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치심 탐구 생활>
프롤로그 어딘가 맞지 않는 사람
서문 마트료시카의 가장 깊숙한 곳
1장 완벽에의 환상
감정과 욕구를 마비시키기
감정을 확신하지 못하는 건 자기확신의 부족으로 확장된다. 내가 욕구를 가져도 되는지, 감정을 느껴도 되는지, 그것을 표현해도 되는지 확신하지 못한다는 건 내가 존재해도 되는지 확신하지 못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지금 갖는 욕구와 감정이 적절한가? 내가 무언가를 느끼는 건 옳은 일인가? 내가 무언가를 느끼고 있기는 한가? 감정과 욕구의 혼란 속에서 내 존재에 대한 타당한 믿음의 상실, 그것이 수치심으로 연결되었고, 나 자신에 관하여 아무것도 모르겠는 기분이 오래도록 지속되고 있다. (39)
나를 믿어주지 않는 사람
나는 나를 보호하고자 했다. 아무런 상처도 나지 않게 해주고 싶었다.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지 않으려 애썼고 나의 안과 밖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직면하기를 회피했다. 건강한 공격성을 키울 기회를 놓치게 된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공격은 없이 방어, 방어, 방어.
회피의 커다란 범주 안에서 내가 찾은 또 다른 방법은 건강하지는 않아도 효과적이었는데, 바로 수동성이었다. 그건 정말 나를 지킨 것이었을까? 타인에게 맞춰가다 보니 스스로 좋은 것도 없어져 갔다. 처음에는 보고 싶은 영화를 양보했지만 나중에는 보고 싶은 영화가 떠오르지 않았다. 원한다는 게 어떤 감각인지도 낯설어져 갔다. 아무것도 열렬히 원하지 않는 상태가 익숙해져 갔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미어캣처럼 바깥을 관찰하다가 바깥의 시선으로 자신을 관찰한다. 관찰하는 동시에 관찰당하면서 내 안에서 조금씩 무언가가 깎여 나간다. 나의 진실한 욕구와 감각과 취향을 관찰하는 대신 욕구의 합당함과 감각의 유용함과 취향의 멋짐 여부를 관찰하기 때문이다.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무엇을 느끼고 생각하는지, 나에 대한 데이터를 쌓아나갈 기회를 잃는다. 나라는 사람에 대한 통합성을 상실한다. 내가 나인 것이 어색하고 내가 나인 것이 부끄럽다.
도덕성을 수치심의 해답이라고 여겨온 이유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하고 도덕적인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동안 내가 끝없이 버렸던 건 나 자신이었다. 그것은 어려움을 감당할 수 있다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 거절과 갈등과 실망에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믿음, 그것을 자신에게 허락하지 않은 대가였다. (46)
(정답이) 되고 싶은 나는 실패한다
내게는 되고 싶은 모습이 있고 되어야만 하는 모습이 있다. ‘되고 싶다’로 시작했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어느새 ‘되어야 한다’로 바뀌어 그렇다면 ‘반대 모습으로는 되고 싶지 않다’를 뛰어넘어 ‘절대로 되어서는 안 된다’가 의식에 각인된다. 결코 되어서는 안 되는 모습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리스트를 갖게 된다.
나는 자꾸만 나 아닌 무언가가 되려 한다. 자주 자기 자신이 되는 것에 집착하나 그럴 때 상정하는 자신조차 지금의 내가 아닌 어딘가 먼 이상향에 존재하는, 지금으로서는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겠는 그런 사람이다. 지금과 다른 모습이 되어야만 한다고 믿는다. (55)
자기애와 수치심의 상관관계
극심한 그러나 드러나지 않는 자기애는 나에 대한 타인의 평가에 극도로 신경을 곤두세우게 만든다. 무시하거나 적대적인 시선에 민감하고 그것을 뻥튀기해 자아의 상처로 삼는다. 그러나 이 시나리오의 진정한 비극은 설사 타인의 인정이 주어지더라도 충분하지 않다는 점이다. 애초에 이상적인 나를 설정해놓은 것이 허상이자 불안이라서 마음 깊이 뻥 뚫린 곳은 진정으로 채워지지 않는다. 그저 집착적으로 타인의 반응을 살피고 조그마한 단서에 상처 입는 패턴을 반복한다. 실은 몹시 유아적인 태도이다. 세상을 자기중심적으로 바라보고 내게 난 작은 상처에 안달복달하는 것은.
