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페미니즘

<아니 요즘 세상에 누가>, 곽민지

비상하는 새 2022. 6. 14.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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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요즘 세상에 누가>

(279)


 

비혼 선언 : 거창하게 뭐 결심씩이나

 

-안녕하세요, 비혼입니다

비혼이 결혼을 이긴 것이 아니다. 비혼과 결혼을 저울에 올려놓고 비혼이 낫다고 생각한 게 아니다. 그보다는 자연스럽게 내 일상에 결혼이 들어올 틈과 이유가 없다는 것을 몸으로 느끼고 살아갈 뿐이다. 평생 그렇게 느껴온 나로서는 마치 내가 결혼을 향해 달리다가 급커브라도 돌아 유턴이라도 한 듯 왜 비혼자로 살기로 했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난감하다. 어디부터 이야기해야 할지 모르겠다. 때로는 그런 질문 자체가 그들이 내 삶에서 어떤 결함을 발견했기 때문에 그걸 굳이 내게 알려주려는 시도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한동안 스스로 나의 어떤 면이 그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걸까?’ 궁금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나의 일면이 그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비혼자의 일상을 들여다본 경험이 없는 데서 온 이질감 때문이란 걸 안다. 그걸 깨우쳐준 것은 비혼자 친구들이었다. 나처럼 비혼자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보이는 자연스러움, 그 기시감이 분명 나 같은 사람들이 우리 원 밖에도 많으리라 확신하게 해주었다. 적어도 우리가 이상해 보이는 이유는 그저 우리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라는 답을 얻었다. (24)

 

- 비혼주의자라면서 연애는 왜 해?

외로움, 당연히 탑니다. 연애도 저의 경우 가끔 합니다. 그런데, 연애하는 것이 외로움을 타서라는 선생님의 말씀이 못내 씁쓸한 것이 이 글을 쓰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실제로 연애를 하면 외로움이 채워진다는 공식은 사회가 열심히 주입하는 것이기도 하지요. 그래서 미디어는 혼자 밥 먹기 싫은 순간, 성욕이 끓어오르는 순간, 권태로운 주말 낮의 어느 순간 등을 보여주고 , 연애하고 싶다라는 대사를 들이밀기도 하지요.

우리는 연애하고 싶다라는 말 안을 들여다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연애하고 싶다는 당신, 당신이 정의하는 연애의 뚜껑을 열고 그 안의 욕망을 들여다보는 거예요. 내게 필요한 게 주말 낮 누군가와의 밥 한 끼인지, 마스터베이션 혹은 한 번의 섹스인지, 새로운 취미인지... 소중히 다뤄야 할 내 정교한 욕망들이 사회가 주입한 연애 신화 때문에 연애하고 싶다로 뭉뜽그려지는 일이 얼마나 많던가요. 그렇게 연애를 시작했다가 일상의 헛헛함이 채워지기는커녕 간간이 운영되던 일상마저 파괴되는 일이 얼마나 잦은지요. 나는 연애도 하는데 왜 이렇게 외로운가, 혹은 연애를 하는데 왜 이렇게 불행한가를 생각하면서요. ‘이 좋은 걸 누리는데 왜 나는 이 모양인가싶다면, 스스로를 탓하지 건에 이 좋은 게 정말 좋은 게 맞나를 반추하면서 언제든 그만둬도 된다고 스스로에게 말해주는 게 낫잖아요. 그런데 귀찮았는지도 몰라요. 오랫동안 사회와 미디어가 주입한 연애의 환상을 이제 와서 스스로 재정립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요. 그래서 상대에게 제발 예전처럼 대해주길 기다리거나, 이미 지나간 사랑이 다시 돋아나길 기다리면서 자책하는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요.

