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페미니즘

<오늘부터 내 몸의 이야기를 듣기로 했어>, 하리타

비상하는 새 2022. 2. 17. 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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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내 몸의 이야기를 듣기로 했어>

 

(382)

 

1. 생존자의 내면세계

 

대개 여성을 향하는 성차별과 성폭력이 일상적인 사회에서 길들여진 반응은 닭이자 달걀이다.’ 길들여진 반응이 사회를 문제없이 흘러가도록 하고, 그렇게 비판과 성찰 없이 굴러가는 사회에서 길들여진 반응은 자연스러운 행동 양식으로 통용된다. (34)

 

(매춘부, 엄마, 의사 등 직업과 지위를 막론하고) 여성=불운하고 약하며 갖은 위험과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피해자이자 희생자. 남성=, 권력, 속임수, 근육, 학식, 인맥 등 어떤 식으로든 을 행사하며 상황을 주도하는 주인공, 영웅, 악당 혹은 가해자. 미디어 소비자인 우리에게 머릿속에서 이 메시지가 수없이 반복되고 있다. 수많은 영상물을 보며 우리의 사고는 자각하지 못한 새에 세상은 원래 저렇다는 믿음을 굳혔다. (38)

 

길들이기 전략을 잘 간파해도 막상 내 안에서 비어져 나오는 길들여진 반응들을 거부하고 다르게 행동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길들여진 반응이 생존자들에게 치명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뻔히 아닌 것에도 아니오를 외치는 것이 번번이 실패할 때, 나의 인식과 태도는 당당한 페미니스트가 되었는데 막상 행동은 자신의 이상적인 수준-자기 자신과 주변 사람을 보호하고 상황을 주도하고 통제하는-에 미치지 못할 때 우리가 도달하는 지점은 자괴감과 무력감이다. (44)

 

냉정하게 따져보면 사람마다 의견이 다를 수 있는 사안이거나, 같은 말을 여자가 했더라면 동의했을 텐데 단지 남자 입에서 나와 과민 반응하는 경우가 있었다. 내가 남성 일반에 대한 불신과 분노를 그의 말이나 행동에 투사해서 바라보기 때문이었다. , 남자이면서도 고유한 개인인 그의 정체성을 무지하고 무감각하고 특권적 위치에 있는 남성이라는 단일한 틀로 환원시켜 버렸던 것이다. (48)

 

2. 치열한 시간여행, 심리치료

 

EMDR은 총 8단계 과정으로 정립되어 있다. 개발자인 프랜신 샤피로 박사 Dr. Francine Shapiro의 저서 [트라우마, 내가 나를 더 아프게 할 때]에 따르면, 이 요법의 핵심 근거는 사람의 뇌가 어떤 경험을 기억으로 저장하는 방식에 대한 20세기 후반까지의 연구 결과들이다. 사람의 뇌에서는 적응적 정보처리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어서 우리가 어떤 일을 겪을 때 정서적 혼란과 고통이 있더라도 곧 극복할 수 있도록 한다. 살아가는 데 필요한 정보나 해결책은 저장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대부분 흘려보내는 것이다. 이러한 정보처리는 대부분 무의식 수준에서 이루어지는데, 대표적으로 양 눈을 좌우로 빠르게 움직이며 꿈을 꾸기도 하는 REM 수면 동안 이루어진다. 하지만 만약 이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실패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럴 때는 그 경험에 대한 기억이 기존 기억들이 모여 있는 네트워크에 통합되지 못하고 따로 떠돌게 된다고 본다. 처리가 미처 안 되었기 때문에 그 안에는 유용한 정보말고도 그 경험을 할 당시의 생각과 감정, 이미지, 신체 감각 등이 날것으로 저장된다. 애초에 시스템이 잘 작동하지 않은 이유는 그 사람이 충격과 고통에 압도된 상태였기 때문인데, 이렇게 처리되지 않은 기억이 오늘날 어떤 요인에 의해 촉발될 때마다 날것으로 머물러 있던 감정과 반응, 즉 충격과 고통이 다시 고스란히 살아난다. 이것이 트라우마, 다시 말해 정신적 외상을 입은 상태라고 볼 수 있다. EMDR 요법을 쓰는 치료사는 현재 문제를 일으키는 것으로 보이는 트라우마 기억을 찾아내 그 기억을 재처리하는 방식으로 치료한다. 재처리는 안구 운동 민감소실 및 재처리라는 단어에 나타나 있듯, 내담자가 REM 수면 상태의 안구 움직임을 모방한 안구 운동을 유도하면서 그동안에 문제 기억이 기존 기억 네트워크에 적응적으로 통합될 기회를 만든다. 처음에는 안구 운동만 쓰였지만 지금은 정향반응(지속적인 집중 상태)을 만들어주는 다른 양측성 자극들도 치료에 널리 쓰인다. 재처리 과정이 성공적으로 일어나면 그 기억과 관련된 신체 감각과 과민반응,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이 줄어들고, 충격적인 이미지가 더 이상 선명하지 않게 된다고 알려져 있다. (85)

 