나서지 마, 드러나지 마
착함은 여성이었다. 여성이 사회에서 받아들여지려면 착해야 한다. 공부를 잘해도 착하면 된다. 아니, 공부를 잘할수록 착해야만 한다. 여성으로서의 사회화가 진행되면서 내 세계의 규칙이 바뀌고 있었다. 또래 사이에서 받아들여지기 위해 그전까지 필요했던 덕목이 친화력, 주도력 같은 것이었다면 어느덧 착함, 튀지 않음, 나대지 않음, 물러서도 양보하고 배려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렇지 않으면 무리에서 떨어져 나갈지도 모르는 존재. 나는 짜인 각본을 충실히 따르는 타입이었다.
한국 여자로 사회화된다는 것, 그것은 마치 저주와도 같았다. 저주 속에서 자아는 발달해나갔고, 또래와 가정과 사회의 압박과 메시지들 그리고 나 자신의 개인적인 성향들이 뒤범벅되어 존재에 대한 수치심을 착실하게 쌓아 나갔다. (71)
2장 집에 두고 온 나
남김없이 설명되어야 한다는 불안
내 머릿속의 파파라치
어느 순간에도 내게 머물러 있다. 몰입과는 다르고 차라리 집착에 가깝다. 말과 행동, 때로는 겉으로 내뱉지 않는 생각까지도 사소한 디테일까지 모조리 검열하며 나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다. 그리하여 나는 두 개의 존재로 나누어져 있다. 행위와 시선. 주체와 대상. 본래의 나와 그림자인 나. 날 움직이는 제1의 존재와 날 멈추는 제2의 존재.
두 개의 회로를 돌리기 위하여 내적 에너지가 엄청나게 소모된다. 몸이 가볍다거나 에너지가 차오르는 느낌을 경험해본 적이 없는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매 순간 나를 관찰하고 비판하고 주의를 주는 감독관이자 평론가인 그림자는 할 일이 많다. 그가 마음만 먹으면 없던 먼지도 생겨난다. 피곤해 죽을 것 같지만 그를 거역할 수 없다.
그림자는 나이고 내가 아니다. 밖에서 들어왔던 말들, 내가 남을 평가하던 생각들,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모습들, 가정과 학교와 사회에서 한 목소리로 내게 기대하고 요구했던 실낱보다도 가느다란 ‘정상’과 ‘우등’을 향한 기준들, 이것들이 모두 뒤엉켜 시꺼메졌다. (81)
가면의 비극
회사에서, 독서 모임에서,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지으며 생각한다. 진짜 나는 다른 데 가서 보여주면 돼. 그러나 그런 곳은 없다. 집에 들어와 문을 닫고 혼자 있어도 갑작스레 가면을 벗고 진짜 내가 되지는 못한다. 그것은 꾸준한 훈련이 필요한 일이다. 나로 살기 위해서는 꾸준한 성찰과 자기수용, 때로는 저항과 용기가 필요하다. 우리는 기대대로 사는 데 익숙하고 기대대로 사는 건 어떤 면에서 쉽고 편한 일이니까. 살라는 대로 살다 보면 가면은 점점 내 얼굴이 되어버리고 두껍게 밀착된 가면을 벗겨내는 건 한 순간의 마음으로 되지 않는다. 내 손으로 쓴 가면이지만 원한다고 벗어버리지 못하는 게 가면의 비극이다.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되는 것에 강렬하게 집착해왔다. 자유로운 나, 있는 그대로의 나, 순수한 결정체의 나, 그것이 되는 것이 중요했다. 하지만 타는 듯한 갈증은 그것이 부족하다는 사실만을 여실히 드러낼 뿐이다. 목마름 안에 다른 내용은 없다. 나는 스스로를 초라하게 여기면서도 왜 그렇게 기를 쓰고 내가 되고자 할까?