나의 정서적 안정을 타인에게 외주 주는 건 그래서 위험합니다. 내 감정은 보고받고 피드백을 받고 컨펌할 대상이 아니라, 내가 직접 실무를 뛰어야 하는 것이니까요. 본인은 기혼자이면서 비혼주의자의 연애를 외로움의 방증이라 해석하며 조롱하신 선생님, 혹시 외로워서 결혼을 선택하셨나요? 아휴, 어쩌자고 그러셨어요. 선생님, 지금 외로워서 심통 부리시는 거예요. 혼자일 때 이미 그 내면의 허전함을 어쩌지 못했다면, 그건 둘이 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모 프로그램에서 김이나 작사가님이 하신 말처럼, 사람은 반쪽짜리가 아니라 온전한 하나거든요. 다른 반쪽이 나타나 날 채워주길 기다리는 게 아니라 다른 하나와 어떻게 동행할지를 고민하는 게 연애 아니겠어요? 비혼으로 잘 살 사람이라면 결혼해서도 잘 살거라는 이야기는 그래서 나온 거겠지요. 외로워서 결혼을 했는데도 외로우니,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보다 더 외로울 것 같나요? 아니요. 외로워서 결혼을 했으니까 외로운 건데요. 아휴, 어쩌자고 그러셨어요.

연애는 무기력, 외로움 같은 결핍의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달려나갈 준비가 되어 있는 충만한 상태일 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저도 원할 때 적당히 잘 연애하며 살고 있습니다. 비혼과 비연애를 혼동하는 경우가 있는데 비혼은 문자 그대로 비혼일 뿐입니다.

비혼자가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든다면 마음속을 들여다보시기 바랍니다. 결혼을 희생과 사회 공헌의 개념으로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결혼하지 않는 사람들의 선택을 국민의 의무를 저버린 취급하는 게 아닌지 말입니다. 마음속 한구석에, 나도 저렇게 살고 싶은데 지들만 저렇게 사는 것 같아 화가 나신 건 아닌지요? 결혼이 주는 기쁨도 참 많을 텐데 안타깝습니다. , 다시 비혼이 되신다고 해서 또 기혼자를 공격하거나 폄하하지 마시고요. 각자 잘 살면 되는 겁니다. 비혼주의자에 대한 일갈을 하고 아무 반격도 일어나지 않은 편한 회의 자리가 안락하셨는지요? 슬프게도, 사람들이 특정 의견에 반격하지 않는 것은 그 말이 옳아서일 때도 있지만 많은 경우 어차피 말해도 못 알아들을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답니다. 너무 확신에 찬 사람으로 보이는 것은 때로는 외로운 일이지요. (51)

 

- 조카가 그렇게 예쁘면 네 애를 낳지 그러니

아이를 낳지 않고 아이를 키우지 않는 사람들은 이기적이라는 시선은, 그들 나름의 사회적 양육 활동을 간단히 지우는 데 활용되기도 한다. 물론 그 둘을 다 하는 양육자도 있지만, 사회가 말하는 대로 비출산자가 둘 중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인 건 아니다. 지금 누군가 집에서 보호하는 그 아이가 아이를 낳지 않는 사람들의 노력에 의해 더 나은 곳에 살고 있을 수도 있다. (58)

 


 

비혼 경조사 : 행복과 슬픔을 나눌 때에는 계산하지 않아요

 

- 나도 엄마처럼 살고 싶어

엄마는 자기소개 한다고 공격받지 않잖아. 남편이랑 결혼해서 딸 둘 낳고 그중 하나는 자녀가 둘 있고, 열심히 마련한 자가 아파트에서 산다고 자기소개 했을 때, 그 얘기에 공격받지 않잖아. ‘지금 아파트 안 산 사람을 바보 취급하는 거냐’, ‘남편 없는 사람들을 비하하는 거냐’, ‘출산 안 한 사람을 무시하냐’, ‘네 결혼 생활 얼마나 오래 가나 보자’, 그러는 사람 없잖아. 엄마는 나를 걱정할 수 있어. 그런데 엄마는 내 입장이 될 수 없어. 나도 엄마처럼 되고 싶어. 결혼해서 애 낳고 싶은 게 아니라, 나도 엄마처럼 내가 사는 방식을 사람들이 그러려니 했으면 좋겠어. 내가 누군지 말한 것만으로 공격받지 않고 싶어.” (87)

 

비혼으로 살려면 돈을 많이 벌어야 해

여자가 비혼으로 살려면 경제관념에 밝아야 한다는 말에서, 사실 비혼은 삭제해도 된다. 만약 비혼이란 말이 저 문장에서 정말정말 중요하다고 끝없이 주장한다면, 기혼 여성은 경제관념에 밝지 않아도 된다는 말로도 읽힌다. 성인 여성이 누군가와 결혼했다고 해서 삶에 필요한 재무적 감각과 노력을 파트너에게 전부 의탁해버려도 괜찮을 리 없다. 모든 기혼 여성이 그렇게 살고 있지는 않으며 그렇게 살아서도 안 된다.

