를 감지하는 정도를 말한다. 남이 나를 긍정적으로 봐준다고 인식하면 내가 그만큼 괜찮은 인간이라고 생각하게 된다는 이론이다.

 

함께해야 나를 찾을 수 있다
- 사르트르는 타인은 지옥이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나중에 사르트르가 직접 이 유명한 문장이 잘못 이해되고 있다고 밝혔다. 흔히 인용하듯 나를 괴롭히는 타인과의 나쁜 관계 때문에 지옥같이 힘들다는 뜻이 아니라, 내가 나 자신을 인식하고 스스로를 평가하는 모든 것이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온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니 정확하게 해석하자면, ‘타인은 지옥이다가 안이라, ‘지옥은 타인에 있다가 더 맞을 것이다. 이 대사가 등장한 사르트르의 연극에는 지옥에 갇힌 세 사람이 등장한다. 이 공간을 지옥으로 만드는 것은 갇혀 있다는 사실도 아니고, 나머지 두 사람이 나를 괴롭히고 나를 비난해서도 아니다. 내가 나 스스로를 평가하기 위해 다른 사람이 필요하다는 사실이 지옥이라고 사르트르는 설명한다. 생존을 위해 공기와 물이 필요하듯이, 끊임없이 타인에게 기대어야 한다는 그 사실. 우리는 이 지옥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타인이 나를 괴롭혀서가 아니라 내가 나로 살아가기 위해서다. (172)

소로의 실험을 비하하는 사람은 나이트만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소로가 자연에 살면서 고독을 찬미하지만, 실제로는 오두막을 지은 땅도 친구가 공짜로 빌려준 것이고, 자주 마을에 내려와 친구나 가족들과 만찬을 즐겼으니 문명을 등지고 자연과 함께하는 삶이라고 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이 비난이야말로 소로를 더 정확하게 이해하는 열쇠라고 생각한다. 특히 나처럼 숲속에 들어가 살고 싶지 않지만 나답고 싶고 좋은 삶도 포기하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는 더욱 그렇다. 소로의 문명 비판은 흑백의 논리가 아니다. 문명을 비판한다고 해서 다들 자연으로 돌아가 살자는 것은 논리적 비약이다. 그는 세상이 나를 인정해주겠다고 약속한 적은 없다고 말했고, 그런 인정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공부한다고 했지만, 모든 교류와 인정을 포기하겠다고는 하지 않았다. 세상이 내게 거는 기대에 무심하기 위해, 우리는 결국 더욱더 사람에게 기대어야 한다. 나 자신을 잃는다는 것도 결국 내가 있는 관계 안에 존재하는 것이다. 나의 모자란 점이야말로 나 자체다. 타인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가운데 오는 고통은 나답게 타인과 연결되는 것이다.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일은 분명히 때로 불편하고, 내 부족한 점들을 마주하게 하며, 아무리 노력해도 그 거리를 좁힐 수 없을 것 같은 순간도 많다. 이런 우리의 인생이 쉬워지는 일은 없겠지만 인간으로 살아가는 이 수고로움이 자신을 잃음으로서 더욱 나다워지는 길임을 깨달을 수는 있다. (177)

 

소로의 시시하고 소중한 이야기

자기만의 이야기가 있으면 누구든 봉준호, 스코세이지, 하루키, 글래드웰 같은 성공을 이룬다는 말인가? 혹은 소로나 반 고흐처럼 죽고 난 후라도 명성을 날릴까? 한 가지 확실하는 건, 인정받기 위해 나의 이야기를 버리고 남들의 기대에 맞춘다고 해서 성공의 확률이 높아지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럴 바에는 내가 하고 싶은 나만의 이야기를 하고 성공이 아닌 나만의 재미라도 맛볼 것이다. 자신만의 진실한 이야기는 세상 전체가 아니더라도 적어도 몇 명에게는 나만이 줄 수 있는 독특한 즐거움이 된다. (184)

 

삶은 우리를 속이지 않는다

스피노자는 자신의 천재적 이론을 알아주지 않는 세상을 원망하지도, 부당하게 핍박하는 사람을 미워하지도 않았을 것 같다. 자신이 시대를 잘못 만났다고 슬퍼하지도 않았을 것 같다. 어쩌면 그는 자신의 내면의 힘과 이성으로 스스로 선택하며 살아갈 수 있음에 기쁨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195)

 