나 자신이 되고 싶다는 욕망은 가면을 벗고 싶다는 뜻이다. 비일관적이고 모순된 사람이어도 괜찮다는 안심을 갖고 싶은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나도 가치 있다는 확신을 간절히 바라는 것이다. (91)
그를 숭배하는 이유
관계성의 전제는 나에게 소속되기
내가 나인 게 부끄러우니 나를 통째로 갖다 내버리고 싶은 심정이 되는 건 그럴 법하다. 다른 사람인 척해봐도 완전히 꾸며내기란 불가능해서 나는 나도 아니고 멋진 누군가도 아닌 미적지근한 아무도 아닌 이가 되어버리고 만다. 아무도 아닌 상태로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에게 사랑받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나.
내가 나에게 소속되어 있는 한, 나는 어디서도 배제되지 않는다. 진정한 나로 존재하는 한, 내가 있는 곳이 바로 나의 자리가 된다. 나에게 소속된다는 것은 나를 알고, 편안하게 느끼고, 그리하여 나로 자연스럽게 존재함을 뜻한다. 나라는 사람의 경계를 가지고 그 안에서 생각과 감정, 의견과 취향, 태도와 가치관을 자유롭게 느끼고 사고하는 것을 뜻한다.
나에게 소속되고 나면 모임에서 주류가 되는 것은 정말로 상관없어질지도 모른다. 배우 김혜수는 한 인터뷰에서 “늘 중심이 되려고 하면 결핍을 느끼게 되지만 일원이 되려고 하면 열려 있는 부분이 있다”라는 말을 남겼다. 주류가 되기 위한 정답지를 버리고 일원이 되는 것, 그것이 나의 새로운 목표가 되는 중이다. (103)
말하기 귀찮아
나는 필요한 말만 하는 사람이라기보다 이해받지 못하는 두려움이 큰 사람이다. 구구절절이란 나를 타인에게 설득하거나 설명해내야 한다는 압박에 짓눌려 있을 때 스스로 느끼는 마음이고 그렇게 해도 나를 이해시키지 못할 거라는 깊고 막연한 두려움이 미리 입 아픈 감각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즉, ‘구구절절’은 이해받고자 하는 몸부림이고 ‘말하기 귀찮아’는 이해받지 못할 거라는 두려움이다. 수치심이 만들어내는 우울의 감각이다. (111)
3장 가치 증명 전쟁
성취라는 덫
잘하면 내 덕, 못하면 내 탓. 우리는 끊임없이 이 메시지를 주입받는다. 내가 잘하면 돼. 여기서 잘하는 기준은 과연 어디일까? 우리는 얼마큼 잘할 수 있을까? 결과가 나에게 달렸다는 생각은 때로 희망을 갖게 하지만 대체로 자괴와 불안을 만들어낸다. 존재 가치가 능력에 따라 좌우된다는 믿음은 인간을 불안에 떨게 한다. 최상의 능력을 증명해내지 못하면 쓸모없는 존재가 될 거라는 두려움은 자신의 취약성을 감추려는 동기가 된다. 내 삶이 내 손에만 달려있다는 생각은 달리 보면 오만이고 결과적으로 타인과의 연결을 끊는다. 혼자서 해내야 한다는 압박을 만들어내고 너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없게 한다. 반대로 본다면 네가 잘해 내지 못한 건 모조리 너의 탓이 된다. 그러니 나는 너에게 손을 내밀 이유가 없어진다. 각자도생의 시대. 고립과 외로움의 시대. 자괴와 무시의 시대.