또 다른 지점에서는, 비혼에 대한 공포를 조장하는 말이기도 하다. 비혼을 한창 고민할 나이의 사람들 중 몇 명이나 완벽한 노후 준비가 완성되어 있을까? 기혼자 중에서는? 우리는 각자 세상에서 제 몫을 하면서 오늘 당장을 꾸려나가고, 그중 일부를 떼어 다음을 준비해 나가면서 살아갈 뿐이다. 비혼자에게는 펜트하우스 자가 소유에 몇 억의 현금이라도 있어야 안정적일 것처럼 말하지만, 훨씬 적은 수입으로 결합하는 부부에게는 둘이서 노력하면 어찌어찌 된다고 한다.

비혼자의 대부분은 중년이 되자마자 모든 인간관계를 잃고 고독사할 것처럼 묘사하면서 아무나 만나 빨리빨리 결혼하라고 하는 사이, 그런 불안을 안고 결혼한 기혼자도 그 말에서 불안을 안고 살아가는 비혼자도 행복해지지 못한다. (102)

 


 

비혼 라이프 : 나의 보호자로 나 데리고 살기

 

대전에서 태어난 까만 애

우리는 사회가 그런 권력이 없다고 믿는 집단의 사람이 그걸 행사했을 때 얼마나 큰 위험에 처하는지 미디어를 통해 목격한다. 여성의 몸에 대한 품평이 자주 이루어지고, 몇 킬로그램 이상은 여자가 아니라고 말한다든가, 과체중의 여성을 연애 대상이 아닌 것으로 묘사하는 것은 예능에서 자주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나 십수년 전, 모 프로그램에서 여성이 신장 180cm이하의 남성을 폄하하는 단어를 쓴 것이 지금까지도 밈으로 회자된다는 게 어떤 거대한 불평등을 말해주는 사건인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를 존중하고, 내 권리와 존엄을 이해하는 사람을 찾는 가장 빠른 방법은 내 외모에 대해 코멘트를 하지 않는 사람을 기억하는 것이다. (131)

 

우리는 서로의 몸을 관찰하며 컸다 / 134

삶에서 나를 성장시킨 경험은 비판이 아니라 받아들여짐에서 왔다. 받아들이기로 합의한 서로만이 서로가 던지는 말의 뒤편을 믿고 앞으로 갈 수 있다. 나는 앞으로도 그런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다. 삶의 형태와 결정이 달라도 서로를 받아들리려는 노력엔 의심이 들지 않는 사람, 나에게 유효한 메시지를 전달할 줄 알고 그 중심에 언제나 나를 놓아주는 사람. (142(

 

나 데리고 살기 매뉴얼 / 144

국어사전에는 자존감을 스스로 품위를 지키고 자기를 존중하는 마음이라고 규정했는데, 자기를 존중하기 위해 내가 가장 많이 신경 쓰는 것은 나 스스로에게 책임지지 못할 양의 밥을 강요하지 않는 것이다. 감당할 수 없는 짐을 맡아서 끝내 그 짐을 처리하지 못한 나를 스스로 미워하게 두지 않는 것이다.