고전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는 법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의 저자 피에르 바야르가 주장하는 바도 비슷한 맥락일 것이다. 책을 읽지 않아도 우리는 대화에 동참할 수 있다. 이미 그 책이 존재하는 이 시대의 한 귀퉁이를 당당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말이다. 그래서 책을 읽을 때는 인류의 현재와 미래의 선택을 하는 당당한 심판관으로서 나의 판단대로 생각하고 해석하면 된다. 그러니 고전이든 양자 역학책이든 로맨스 소설이든 어떤 계기건 읽거나, 혹은 안 읽고 생각만 하더라도, 내가 인류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처럼 진지하고 떳떳해도 된다. 하지만 내 마음대로 읽는다는 건 제멋대로 읽는 것과는 다르다. 이미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나의 몸이 나의 것이지만 인류 역사 전체가 축적된 흔적인 것처럼 생각도 그렇다. 나의 생각이 고립된 단독의 소유가 아니니까. 전문가나 고전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고 내 생각을 자유롭게 놓아주는 것은 아무 생각이나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이미 있는 인류 전체가 고민하고 공유하는 생각에 의식적으로 동참하는 일이다. (202)

나는 고전이나 좋은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는 마음의 부담을 벗었다. 읽는 건 심심할 때 읽는다. 대신 정직하게 내 느낌을 받아들이고, 그 생각과 경험을 글로 쓰는 것이 읽는 것보다 먼저라고 정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지식이나 책, 혹은 도덕은 없다. 오히려 선별하고 선택해야 할 책임은 개인에게 있다. 그 선택은 나만의 고유함에서 나오고, 따라서 거기에 정직하고 당당해야 하지만, 그 자유는 온전히 내 안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다. 인류 전체, 다음 세대와도 공유하게 된다. (205)

 

마당의 피아노

그런데 어느 순간 더 이상 피아노를 칠 필요가 없게 됐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그렇게 열심히 알아내야 할 만큼 나는 중요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나는 나를 모른다는 깨달음보다 더 과격해진 셈이다. (211)

 


 

5장 투명해질 때만 보이는 것들

 

시간을 멈추는 유일한 방법

듣는다는 것은 어떤 깊은 지혜나 말재주, 따뜻한 마음 혹은 그저 침묵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듣는다는 것은 시간과 관련이 있다. 책에서 모모는 집도 가족도 없는 아이지만, “넘치게 풍성하게 가진 것은 시간이었다.” 그리고 시간은 삶이다. 우리가 타인의 이야기를 진자로 듣기 위해서는 나의 시간을 멈춰야 한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의 시간, 내가 살아왔던 과거의 삶에 이어져 있는 시간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상대방의 말을 듣기 위해서 마치 영원의 시간을 함께하는 것처럼 나의 조급한 시간표를 온전히 잊을 때 비로소 타인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 (220)

 

인간이 신에 가까워질 때

어떤 사람의 인생이 성공인지 실패인지, 후회할 만한 인생인지 아닌지 누구도 대답하지 못한다.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 아무리 생각해봤자 답이 안 나오는 존재니까. 타인은 그래서 소중하다. 나에게 무언가 해줘서가 아니라, 존재하는 것만으로 나 자신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 있게 해주니까. 나 자신을 잊고 타인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 그때가 어쩌면 우리가 신에 조금이나마 접근할 수 있는 기회가 아닐까. (229)

 

우리 옆집에는 태극기 부대가 산다

함께 살아가야 할 대상은 멸종 동식물만이 아닌지도 모른다. 나와 완전히 다른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도 사이좋게 지낼 수 없다면, 다른 무엇을 보호할 수 있을까. 내가 지구환경을 보호하고 싶다면, 그런 일을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을 대신해 내가 조금 더 하면 된다. 그런 사람들을 비난하고 그들의 생각을 바꾸려는 에너지만큼만 더 하면 된다. 그러면 정말 좋아지는 것은 지구환경도 아니고,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도 아니다. 바로 나 자신이다. 현대 사회에서 큰 문제는 생존보다 오히려 불안과 분노다. 이웃은 내가 전에 알던 것처럼 장단점이 모두 있는 평범하게 좋은 사람이었다. 다만 우리는 믿음도, 살아온 삶도 서로 달랐다. 그를 그대로 지켜보며 나는 이 마을이 더 좋아졌다. 내가 지켜야 할 가치가 절대적이라는 믿음이 사라지면, 똑같은 행동을 해도 훨씬 가볍고 즐겁다. (235)

 

모든 것은 나를 속이지 않는 데서 시작된다

뇌는 고정된 무엇이 아니라 연결된 회로다. 뇌 자체가 변하지는 않지만, 우리가 연결을 선택해서 만들 수 있는 회로는 무궁무진하다. 저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240)

뇌졸중을 통해 내가 배운 최고의 교훈이라면 감정을 몸으로 느끼는 방법을 배운 것이다. 감정이 내 몸에 계속 남아 있게 할지, 아니면 내 몸에서 곧장 흘러 나가게 해야 하는지 판단할 힘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왼쪽 뇌의 힘이 점차 강해지면서 내 감정이나 상황을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이나 외적 사건 탓으로 돌리고 싶어졌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보면 나와 나의 뇌 말고는 나에게 어떤 기분을 느끼게 만들 사람은 없었다. 외부의 그 무엇도 내 마음의 평화를 앗아갈 수 없었다. 그것은 온전히 나의 문제였다. 내 삶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통제할 수는 없지만, 내 경험을 어떻게 지각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내게 달려 있었다.