수치심은 성취를 밟고 서서히 생겨났고 나는 성취로 수치심을 덮으려 노력했다. 그러나 성취에 집착할수록 점점 더 되어야만 하는 모습에 갇혔다. 한곳에 존재 가치를 몰아넣을수록 그것을 제외한 영역으로는 의미를 갖지 못하는 인간처럼 느껴졌다. 성취는 나를 기쁘게 했지만 동시에 두려움이었다. 절대로 잃으면 안 된다는 불안의 근원이었고 내가 받는 조건부 사랑의 절대 조건이었다. (125)
무엇이든 중 제일 좋은 것
객관적 성취라는 독 앞에서 우리 모두는 언제나 부족한 존재가 될 뿐이다. 자신에게 친절하고 상냥한 태도 같은 걸 발달시킬 틈은 사치일 뿐, 잘해봤자 어르고 달래는 태도가 최선이고 그것의 목표마저도 나를 다시 레이스 위로 책상 앞으로 시험장으로 점수판 위로 데려다 놓는 것이다. 자기확신이나 충만감 같은 것을 모두 제거해버리는 장소로 말이다. 성취는 단 한 번도 나를 가득 채워준 적이 없다. 그것에 나 자신의 존재 가치가 모조리 달려 있다는 압박 속에서는 더구나 그랬다. (134)
소녀들의 자기부정
분명히 존재했었다. 자기확신과 자존감의 감각이 나를 나로 살게 했었다. 그것이 언제 어떻게 사라져버렸는지를 추적하는 것은 나 자신의 타고나거나 발달시킨 성향, 내가 받아왔던 반응과 시선들, 이 사회의 공기, 눈에 보이지 않는 성별 규범과 기대와 압박, 사회문화적인 환경이 개인과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에 관하여 살펴봐야 하는 일일 것이다. (140)
사회와와 사춘기의 합작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 나의 황금시대였던 시절은 서툴지만 권위와 리더십, 주장과 타협, 다른 사람들과 조화롭게 어울리면서도 주도적으로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전략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등을 찬찬히 탐색하는 발걸음이었다. 그런 점에 흥미를 가질 만한 충분한 기질을 갖고 있었고 배움의 씨앗이 자랄 수 있는 비옥한 토양 또한 갖고 있었으며 적어도 그때까지는 배움의 토양을 따사롭게 비춰주는 햇살 또한 주변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로 인해 나는 나를 믿어줄 수 있었다. 그 믿음은 혼자 만들어낸 것도 아니고 어느 날 갑자기 어디선가 나타난 것도 아니었다. 여러 일을 해내며 신뢰의 눈빛을 받고 내가 나를 드러냈을 때 긍정적으로 해석되는 시간들을 통과하며 자연스레, 그러나 실은 무척 희귀하고 소중하게 만들어진 것이었다. (141)
아무것도 되지 못할 거라는 공포
내가 아무것도 아닐지도 모른다는 상상, 시간이 지나도 무엇도 되지 못할 거라는 상상에 나는 몸을 떤다.
(때로 정신을 차린) 나1 : 그런데 꼭 무언가가 되어야 하나? (수치심에 잠식된) 나2 : 이론상으로는 아니겠지만... 그 생각을 떨칠 수가 없어. 나1 : 그럼 되고 싶은 무언가가 있어? 애초에 무언가가 뜻하는 게 뭔데? 나2 : 글쎄. 명예, 부, 업적... 아니면 인격, 애정, 인정, 중요한 존재가 되는 것? 나1 : 그렇게 많은 것을 한꺼번에? 중요하다면 대체 누구에게? 나2 : 몰라, 그냥 무조건 멋지고 좋은 무언가! |
자연에는 특별함도 별 볼일 없음도 없겠지.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버릴 거라는 공포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겠지. 그들에게 의미란 ‘지금’ 그리고 ‘여기’뿐일 것이다. 시간이 되면 나무는 어김없이 우거진다. 꾸준하고 의연하게 존재한다. 자연 같은 사람이 되고픈 바람은 수치심을 벗어버리고 싶다는 마음과 이어져 있다.