트라우마는 처리되지 않은 기억 때문이라고 하는데, 적응(학습) 메커니즘을 안 거쳤더라도 사람은 누구나 끔찍한 경험에서 역시 나름대로 생존에 필요한 정보를 축적한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비뚤어지고 자기파괴적인 잘못된 믿음을 학습할 가능성이 높다. 내 경우에는 나쁜 경험에서 누구에게도 의지할 수 없다는 느낌을 반복적으로 받으면서 잘못된 믿음이 생겼다. (105)

 

누군가는 영화 속 폭력이 다 실제로 벌어지는 일들의 재현일 뿐 아니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여성들은 세상이 위험하다는 걸 이미 수많은 방법을 깨치고 있다. 미디어가 이를 상기시켜줄 필요는 없다. 오히려 여성들은 미디어로 인해 불안과 공포를 과잉 학습 당하고 있다. (131)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데 꼭 필요한 세 가지가 있는데, 그건 트라우마로부터 일정한 거리 두기, 생활 속에서 심신 안정에 도움이 되는 활동들을 하는 것(뜨거운 목욕, 음악 듣기, 산책, 요가 등) 그리고 주변 사람들과 좋은 관계들을 맺어 나가는 거라고 했다. (143)

 

치료를 넘어선 치유란 무엇인가? 다소 건조하고 차가운 임상 심리학에 역시나 건조하지만 그래도 꽤 와 닿는 개념으로 트라우마 이후 성장이라는 개념이 있다. 트라우마가 있는 사람에게 진정한 의미의 회복은 고통스러운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를 통해 성장하는 과정까지 포함된다고 한다. 샤피로 박사는 우리가 트라우마 치료과 치유를 겪어내며 궁극적으로 다음의 질문을 할 것을 청한다. “나는 무엇을 배웠는가? 나는 어떻게 더 강해졌는가? 나는 무엇에 감사하는가? 내가 아는 것을 바탕으로 누구를 도울 수 있는가?” 이를 토대로 앞으로의 삶을 더 의미 있고 행복하게 살라고 한다. (172)

 

3. 몸 해방 프로젝트

 

이제는 아는 것을 넘어서, 비판하는 것을 넘어서 내 몸으로 체화하고 내 몸이 자유로울 수 있는 실천을 원한다. 자신감, 자존감, 자기긍정, 활기, 야성, 홀가분함, 강인함과 같은 좋은 느낌으로 몸과 마음의 연결을 재구성하고 싶다. 사회가 요구하는 여자다움 말고 우리 스스로가 가졌고, 또 앞으로 가지고 싶은 아름다움, 혹은 아름답고픈 욕망마저 내던져버리고 그냥 나다운 것은 과연 무엇인지 질문한다. (207)

 

미란다 그레이의 월경주기 4단계

: 성찰하는 단계(월경주기의 1~5)-역동적인 단계(월경주기의 6~13)-표현하는 단계(월경주기의 14~20)-창조적인 단계(월경주기의 21~28) (271)

 

 

 

더 나은 월경을 위한 새로운 지식과 지혜 : 배란기에 식욕이 왕성해지는 이유는 몸이 만일의 임신을 대비해 영양을 보충하려 하기 때문. 출혈로 기력이 빠지는 월경 중에는 가공식품이나 카페인을 피할 것. 호르몬 변화에 민감해 몸이 붓거나 살이 잘 찌는 사람에겐 건강한 지방이 더 필요. (280)

남자가 바라보는 대상으로서의 여성 담론은 이제 더 이상 새롭지도 않다. 다만 계속 유효하다. 여자도 다른 여자를 바라본다. 그리고 자기 자신도 바라본다. 남자의 시선을 사회에서 학습하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은 결국, 여성들의 몸이 바라보는 시선에 항시 얽매인 부자유 상태라는 것을 의미한다. (295)

이 사회에서 여자는 아직도 예뻐야, 정확히는 예뻐 보여야 한다. 그게 지금 21세기에도 여전히 여자다움의 핵심이고 정답이고 결론이다. 예쁜 것이 외모의 고정된 상태라면, 예뻐 보이는 것은 좀 더 엄격한 잣대로서 얼굴과 몸 생김에 더해 표정, 몸짓, 언어, 상대방에 대한 태도, 그리고 꾸밈새까지 포괄한다. 바라봄의 대상, 여성들은 이렇게 촘촘한 시선의 포위망에 갇혀 있다. 태어나서부터 단 한번도 이 포위망을 벗어나 본 적 없는 여자들은 따라서 일생 대부분에 걸쳐 예뻐 보이기 위한 전략을 열심히 익히고 연마하고 수행한다. 바로 소비를 통해서. 시간과 노력, 돈을 비롯한 각종 자원의 소비. (297)

남에게 예뻐 보이기 위한 게 아니라 자기만족을 위한 소비라는 문구는 언뜻 여자들의 자존심을 세워주는 것 같지만 뜯어보면 기만적이다. 순수하게 자발적인 동기나 욕구라는 것이 과연 존재할까? 모두가 곱게 화장하고 출근할 때 나만 민낯으로 등장하면 나의 안색은 초라하고 칙칙해 보인다. 종일 아파 보인다는 소리를 들으며, 프로페셔널하지 못하다는 평가까지 나오는 게 한국의 직장이다. 그러다 보니 지갑을 열 땐 내가 원하고 필요해서 돈을 썼다고 믿지만, 실은 우리 모두 내면화한 예뻐보이기 경쟁에 떠밀려서 하는 지출이 수두룩하다. (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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