문제는 어릴수록, 게다가 여성이라면, 이것을 해내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약자일수록 좋게 좋게넘어가기를, 그냥 웃고 수락해주기를 강요받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의 선이 무너지는 경험을 여러 번 하면, 당연히 나를 스스로 존중받는 존재로 인식하기 어렵다. 그래서 가끔 어린 후배들이 나에게 비슷한 질문을 하면, 나는 어떤 항의나 용기를 내라는 취지에서가 아니라 그저 눈을 질끈 감고서 나는 이 감정을 책임지고 끝까지 감당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자고 한다. 부당한 것에 항의하는 비장한 그림을 그리면서 선 긋기를 부담스러워하지 말고, 그저 지금 기분을 감당할 수 없거나 혹은 영원히 감당하고 싶지는 않다는 자각으로 심플하게 그어보자고. 애인을 아무리 사랑해도, 내가 견딜 수 없는 행동을 그가 반복적으로 한다면 용기를 내어 그걸 이야기해야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최악의 방법으로 그를 잃게 될지도 모르니까.

나는 당당한 것, 단호한 것, 혹은 거절의 미학같은 것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매 순간 스스로를 질책하지 않는 방법을 힘껏 찾는 것이야말로 나를 가장 잘 사랑하는 방법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책임질 수 있는 양의 밥을 알고, 그걸 덜거나 더하면서 확정하고, 그걸 싹삭 비워내는 성취를 매일 쌓아나가면서 스스로를 매일 기특해하며 사는 방법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함부로 무한을, 영원을 약속해서 그 책임에 깔려 죽지 않을 것, 그것이 사랑이든 일이든. (159)

 


 

비혼 공동체 :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어도 완전하게 사랑할 수 있다

 

북페어에 엄마가 왔다

흔히 비혼자는 가족과 소원하게 지낼 거라 생각한다. 명절 행사에도 잘 안 가고, 가족 제도와 멀리 떨어져 혼자만의 세계에 살 것이라고. 하지만 오히려 언젠가부터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비혼자인 나의 세계를 부모님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어린 시절 부모님이 전형적인 가족의 형태와 룰을 가르칠 때 그것을 당연하게 여겼던 것처럼, 내가 선택한 삶의 방식을 가족들이 받아들이는 것을 황송함이나 고마움보다는 자연스러운 태도로 바라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고마움 대신 나의 세계를 받아들여준 사람들을 소중히 하고 나의 방식으로 사랑해야지 생각한다. (205)

 

함께 건너가는 일요일

결혼할 생각이 없고요, 페미니스트고요, 사회가 정상 연애라고 용인한 것 바깥의 이야기를 하고 싶고요, 신내림을 받은 무당이고요, 두 명의 애인과 살고 있는 폴리아모리스트이고요... 사람들이 멋지다고 말하는 수많은 작가들은 사실 전혀 멋지지 않기에 타인의 손을 잡고 싶어서 쓴다. 세상이 보통이라고 빋어온 방식과 다르게 사는 우리가 계속해서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그렇게 사는 것에 강철 같은 안정감을 가져서가 아니라 그렇게 친구들을 불러 모아 덜 불안해지고 싶어서이기도 하다. 그 과정에서 평가도 받고, 실수도 하고, 타인의 평가에 움츠러드는 스스로를 한심해하기도 하면서, 그래도 계속해서 써 내려가는 이유는 우리가 나란히 함께 앉은 이 테이블이 주는 달콤함을 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어쩌다 돌아오는 하나의 메아리가 주는 기쁨이 지극히 충만하기 때문이다. (213)

 

웃다 보니 함께 뗏목 위, 이만큼 멀리

나는 켕 언니가 정말 좋은 뗏목 메이트라고 생각한다. 내가 뗏목에 있다는 불안감을 느낄 때쯤, 일단 누워서 하늘을 보게 만드는 사람. 어차피 당장 할 수 있는게 없다면 눈앞에 있는 가장 즐거운 풍경을 펼쳐놓는 사람. 웃다가 까먹고, 웃다가 까먹고 그러면서 지내다 보면 자연 소멸하는 고민거리가 있기도 하고, 웃기는 걸 추구하면서 일단 되는 거부터 하고 살다 보면 길이 열리기도 한다는 걸 알려준 사람. (227)

 