주류 되기와 도망치기
소속감은 애초에 중요하지 않았다. 속해 있다는 건 나에게 안정보다 핍박에 가까웠다. 꼼짝없이 속해야 하는 곳에서 나는 꼼짝없이 잘해 내야만 하니까. 속한다는 것은 일부라는 것이고 일부라는 것은 구성원이라는 것이고 구성원이라면 두각을 나타내야 한다. 경쟁을 부추기는 말들에 나는 속으로 강하게 반발했지만 그러한 가치판단이 내면화되는 것을 막지 못했다. (152)
좋은 영화를 만들 자신 같은 것
“너는 무지막지하게 어려운 영화 이론서를 볼 때나 기가 막히게 좋은 영화를 볼 때 막막하지 않니?” 그러자 친구가 대답했다. “나는 좋은 영화를 만들 자신이 있어.”
살면서 내가 갖고 싶던 건 이런 종류의 느낌이었다. 그가 결국 좋은 영화를 만들었는지 아닌지는 상관없다. 내가 갖고 싶은 건 정말로 좋은 영화를 만들어내는 결과가 아니라, 좋은 영화를 만들 자신이 내게 있다고 믿는 것, 나는 좋은 삶을 만들어나갈 수 있다고 믿는 것. 나를 우울하지 않고 불안하지 않고 초조하지 않게 만드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태도일 것이다. 지금껏 걸어온 길과 이뤄낸 성취와 나를 믿어주는 사람들을 떠올려 봐도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단단한 훈풍을 느끼지 못하는 나에게 결여된 태도다. (159)
내가 길을 잃은 곳은 바로 그곳이었을지 모른다. 그 동떨어짐 사이, 머리가 아는 것과 가슴이 느끼는 것 사이, 귀로 들리는 것과 그래서 발걸음을 떼었을 때 나에게 꽂히는 시선 사이에서. 나라는 몸 하나에 서로 다른 기대와 모순되는 잣대가 들이대어질 때, 그리하여 나는 목표를 완전히 달성하는 완벽한 사람이 되지 못하겠다는 희미한 예상이 어렴풋이 밀려올 때, 내가 믿어왔던 나라는 사람이 더 이상 나의 무기가 되어주지 못할 때, 그때가 바로 수치심이 서식하기 몹시 좋은 환경이었다. (163)
4장 여자라는 봄
티 없이 완벽하게
불경한 몸
절대로 좋을 수 없는 몸을 미워하지 않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자신을 미워하는 건 또 얼마나 쉬운가. 세상을 미워하기보다 내게로 탓을 돌리는 건, 그래서 내가 잘하기만 하면 좀 더 노력하기만 하면 세상의 마음에 들 수 있을 거라고, 그러면 나도 나를 사랑해줄 수 있을 거라고 믿는 건 얼마나 간편한가. 조건부 인정과 사랑에서 조건이 존재하는 것 자체에 의문을 품기보다 조건을 만족시키려고 노력하는 방향이란 건 얼마나 직선적이고 단순한가. 기준에 가까워질수록 세상과 타인의 관심과 호의가 생겨나는 걸 확인하는 일은 또 얼마나 달콤한가. (187)
여자를 하나의 인간으로 존중하는 시선이 부족한 세상에서 자기 자신을 존중하기 위하여, 몸을 수치스럽지 않은 존재로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존중하기 위하여, 내 몸이 외부에 의해 마음대로 점령되거나 가르고 나뉘고 재단되는 게 아니라 나라는 존재가 담긴 나 자체임을 선언하기 위하여, 우리는 여자의 몸에 가득 덮인 기호와 상징을 비판하는 동시에 새로운 시선을 만들어내야 한다. 내면화되어 버린 세상의 시선을 걷어내기 위하여 새로운 사고와 새로운 이미지가 필요하다. (190)
헛똑똑이라는 갑절의 욕
헛똑똑이라는 명칭부터가 수치심을 유발하는 것 같다. 저 말을 들을 때마다 왠지 모르게 내가 텅 빈 존재인 것만 같이 느껴진다. ‘헛’이라는 접두사가 주는 느낌 때문일까? ‘헛’ 나는 텅 비어 있다. ‘헛’ 나는 쓸데없다. ‘헛’ 나는 잘못되었다.