생각할수록 죄책감과 미안함은 나 자신을 보호하고자 하는 거짓인 것 같았다. 아이를 때리면 안 된다고, 미안해할 일이라고 진심으로 믿는다면 처음부터 그런 행동이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결론에 도달하고 말았다. 내가 나에게서 숨기려는 진짜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아이에게 화를 내는 것은 나의 쾌감을 위해서 하는 것이다이게 진실인지 아닌지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나는 새로운 연결을 만들고 있었다. 나의 쾌감을 위해 어떤 인간에게라도 화를 내는 나 자신은 정말이지 견디기 힘드니까. 내가 아이에게 짜증내는 것조차 아동 학대를 하는 악마 같은 인간들과 똑같은 동기와 쾌감으로 하는 거라고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주입하며 내 뇌의 회로를 새로 만들었다. 일주일쯤 이 생각에만 몰두했다. 그리고 그 후로는 아이에게 화가 나지 않는다. 화를 참는 게 아니다. 아이가 어떤 행동을 해도, 그것이 화까지 연결되는 회로가 끊어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연결 회로. (246)

 

누구에게 인정받으면 행복해질까

두 직업 세계를 가까이서 들여다보고 다른 직업인들을 만나면서 알게 됐다. 어떤 직업도 내 것이 되면 좋기만 하거나 싫기만 할 수는 없다. 이제 내게 직업의 핵심은 수행해야 하는 일의 종류가 아니라 어떤 타인에게, 또 얼마나 많은 타인에게 평가받고 인정받느냐 하는 문제였다. (251)

나는 나 자신을 평가하지 않는다. 나에 대한 남들의 평가를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뿐이다. 지나가는 사람이 엄마가 돼가지고 그게 뭐냐? 자기 일이 있어야지, 집에만 있으면 어떡해?”라고 비난하면 그건 흘려듣고, 애들이 엄마는 훌륭한 사람이야그러면 맞아. 난 훌륭한 사람이야하며 수긍한다. 지나가는 사람이나 가족이나 다들 남은 남이다. 하지만 내가 인정을 받아야 하는 그 은 누구인가를 내가 정한다. (253)

나의 고유성을 지키면서 눈치를 볼 줄 안다면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소시오미터 이론에 따르면 남들의 긍정적 시각을 제대로 인식할 때 자아 이미지가 좋아진다. 내가 환영받는 곳, 내가 잘 해낼 수 있는 역할을 발견할 줄 아는 건 삶을 행복하게 이끌어 갈 능력이나 다름없다. 그렇다고 남의 인정에 목을 매라는 뜻도, 남의 의견을 무시하라는 뜻도 아니다. ‘이 누구인가를 내가 의식적으로 정할 수 있으면 된다. (256)

 

어떤 일은 내딛으면 이루어진다

 


 

에필로그 끝을 보며 지금을 사랑하다

 

욕구 자체가 나를 힘들게 하는 게 아니라, 욕구가 어떤 선을 넘어서도 계속됐을 때가 힘들다는 것을 살면서 배웠다. 시험 공부가 힘든 게 아니라, 시험을 잘 보지 않으면 큰일 날 것 같은 생각이 힘들었다. 빵 굽기도 새벽부터 밀가루를 반죽하고 밤낮으로 반죽을 주시하며 만드는 게 힘든 게 아니라, 최고의 빵을 욕망할 때 힘들다. 돈을 못 벌어서 힘든 게 아니라, 돈이 언제나 부족할 거라는 미래의 전망 때문에 더 힘들다. 이런 원리는 불교 관련 책이라면 어디에든 실려 있다. 하지만 나처럼 고행을 하기 싫은 사람에게 맞는 실천 방법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마음을 비우라니. 마음 비우기 싫었다. 그래서 방법을 바꿔보았다. 고민이 스밀 때마다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지금은 실컷 마음껏 내키는 대로 해도 좋아. 하지만 언젠가는 버려야 하고, 싫증이 날 거라고. 그때는 어떻게 하지?’ 이런 질문을 하면 때로는 울적해진다. 동시에 현재 내 욕망이나 집착이 무척 소중해진다. 빵을 한창 만들다 보면 언젠가 이 일도 그만두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면, 굉장히 집중하게 된다. 그런 시간이 지나고 나면 어느 순간 지금이 이 일에서 얻을 수 있는 기쁨의 최고점이며, 앞으로 서서히 하향곡선을 그리기 시작할 거라는 느낌이 들기 시작한다. 그러다 보면 나의 경험들은 대부분 온전히 나다운 것으로 채워진다. (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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