네가 죽는다면

주변 사람들이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주변에는 글로 마주친 인연도 포함되니까 당신도 그랬으면 좋겠다. 죽고 싶은 와중에 이런 책을 만나 이런 문장을 마주하게 된 것은 그것대로 삶이 해둔 알 수 없는 계획일 거라고 믿어주었으면 좋겠다. 일단 죽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이미 바닥을 친 내 삶은 반등 중인 거라고 믿어주었으면 좋겠다. 수많은 밥들과 빛나는 밤들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그걸 빠른 시일 내에 만끽하는 확실한 방법은 일단 하루 더, 또 하루 더 사는 것이라고. (247)

 

- 나의 안쪽 할머니

파워 결혼주의자의 눈에 비친 비혼자는 다른 종족 같겠지만, 행복의 조건이 결혼이라고 믿고 산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을 보며 불안함을 느끼는 이유는 저 아이가 행복하지 않을까 봐여야지 나랑 다르게 사는 사람을 견딜 수 없어서여선 안 된다. 후자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비혼을 후려치고, 결혼의 장점을 나열하고, 내 삶을 철없다고 격하하는 동안, 내가 태어난 순간부터 온 피부와 촉감과 마음으로 나를 사랑해준 할머니는 내 삶의 안위를 걱정한다. 그래서 결혼에 더 매달리지 않고 내가 행복한지를 체크한다. (255)

 

- 당신이 뭔데 비혼 얘길 하는 거예요?

누군가가 자신의 결혼 생활에 대해서 글로 쓰고 사람들에게 선보인다고 가정해보자. 이때, ‘당신이 뭔데 기혼자의 삶을 나서서 말하는 거예요?’라고 말할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내가 나의 어떤 조각을 말했다는 것만으로 사람들이 나에게 대표성을 씌우고 내게 자격이 있는지를 검열하는 것, 그것 또한 하나의 약자성이라는 것을 나는 팟캐스트를 제작하면서 배웠다. 누군가는 비혼자가 싫어서 비혼의 이름으로 이야기를 내놓는 걸 거슬려했고, 누군가는 같은 비혼자로서 내가 자신의 틀에 맞는 비혼자가 아닌 것을 거슬려했다. 전자는 차별적인 시선에서 비혼자인 나를 검열했고, 후자는 나에게 거는 기대가 있기 때문에 나를 검열했다.

그래서 가끔은 주눅이 들었다. 실망하면 어쩌지? 비혼 라이프를 방송에서 이야기하고 비혼 라이프에 대한 책을 쓸 충분한자격은 어떻게 얻을 수 있는 걸까? 제각기 다른 모습을 한 이들이 청취자라고 스스로를 소개하면서 내 앞에 나타나주었을 때, 나는 신기하게 잠시나마 의심했던 스스스로를 하나씩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리고 그 다양한 모습과 목소리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계속 이 이야기를 해주면 좋겠어요.’라는 글과 말을 건네주었을 때, 나는 그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문 하나를 열고 나온 느낌이 들었다.

적절하게 굴어. 적절하게 말해. 그래야 말할 자격이 있는 거야.’

그런 압박 속에 입을 틀어 막힌 여자들이 그동안 얼마나 많았는가. 그게 약자성을 지닌 사람에 대한 대표적인 탄압일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모두에게 적절한 존재가 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는 말하던 동료들이 사라지는 것을 목격하면서 나대면 상처받는다는 것을 학습한다. 그러는 사이, 적절 따위는 개나 주라며 자신의 언어에 대한 검열 없이 막 뱉어도 비난 받은 경험이 적은 사람들은 신나게 계속 마이크를 쥐고 다수로서, 강자로서 말을 이어나간다. 그러면서 말할 수 있는 집단, 마이크를 쥔 모습이 눈에 익숙한 집단으로서의 스스로를 공고히 다져나간다. 입을 닫는 건 말하는 나를 받아들여준 사람들에겐 얼마나 서운한 일인가.

나는 적절하지 않다. 하지만 말해도 된다. 내 삶을 이야기할 자격은 내가 나에게 주었다면 그만이니까. 비혼자로서 마이크를 쥐기 적절하지 않은 사람이 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더 많은 비혼자에게 마이크를 전해주거나 스스로 말해서 비혼 창작자들이 가진 대표성을 희석해주기 바란다. (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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