똑똑함을 전제하고 있으나 빈틈이 똑똑함까지 집어삼킨 단어. 똑똑함마저 아무 소용이 없어진 단어. 나는 똑똑함을 정체성으로 삼았었고 그렇기 때문에 헛똑똑이라는 단어는 정체성을 뒤흔드는 말이었다. 흔드는 것은 힘이 강해서 어느덧 깊은 마음에서는 똑똑이보다 헛똑똑이가 훨씬 더 강력한 기운을 가진 어둠의 지배자 정체성이 되어 버린다.
똑똑함은 쓸모와 긴밀하게 닿아있다. 능력과 성공과도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똑똑하지 못한 모습을 보일까 봐 두려워하는 것은 쓸모없어 보일까 봐, 무능력하고 실패자로 보일까 봐두려워하는 것과 같다. (195)
여성의 똑똑함을 진정으로 높게 쳐주지 않는 문화, 똑똑하다는 말이 너 잘났다는 말과 같은 뜻으로 쓰이며 때로는 단지 자기 주관과 의견과 생각이 있다는 이유로 여성을 묘사하는 형용사로 쓰이는 분위기 안에서 헛똑똑이는 갑절의 욕이 된다. 그래, 너 똑똑하다, 근데 그 똑똑함조차 가짜네. (197)
대화를 수다로 만드는 시선
여자들은 자신이 가진 것, 자기와 관련된 것들을 겸손보다 조금 더 나아간 태도로 평가절하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여자의 실패에 더 가혹하게 구는 문화가 만들어내는 태도다. ‘정상’과 ‘가치’의 기준이 여자에게 훨씬 더 촘촘하게 짜여 있는 상황이 이에 기여한다. (202)
남성적 잣대는 언제든 나를 충분히 인정해주는 일이 없다. 나라는 여자에게는 숨길 수 없는 구멍이 나 있어 결코 그릇 가득 물을 채울 수 없다. 구멍을 막으려 애쓰기보다 주어진 그릇을 바꾸어버리고 직접 만든 그릇에 나를 담으려 애쓰는 게 지금 여기에 선 나의 최선의 삶이다. (205)
5장 완벽과 충분 사이
나만 그런 줄 알았어
쉬이 발설하지 못하게 하는 것, 말해봤자 이해받지 못할 거라는 두려움을 내면 깊이 심어놓는 것, 그리하여 혼자 고립되게 만드는 것이 수치심의 고약함이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나처럼 서우치에 대한 압박을 갖고 있을 거라고 지금까지는 미처 상상하지 못했다. 돌아보면 능력지향적이고 성취중심적인 경쟁사회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이 공유할 만한 억압일 것임에도 수치심을 잔뜩 끌어안은 나는 오로지 혼자 삭여내고 혼자 해결해내야 하는 두려움이라고 여겼다.
하나씩 알아가는 중이다. 이 수치심은 혼자만 겪는 것도 아니고 혼자서만 만들어 낸 것도 아니겠다는 깨달음. 수치심이 어떻게 사회화 되어 왔는지, 사회화된 수치심이 개인의 특성과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생각해본다. 그리하여 이 수치심이 정말 내 것일까? 물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까 처음 워크숍을 열 때의 기대와 조금은 같고 조금은 다르지만 분명히 얻었다. 나는 어딘가 잘못되고 어긋나서 나라는 인간의 개성은 숨겨야만 한다는, 목을 죄고 있던 무언가의 힘이 조금 느슨해지는 안심을 말이다. (218)
너에게 기대기 위해서는
의존하려면 다름 아닌 바로 그것들을 보여야 하는 것이다. 취약함을 말하고 감정을 나누고 깨져 있는 나를 드러내야 한다. 꼿꼿하게 무장한 채로는 기댈 수 없다. 하지만 무장해야만 세상이라는 전장에 나갈 수 있다고 믿는 우리에게 건강한 의존과 도움 요청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마음 놓고 취약함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굳건한 조건이 필요하다. 흔들리지 않는 애정에 대한 믿음, 약한 모습을 보인다고 해서 나를 떠나지 않을 거라는 믿음, 나의 약함을 무기로 삼아 나를 비난하거나 판단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 그게 있어야 비로소 우리는 취약해질 수 있다. (223)
어떤 감정이든 ‘네가 이상하다’고 말하지 않는 게 나를 털어놓을 수 있게 만들었고, 내 몸 밖으로 감정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렇게 밖으로 털어내고 나면 그 ‘말할 수 없는 감정’에서 조금 놓여나는 기분이었다. (225)
수줍은 사람이 아니에요
오후 세 시의 수치심에 관하여
나의 성취가 내 힘으로만 이뤄낸 나만의 것이 아니라면 성취의 결과를 타인과 사회와 함께 나누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뒤따랐다. 그것이 어쩌면 성취에 대한 수치심에서 벗어나는 길이 되어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자 나는 작은 돌파구를 발견한 기분이었다. 나만의 것이 아니라면 나를 증명해내는 도구가 될 수 없다. 나만의 것이 아니라면 혼자서 기를 쓰고 이루어내야 한다는 압박도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성취라는 덫에 빠져 홀로 분투하는 듯한 외로움이 덜어질지도 모른다. (241)
성취는 여전히 많은 측면에서 나에게 중요하다. 나를 세상에 증명해내고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망은 그 자체로 독이 되진 않는다. 건강한 성취욕은 내게 동력이 되어주고 나를 채워주고 나를 서게 만든다. 다만 지금껏 성취감이 짧게만 지속되었던 이유, 다음 목표를 허겁지겁 찾아 나섰던 이유를 잊지 않는다. 삶과 일과 관계들을 평가하는 나만의 기준을 만들어본다. 오래 지속되는 성취감, 나를 가득 채우는 충만함은 원하는 것을 성취할 때 그제야 생길 것이다. 그러므로 프리랜서로서 내가 하는 일을 스스로 인정하고 좋아한다는 점을 집을 나설 때마다 상기한다면 오후 세 시의 나도 이내 가슴을 펼 수 있을 것이다. (243)
이름이란 존재의 서걱거림
이름 석 자에 거리를 느낀다는 것은 나 자신과 어색하다는 뜻이다. 그건 성씨와 이름이 어울리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모두가 나라고 부르고 나라고 믿고 있는 무언가와 맞지 않는 듯한 느낌, 세상과 어울리지 않는 듯한 기분, 내 존재가 어디선가 어긋난 것만 같은 수치심이다. (249)
우리는 각자 다른 방향으로 사회의 주류 가치에서 벗어나 있다. 조금씩 이상하고 조금씩 엇나가 있는데 그래서 더 자연스럽고 자유롭다. 나로 사는 법을 계속 탐색해나간다. 이름을 만들고 새로운 세상을 만나고 나를 드러내는 법을 찾는다. 내가 나로 편안하게 있을수록 수치심은 줄어든다. 나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질 때, 비로소 나 자신이 될 수 있다. 존재에 대한 수치심이 회복될 수 있다. (253)
수치심에 비추는 햇빛
수치심이 상당히 많은 어려움과 괴로움과 안 그러려고 해도 자꾸만 그렇게 되어버리던 사고 흐름과 성향들을 설명해주는 건 맞지만 그것이 곧 나는 아님을, 온 세포가 수치심으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님을, 수치심과 함께 다른 종류의 나쁜 것들이나 수치심을 뚫고 살아남은 좋은 것들도 나에게는 있다는 점을 상기해보고 있다.
수치심을 잔뜩 들여다보고 나니 내가 가진 좋은 것들을 곁눈질하게 된다. 수치심의 구렁텅이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남아 왔는가. 그건 내가 가진 자질, 힘, 좋은 에너지로 가능하지 않았을까. 거꾸로 생각해본다면 말이다. 곧은 마음을 지니려 애쓰고 진보성과 윤리성을 추구하며 나와 타인과 세계에 진실하고 성실하고 비겁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나. 그런 내가 나를 구해온 게 아닐까. (258)
내게 있는 불안이나 수동성, 비관주의뿐만 아니라 주도성, 추진력, 모험심, 비판적 사고력, 낙관성, 자신감, 배려, 이해력을 발견하게 된다. 수치심을 분석하느라 벗겨진 껍질 아래로 그간 눌려 있던 반짝이는 것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처음에는 나의 모든 것이 수치심으로 빠짐없이 설명될 수 있다고 믿었지만 글을 써나가며 전폭적인 믿음과 전면적인 의존에서 벗어나 다른 면들에도 서서히 조명을 비추고 그것들로 인해 내가 수치심의 화신으로 살아오지는 않았다는 인식, 나아가 이것들이 나의 수치심을 회복할 수 있는 자원이 되어줄 거라는 기대까지 슬그머니 생겨난다. (259)
아는 것이 비록 상처가 되고 고통이 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우리를 올바르게 이끌 것이라 믿는다. 그렇게 알게 된 것들을 인지하고 의식하는 게 수치심을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된다. 적어도 이 감정과 생각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알게 되면 여전히 그 감정과 생각에 잠겨 있더라도 내 정수리가 수면에 바로 닿아 있다는 감각 정도는 가질 수 있게 되기 때문. 조금만 고개를 들면 물속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 조금만 위로 올라가면 숨을 쉬게 될 거라는 희망을 지금 당장 이루지 못하더라도 가질 수 있기 때문. 그리고 무엇보다 말로 내뱉고 밖으로 꺼내놓는 것이 가지는 양기의 힘. 나는 글쓰기와 워크숍으로 나의 수치심을 양지에 드러내 놓고 뽀송하게 말리는 중. (265)
수치심은 취약성에서 온다. 못하고 약하고 부족한, 허점과 결함과 빈틈들. 하지만 취약성이 모두 수치심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 적용하기는 어렵지만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로 생각해보면, 나는 그들의 취약한 점을 사랑한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건 그의 취약한 부분을 알게 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아하거나 혹은 바로 그 점을 가슴 아리게 좋아하며 그의 취약성을 안아주고 싶을 때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 아닐까? 바로 그 관점을 나에게도 적용해보려 한다. 나는 나에게 친절하고 나를 믿어주고 나를 사랑하는 데 있어서 타인을 대상으로 했을 때보다 훨씬 미숙하고 서툴다. 나의 좋은 점, 강인한 점, 반짝이는 모습을 좋아하기는 쉽다. 반면 나의 어두운 면, 약한 면, 취약한 면은 좋아하지 못해도 사랑해주고 싶다. 아니, 사랑하지 못해도 안아주고 싶다. 괜찮다고, 그럴 수 있다고, 그것도 내가 사랑하는 모습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고 싶은 말 그대로. 나의 결핍과 단점과 욕망과 부정적인 감정을 마주하면 오히려 숨통이 트이기도 한다. 자기 자신과 자기애와 나에 대한 환상으로 꽉 찬 마음에 틈이 생기고 바람이 불어온다. 내가 나의 약한 모습을 안아줄 수만 있다면 그 따뜻한 포옹 안에서 수치심은 햇볕을 받은 습지식물처럼 갈 곳을 잃을 것이다. (268)
에필로그 쓰기의 주문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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